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는 변화를 낳는다
늦은 밤.
황보휘가 검 한 자루를 들고 걸음을 옮긴다. 그가 향하는 곳은 연무장이 아니었다. 황룡무관의 관도들이 머무는 숙소 전각. 그가 도착한 장소는 그곳이었다. 왜 검을 들고 이곳에 왔을까?
황극린의 방 앞에서 멈춰 선 황보휘.
“극린아.”
“···.”
끼이익.
황극린이 모습을 드러낸다. 앞머리를 길러 눈을 가리고 있었건만, 코와 입만으로 그의 외모가 범상치 않다는 게 느껴진다. 거기다 최근에 어찌나 잘 먹고, 잘 잤는지 달빛을 머금은 피부에 광이 흐르고 있었다.
‘키가 컸군.’
고작 한 달에 불과했지만, 우사에서 나온 이후 황극린은 확실히 자랐다.
조금만 더 자란다면 청년이라고 해도 믿으리라. 그런 성장이 달가운 황보휘였다. 자신의 변화를 체감할수록,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오는 절망이 훨씬 클 테니까.
황씨가문의 가주 황천옹은 황극린을 흑도 무리에 팔아넘기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절망을 옆에서 지켜보고, 보듬어주고 싶었다.
재밌지 아니한가? 절망을 준 상대에게 의지하는 황극린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언젠간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게 황보휘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의 눈빛은 또 어떨 것인가?
그런 상상에 등줄기가 오싹해질 정도로 짜릿했다.
황보휘는 황극린의 앞에 가서 섰다.
“자, 선물이다.”
“검이군요.”
“그래, 시 교관님에게 듣자 하니 네 재능이 뛰어나다더구나. 권법을 익혀도 되겠지만, 너는 검을 익히는 게 좋을 거 같다.”
황극린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했다고?
시운량이 그런 말을 했을까? 황극린은 부정적으로 보았다. 황보휘가 정확히 무엇을 노리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는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다.
황보휘의 눈동자 속에 감춰진 어두운 욕망.
은밀하고 끈적한 그 시선이 황극린의 몸을 휘감는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황극린은 황보휘의 그런 시선을 느꼈음에도, 함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검을 받아들었다. 묵철로 비수를 만들긴 했지만 장검 하나쯤은 있으면 좋을 것이다. 황극린은 흑살문의 살수 출신이었기에 어떠한 병기든 평균 이상으로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매일 한 시진, 내가 직접 네게 검을 가르쳐주마.”
“한 시진말입니까?”
무당파의 속가제자.
그 위명은 아무리 배운 것 없는 황극린이라도 알고 있으리라. 매일 한 시진씩 검을 알려준다는 것에 감동한 것이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황극린에게 은혜를 베풀면서 그의 마음을 얻는다. 언젠간 황극린의 믿음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신뢰를 저버리고 황극린에게 악몽을 선사할 것이다.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도록.
그가 세상을 저주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래, 내게 검을 배운다면 네 재능을 개화할 수 있을 것이다. 너도 엄연한 무림인이 되어 강호를 횡보할 수 있게 해주마.”
황극린의 입장에선 기가 찼다.
무당파의 정식 제자도 아니고 고작해야 속가제자다. 물론, 강호엔 속가제자 출신임에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무림인이 있었지만 황보휘는 아니다. 고작해야 남창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다닐 정도랄까?
그런 주제에 자신을 가르치겠단다.
당연히 시간 낭비였지만···.
‘이제 곧 헤어질 터이니.’
황보휘가 무엇을 원하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있으리라.
그리고.
‘124호.’
회화나무 뒤에 은신해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낮에는 황씨가문 장원의 지형을 눈에 익히고, 지금은 황씨가문의 장남을 미행하고 있다. 황보휘가 장보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해둔 것이리라.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가.’
하지만 한 시진은 너무 길다.
시간 낭비는 이 각 정도면 충분하다.
“형님, 한 시진은 너무 긴 것 같습니다. 형님의 귀중한 시간을 제가 빼앗을 순 없지요.”
황극린이 미끼를 물자 황보휘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좋다, 그러면···.”
“이 각 정도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이 각?”
무공을 배우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솔직히 말해서 황보휘는 황극린에게 제대로 된 검법을 가르쳐줄 생각이 없었다. 겉멋만 잔뜩 든 검법을 알려준다.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자만심을 가진 황극린은 만공 무관에서 철저히 망신만 당할 것이다. 거기다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겠지.
“그래, 알겠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하지만 내가 널 배려하는 만큼 확실히 열의를 가지고 수련에 임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그러지요.”
황극린이 검을 받아 뽑아본다.
검날을 살펴보던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품질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적당히 쓰고 버릴 수준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황보휘는 네까짓 게 검의 가치를 알겠느냐고 속으로 비웃고 있었지만, 대놓고 황극린을 비꼬진 않았다. 황극린에겐 황보휘는 유일한 희망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 검의 가치는 금자 다섯 냥이다.”
당연히 황극린이 놀랄 줄 알았건만.
“그렇군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눈물을 펑펑 흘려도 모자랄 판에 미적지근한 반응이니 왠지 짜증이 났지만, 지금은 황극린에게 한없이 베풀어야 할 때이다.
“일단 검을 쥐는 법부터 알려주···.”
설명을 이어가려던 황보휘의 말이 멈춘다.
딱히 설명해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검을 잡고 있었다. 어디서 눈대중으로 배우기라도 한 것인가?
‘꼴에 본 건 있군.’
하지만 검을 제대로 쥘 줄 아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
검을 제대로 다루려면, 무게를 견딜 근력도 있어야 할 것이고 시시각각 손목의 힘을 제어해야 한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싸울 것이 아니기에 보법도 할 줄 알아야 했다.
“오늘 할 것은 상단 베기다. 한 동작을 하루에 백 번 이상 정확하게 휘둘러야 할 것이다. 단순한 육체 단련으로 성장하는 근육과 검을 다루는 근육은 전혀 다르니··· 다음날 근육통이 올 수도 있겠지만, 아프더라도 꾹 참고 훈련해야 한다. 검을 다오. 시범을 보여주마.”
황극린에게 검을 건네받은 황보휘가 멋들어진 동작으로 검을 휘두른다.
“하아압! 하압!”
슝! 슝!
바람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온다. 확실히 진검을 휘두르는 것이니 소리가 남다르다.
‘후후, 어떠냐? 너도 얼른 나처럼 휘두르고 싶겠지?’
황보휘는 제멋에 취하여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다.
당연히 그걸 지켜보는 황극린의 반응은···.
‘하체가 부실하군. 보법도 엉성해.’
황보휘의 수준은 그리 낮은 것이 아니었지만, 황극린의 입장에선 강호 초출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도 황보휘는 이제 막 무공에 입문한 후기지수에 불과하다.
“자, 이제 너도 해보거라.”
“예.”
황극린은 일부러 미숙한 척 검을 휘두른다.
“그게 아니지! 허리에 힘을 빼라! 허벅지에 힘을 팍 주고!”
아주 조금씩 자세를 교정해나간다.
그러면서도 회화나무 뒤를 감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마 훈련 때까지는 계속 124호가 감시할 것 같았다.
‘만공 무관과의 비무 날 전에 처리하면 되겠군.’
* * *
“예? 황극린은 검으로 비무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럴 예정입니다.”
왜?
만공 무관과 갑자기 잡힌 비무도 모자라서 황극린은 검이란 말인가? 초심자가 검으로 비무를 하면 사고가 나기 딱 좋았다. 눈 먼 칼에 급소라도 찔리는 날에는···.
‘설마?’
시운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매번 미소를 머금고 있는 황보휘. 그는 아직 약관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시 교관이 예상하는 일을 계획한 것이라면, 참으로 잔혹하고 역겨운 사내였다. 언젠간 분명히 크게 사고를 치리라.
“왜 황극린을 그렇게까지 신경 쓰시는 겁니까?”
이건 꼭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왜? 이럴 필요까지 있는 일인가? 황극린이 싫었다면, 떠도는 소문처럼 그의 아버지가 황씨가문의 죄인이라면 애초에 받아줄 필요가 없지 않았겠는가?
“별 것 아닙니다. 단지···.”
황보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아이가 불쌍해서 도와주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군요.”
불쌍하다?
시운량의 입장에선 황보휘가 더 불쌍했다. 그는 알고 있을까? 황극린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황극린이 숨긴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순간, 황보휘는 분명히 후회한다.
시운량은 왠지 그 모습이 보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시운량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반발할 줄 알았었다.
고분고분하게 따라주니 흡족하다. 애초에 당연한 일이었다. 황룡무관의 주인인 자신이 결정한 일에 교관 따위가 토를 단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서로 다른 의미의 미소를 지은 두 사내.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 * *
황극린은 124호를 감시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과거에 그가 장보도를 찾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왜냐고? 현시점에는 황극린도 제어하지 못하는 큰 변수가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변화한 황극린이다.
‘내가 아는 과거 아니 미래는 가변할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화를 목도할 수도 있겠지.’
황극린은 존재 자체로 과거와 미래를 부정한다.
과거의 그는 황보휘가 무공을 배우라는 제안을 거절했으며, 우사에서 고통만 받다가 견디지 못하고 황씨가문에서 도망친다. 그리고 124호와 만나게 되었다.
또 다른 변수들도 있다.
현재 시장에서 ‘옥보단’이라는 밀어로 통하고 있는 황극린의 정력제 자체도 과거엔 없던 물건이다. 적어도 20년은 지나야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외에도 비 노인이나 주서웅과의 관계, 서문취아가 아직 황씨가문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칠성방의 묵철로 비수를 만들었다.
사실 이것만으로 커다란 미래의 틀은 변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허나, 황극린은 그런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살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최소한 예상이라도 하고 있다면, 새로운 변화를 담담히 맞이할 수 있으리라.
지금 마주한 상황처럼 말이다.
“극린아, 안녕.”
서문취아는 평소와 다른 의복을 입고 있었다.
정갈한 난이 그려진 의복. 그녀는 평소 고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따스한 빛깔의 의복을 입고 다녔었다. 황극린은 그녀에게 관심을 두진 않았었지만, 주변 상황의 변화를 습관처럼 머릿속에 기록하고 있었기에 변화를 알아차렸다.
“옷이 바뀌셨군요.”
“어···?”
그녀는 몹시 당황한다.
당연히 황극린이 평소처럼 냉정하게 밀어낼 것이라 생각했던 서문취아였다.
그런데 뭐란 말인가? 갑자기 친절하게-서문취아의 시선에선- 말을 하지 않나, 옷이 바뀐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응응응! 맞아! 평소에 입던 거랑 다른 느낌의 옷인데, 괜찮아? 헤헤. 극린이가 이렇게 알아봐 주니 너무 좋네. 평소에 누나가 뭐 입는지 계속 봤던 거야?”
“···.”
황극린의 시선이 서문취아의 복부에 매여진 매듭을 바라본다. 허리 부근의 겉감과 연결된 매듭이었는데 붉은색이었다.
서문취아는 왜인지 모르게 그에게 정을 주고 싶었다. 황보휘에게 듣자 하니 친우도 없어서 매번 혼자 다닌다고 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더 신경 써주고 싶었다. 황씨가문에서 어련히 잘 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이 도와주면 차가운 황극린도 사람 사이의 정을 더 빨리 깨닫지 않겠는가?
그 노력의 결실이 오늘 맺어진 것 같았다.
처음으로 황극린이 매몰차게 떠나버리지 않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으니까!
하지만 황극린이 서문취아에게 의복이 바뀌었냐고 물은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서문취아에게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고, 유행하는 복식에 관심을 두는 것도 아니다.
단지.
“보휘 형님께서 선물하신 겁니까?”
“아?”
서문취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응, 보휘가 준 거긴 한데··· 이번에 북경에서 가져온 의복이라 하더라고! 추후에 금황상가에서 의복점을 만들면 팔려고 했던 건데, 내가 남창에 오면서 옷이 든 행낭을 잃어버렸거든. 그래서···.”
왜 자신이 이런 변명을 하는 건가?
서문취아는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왠지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
북경에서 들여온 난이 그려진 의복.
붉은색 매듭.
과거였다면 이미 떠났어야 하는 서문취아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아직 황씨가문에 남아 있었다.
사소한 변수에 불과했지만,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냈다.
‘장보도.’
황극린 또한 장보도의 소문만 들었기에 대략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발견됐는지만 알고 있었다. 장보도는 흔히 무림에서 알려진 것처럼 낡은 종잇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의복이라 했다.
사고로 창고에 화마(火魔)가 일었지만, 유일하게 타지 않은 의복.
서문취아가 지금 입고 있는 저 의복이 바로 뇌불의 장보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