소설리스트

혈귀귀환-20화 (20/316)

변화는 기회를 낳는다

변수는 또 다른 변수를 낳고, 그러한 변수가 모이고 모여 커다란 변화를 만든다.

서문취아의 존재로 창고 안에 1년은 넘게 박혀 있어야 할 의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관상으로 평범하게 보일 뿐이지만, 불길에 던져놓으면 진가를 드러낸다.

인면지주(人面蜘蛛)가 뽑아낸 실로 만들어진 보의(寶衣).

난처럼 보이는 그림이 화마와 반응하여 새로운 선(線)을 그리게 되는데, 지도가 만들어지고 그 목적지엔 뇌불의 무공이 잠들어 있었다.

황씨가문은 전통적인 무가(武家)는 아니었지만, 강호의 생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세계. 돈이 있는 곳에 힘이 있으며, 힘이 있는 곳에 돈이 있다. 중원에선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취하려 한다면 결국 끝에 남는 것은 파멸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한다.

당시 황씨가문은 무당에게 도움을 청하여 장보도의 진위를 확인했으며, 구파일련 중 하나인 무당파가 나섰으니 뇌불의 무공을 노리는 어중이떠중이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뇌불이 천하를 들썩였던 무인은 맞았지만, 뇌불의 무공을 얻고자 태극검의 정수를 이어받은 무당과 싸우려는 이들은 없었다.

황씨가문은 무당파에 혈풍뇌전신공 진본을 내어주고 사본을 가졌고, 당시엔 그걸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황보휘가 20대 중반이 되고, 용봉지회에 참가할 때 그가 혈풍뇌전신공을 익혔다는 게 중원에 알려지게 된다.

그 이후엔 어떻게 됐느냐고?

207호는 모른다. 애초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사본이라도 뇌불의 무공은 가치가 있었으니 그나마 황씨가문은 할만하다고 생각하여 뺏으려는 이들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무당이 뒤에 있었기에 굳이 황씨가문을 건드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황씨가문이 어떻게 되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황극린에겐 벌써 모습을 드러낸 현재가 더 중요했다. 누구도 모르게 황극린이 가지고 나왔다면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았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이 알던 과거는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이미 변질되어 뒤바뀐 과거에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과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아야 할 때였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어, 근데 그건 왜 물어본 거야?”

“그냥 궁금해서요.”

“비슷한 거 몇 벌 더 받아왔는데, 혹시 필요해? 나랑 키도 비슷해서 잘 맞을 거 같은데!”

황극린이 잠시 고민한다.

지금 입은 옷을 벗어 달라고 할까?

의복에 그려진 난이 마음에 든다는 핑계를 대고?

오히려 상황이 더 복잡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황극린이 서문취아의 왼쪽 소매를 바라본다. 허리를 감싸는 듯 그려진 난이었지만, 소매 쪽에는 불규칙한 선이 생겨 있었다. 서문취아도 그 시선을 느꼈다.

“아, 이거? 오늘 아침에 바람이 엄청 불어서 추웠잖아. 그래서 보휘랑 같이 불을 쬐고 있는데, 바람에 불똥이 조금 크게 튀더라고··· 헤헤, 내가 좀 덤벙댈 때가 있어서! 품질이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옷이 타는 게 아니라 재가 이렇게 묻었더라. 다행이지? 헤헤.”

서문취아가 미주알고주알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나서는 점심에 묵정 반점에 가 봤거든? 거긴 탕탕면이 괜찮더라! 언제 같이 한 번 가자! 나 곧 있으면 가문에 돌아가야 해서 기회가 없을···.”

“그렇군요.”

서문취아는 곧 떠난다.

그건 솔직히 황극린에게 별 상관없는 일이다.

단지, 지금 중요한 건.

‘124호가 봤겠지. 그렇기에···.’

황극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살짝 돌려 124호가 숨어있는 장소를 흘끔 바라보았다.

124호는 황씨가문에 온 날부터 계속 창고를 뒤졌을 것이며 당연히 장보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욱 열성적으로 황씨가문 사람들의 뒤를 밟았을 것이다. 대상은 가주인 황천옹이나 황보휘였다.

그리고 황보휘는 서문취아와 자주 붙어 다닌다.

황극린은 알게 모르게 그의 뒤를 추적해왔다. 미세하지만 조금씩 흔적이 늘어나고 있다. 아무리 흑살문의 상급 살수라도 사람이었으며, 그는 시간에 쫓기고 있다. 정식 임무였다면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였겠지만, 시간을 더 지체하다간 흑살문의 ‘역학조사’가 시작된다.

특수 임무대와 마주치는 것은 상급 살수라도 무섭겠지.

“날이 춥습니다.”

“어, 그렇지? 너도 훈련하느라 엄청 힘들겠다! 나도 가문에 돌아가면 또 어른들이 무공을 익히라고 엄청 혼낼 텐데···.”

“그만 들어가서 쉬십시오.”

이제 대화의 물꼬를 트나 싶었더니 또 이런 반응이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사람마다 각자 성격이 다른 법이다. 황극린은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생각한 서문취아였기에, 오늘 옷이 바뀐 것을 알아봐 준 것만으로도 황송할 뿐이다. 매번 못됐게 굴다가 한 번 잘해주면 감동한다는 게 이런 걸까?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게 서문취아의 장점이자 단점이라 할 수 있었다.

“으응···. 너도 오늘 훈련하느라 힘들었지? 너도 들어가서 쉬어! 나도 이만 들어갈게! 잘 자!”

황극린이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서문취아가 쫄래쫄래 뛰어간다.

‘아직 순수하군.’

서문취아는 가문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아왔기에, 잘 모른다.

강호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조금만 방심해도 심장에 칼을 꽂을 악인들이 널려있는 곳이다. 물론, 착하고 의협심 넘치는 이들도 많았다. 단지 그 수가 매우 적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황극린의 눈빛이 변했다.

* * *

“헤헤.”

황극린이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어준 것이 고마웠다.

그녀가 이토록 황극린을 신경 쓰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친했던 남궁 언니가 생각나는 것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눈빛이 공허했기 때문이다. 주서웅은 황극린의 눈빛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면, 서문취아는 황극린의 눈빛에서 쓸쓸함을 느꼈다.

황보휘에게 들으니 사연이 많은 아이라 했다.

그럴수록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연히 사랑과 같은 감정은 아니다.

황극린은 이제 14살이었고, 서문취아는 17살이다.

사랑을 논할 나이는 아니다. 거기다 보통 그 나이의 남자는 여자보다 느리게 성장한다. 지금 황극린은 서문취아에게 보살펴주고 싶은 동생이었다.

‘극린이가 잘 됐으면 좋겠다. 황씨가문은 돈이 많으니까··· 재능이 있으면 보휘처럼 무당파에 보내주지 않을까? 그럼 정말 좋겠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인다.

아마 극린이는 얼굴이 잘생겨서 인기가 참 많을 거다. 많은 친우를 사귀며, 툭툭대는 황극린이라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괜한 오지랖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지 않은가?

‘내일도 잠깐 찾아가 봐야겠다. 내가 입은 옷에 관심이 있는 거 같았으니까··· 보휘한테 말해서 하나 얻어줘야지!’

나삼으로 갈아입은 서문취아가 잠자리에 들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으응, 시끄러워.’

늦가을이라 그런지 풀벌레 소리가 우렁차다.

상당히 거슬렸지만, 계속 눈을 감고 있다.

얼른 잠을 자야 내일이 온다.

내일은 극린이랑 보휘랑 같이 반점에 가서 맛있는걸···.

조금씩.

서문취아의 호흡이 길어지고, 낮아진다.

그렇게 이 각 정도가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드르륵.

상급 살수라도 소리를 아예 내지 않고 움직일 순 없다. 거기다 지금은 사방이 조용한 밤이다. 평소엔 들리지 않는 소리라도, 훨씬 크게 들리는 법이다. 다행이라면 풀벌레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는 점이고, 지금은 모두가 잠이 든 시간이라는 점이다.

서문세가에서부터 그녀를 따르는 호위 무사가 있었지만, 황씨가문 내에서는 밤에 경계를 서진 않는다. 그녀가 호위 무사에게 미안해하는 것도 있었으니 말이다.

다행이었다.

124호에겐 말이다.

‘의복을 쟁여놓은 창고의 목함도 죄다 뒤져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약재, 약초, 식재료, 장신구 창고.

장보도가 있을 법한 곳을 모두 뒤져보았지만 없었다. 하오문 부문주가 혼잣말로 헛소리를 한 게 아니라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단지, 124호가 찾을 수 없었을 뿐.

초조함과 짜증.

점점 조여오는 극한의 압박.

124호는 슬슬 장보도를 포기해야 할 때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무리 장보도를 얻고 싶다고 하지만 목숨을 버릴 순 없었다.

누가 말한 것처럼, 124호는 흑살문의 특수 임무대가 몹시 두려웠다.

심장에 똬리를 튼 혈고독이 무서웠다.

곧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124호는 황보휘와 서문취아가 같이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리고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장보도는 종이가 아닐 수도 있다!

강한 바람에 불씨가 튀어 의복에 불씨가 크게 튀었을 때, 124호는 그 가정을 강렬하게 떠올렸다.

사실 적당한 수준의 보물이 숨겨진 장보도였다면,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닌 뇌불의 장보도가 아닌가?

소림의 파계승 뇌불.

무공의 경지로는 그 위대한 천화련주와 화산파 장문인과 비등할 것이라는 고수. 그가 강호에서 벌인 기행은 아직 객잔 등지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가 장보도를 남겨두었다면, 평범한 종잇조각에 그림 같은 지도 따위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124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제발, 예측이 맞아떨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그만큼 조급한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아니라면, 진짜 포기하고 복귀해야 한다.

124호는 그녀의 옷을 훔치기로 했다. 굳이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 서문세가는 육대세가는 아니었지만, 절강성의 명문가다. 의뢰를 받지 않고 건드릴 순 없었다. 거기다 옷을 훔치는데 다 죽인다면, 은밀함을 중시하는 살수의 체면이 살지 않는다.

조용히 서문취아의 옷을 훔치는 데 성공한 124호.

‘얼른 가서 확인해야 한다.’

만약 이것도 뇌불의 장보도가 아니라면, 오늘 밤 안에 다른 의복들도 전부 확인해볼 생각이다. 어쩌면 의복이 장보도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떠올린 124호는 생각이 치우쳐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졌던 장보도를 6일 동안 찾지 못했으니까.

타다다닷!어둠 속을 달려나가는 124호.

그가 황급히 작은 건물 안으로 쑥 들어간다. 사방이 뚫려있는 곳에선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밀폐된 공간이면서 사람이 잘 들르지 않는 장소. 124호는 이미 황씨가문의 장원을 모두 꿰고 있었다.

문을 닫고, 124호가 황급히 부싯돌로 불을 붙인다.

촤락-! 촤락-!

조급해서 그런지 평소 한두 번이면 붙는 부싯돌의 불씨도 잘 붙지 않았다. 그렇게 대여섯 번을 하니 준비해둔 솜에 불씨가 떨어진다. 정성스레 바람을 후후, 불고 있으니 금방 불이 강해진다.

“제발, 제발.”

말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게 살수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처럼 소망을 입 밖으로 내고 있었다. 살수가 된 후 처음으로 해보는 일탈··· 혹은 반항. 이건 흑살문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그가 흑살문에 잘 보이려는 이유는 심장에 있는 혈고독 때문이었다.

과연 뇌불의 무공서로 혈고독을 없앨 수 있을까?

그건 모른다. 단지··· 무조건 뇌불의 장보여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하오문의 부문주 굉요득을 죽이고 무얼 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성과도 없는 일에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불의 세기가 안정되었을 때.

124호가 서문취아에게서 훔쳐온 옷의 소매를 불에 가져다 댄다. 그의 생각이 맞다면, 의복과 불이 만나면 무언가 작용이 벌어진다. 어쩌면 그것이 뇌불의 장보도. 무공서가 숨겨진 장소가 지도처럼···.

“오오오오!”

저도 모르게 소리친다.

정말로 변하고 있다. 불에 반응하여 기묘한 선들이 마구 생겨난다. 소매 쪽에서부터 이어지는 기다란 선, 124호는 불의 화력을 높이기 위해 주변의 짚을 더 얹고, 상체를 숙인다. 화력이 약하여 의복의 반응이 약하다. 일단 화력을 화끈하게 올려야 한다.

‘됐다! 됐다! 됐다!’

머릿속엔 온통 해냈다는 생각뿐이다.

이제껏 황씨가문에서 초조하게 지냈던 날들이 보상받는다. 단순히 상부의 명령으로 움직인 게 아니다. 개인의 욕심 때문에 움직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살수는 감정이 없는 괴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을 더 깊숙한 심연에 억압하고 있었기에 분출되면 더욱 강렬하게 터져 나온다.

“후우우우우-! 후우우우우우-! 쿨럭! 후우!”

타닥, 타닥.

불씨가 제법 커지기 시작하고.

의복에 새겨진 선들이 더욱 선명해지기 시작했을 때.

이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며, 모든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았을 때.

죽음은 찾아온다.

“···?”

124호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뭐지? 이게? 대체 어떻게 여기에서 검이···? 이게 대체 무슨!

주르륵.

검신을 타고 새빨간 피가 밑으로 흐르다. 124호를 찌른 검은 그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하였고, 불의 세기를 키우려 열심히 바람을 불고 있던 124호는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충혈된 눈으로 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커헉··· 흑살···?”

그가 내뱉은 말이라곤 그것뿐이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살수의 방식이었다.

가장 적절할 때.

상대가 어떠한 방어기제도 펼쳐놓지 않았을 때.

경계심이 완전히 허물어질 때.

인간은 잘 때 가장 취약하긴 하지만, 황극린으로선 그가 잘 때 습격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잠을 자기 때문에 124호는 더 긴장하며, 작은 움직임이라도 감지되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리라. 그리고 다음부터는 절대 124호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순수한 실력으로는 황극린이 124호를 죽일 방법은 없었다.

지금은 124호가 죽기에 적절할 때였다.

“오랜만이군.”

실로 오랜만에 황극린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124호의 대답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죽었으니까.

과거 황극린이 지내던 우사(牛舍)에서.

124호는 허망하게 죽었다.

모든 죽음은 허무하고, 허망하고, 부질없다.

그리고 그것이 살수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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