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8화 (18/316)

지켜보다

황극린.

그가 황씨가문에 온 것은, 어린아이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황용철은 어린 황극린을 두고 세상을 떠나갔다. 아버지가 남겨둔 서신 한 장을 가슴에 품고 황씨가문으로 향했다. 그 과정이 참으로 위태롭고 고달팠지만, 어찌어찌 황씨 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용철이 황씨가문의 피를 이어받긴 했지만, 그의 가정은 불우했다.

하루에 세 끼니를 먹은 적이 없었고,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부양하며 살아야 했었다. 사실 부양이라는 말도 괴리가 있다. 황극린은 아버지와 함께 힘들게 버텨왔을 뿐이다.

그렇기에 황씨가문은 황극린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아버지는 늘 황씨가문에 대해 좋은 말씀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에 가면 매일 흰 쌀밥에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다고 했었다. 어린 황극린은 그걸 믿었다.

미련하게도 말이다.

어린 황극린이 삶 자체를 비관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려 했지만.

황씨가문에서 사는 것보다 혼자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소년은 어느 순간 황씨가문에서 도망쳤다.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삶을 비관했지만, 언젠간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흰 쌀밥에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괴롭히던 주서웅이 황룡무관에서 무공을 배우고 자랑했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허술하게 깎인 ‘백목검’이 있으니 자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황극린은 또 다른 좌절을 맛보았다.

그의 외모는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세상에는 미친놈들이 많았다. 그는 분명히 사내아이였지만, 그를 탐하려는 손길도 있었다. 같은 사내인데도 말이다.

그때, 어린 소년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살기 위한 몸부림과 운이 겹쳐 황극린을 범하려던 사람은 죽었다.

당연히 겁이 났다.

손발이 달달 떨렸다.

당장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아버지와 한 약조를 지킬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황극린에게 꼭 살라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를 좋아하냐고? 딱히 그렇진 않다.

단지.

약조는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황극린은 사람은 은근히 쉽게 죽는다는 것과 죽이면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삶의 이치를 깨달은 황극린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날.

어린 소년은 또 다른 절망과 마주하게 된다.

흑살문의 상급 살수.

124호를 말이다.

* * *

훈련이 끝났는데도, 황극린은 연무장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주서웅이 그에게 말을 걸려고 하다가 그의 표정을 보고 감히 말을 걸지 못하고 떠나갔을 뿐이다. 황극린은 생각하고 있었다. 124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말이다.

‘124호는 어떤 임무 때문에 남창에 왔었을까?’

과거, 그러니까 미래에서 124호는 황극린을 흑살문에 납치한 장본인이다.

그나마 황씨가문에서는 도망칠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흑살문은 전혀 빠져나올 수 없었다. 왜냐고? 어린 심장에 똬리를 튼 혈고독은 나이가 들면서 완전히 심장과 동일화되었다. 어떠한 약재로도, 독약으로도 혈고독을 떼어낼 수 없었다.

떼어내면 심장이 멈췄으니까.

아버지와의 약조.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으라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 황극린은 살아남았다. 결국, 마지막엔 엉망진창이 되어 죽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모든 선택을 후회한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다.

그래서 그가 왜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는지가 중요하다.

대체 왜 흑살문의 살수 124호가 황씨가문에 나타난 것일까?

과거에도 그가 황씨가문에 왔었을까?

그의 임무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황씨가문의 누군가를 죽이는 임무는 아니었으리라. 흑살문에게 맡길 정도면 황씨가문의 가주나 첫째 아들인 황보휘 정도는 되어야겠지만, 황극린이 흑살문의 정식 살수가 되어 중원으로 임무를 받아 나와서 그들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황씨가문은 지금보다 훨씬 거대한 상가가 되어 있었으며, 황보휘 또한 강서성에서 유망한 후기지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당시 황극린은 흑살문의 교관들에게 ‘살수화’ 과정을 거쳐, 분노 따위의 감정을 거세당했었다.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했다.

황씨가문에서 124호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누굴 노리고 있는 걸까?

‘알아보면 되겠지.’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살수의 싸움은 내공이나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그러한 무공 실력이 뒷받침된다면 더 좋긴 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상대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상대를 방심시킨다는 수준이 아니다.

124호는 황극린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또한, 황극린이 124호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죽느냐 죽이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흑살문의 상급 살수라···.’

혈귀라 불렸던 살수.

단 세 명뿐인, 흑살문의 특급 살수에 가장 가까웠던 사내가 미소를 머금었다.

* * *

124호는 황씨가문의 하청을 받는 백리 상회의 일꾼으로 위장했다.

살수가 어두침침한 틈 속에서 기다리고, 칼만 가는 존재는 아니었다. 이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을 하기도 한다. 어떨 때는 객잔에 눌러사는 주정뱅이로, 또 어떨 때는 세상 물정 모르는 강호 초출 도련님으로.

사실 그런 변장이나 위장은 살수 본연의 생김새에 따라 역할이 결정난다.

인피면구(人皮面具)와 같은 기물(奇物)도 있었지만, 하나를 만드는 데 금자 백 냥에서 심할 경우에는 천 냥까지도 들어간다. 만드는 과정도 까다로웠고, 들어가는 재료도 만만치 않았다. 거기다 더 큰 문제점은 목부터 이어지는 피부색을 동일화하는 과정이다.

흑살문에서도 인피면구를 사용하여 살행에 나선 적은 드물다.

인피면구를 제작하는 시간과 인력 그리고 부가적인 요소를 모두 고려하면, 오히려 살행을 성공하는 게 손해가 된다.

그렇기에 124호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이건 임무가 아니었다. 124호가 흑살문이 아닌 ‘개인’의 목적으로 황씨가문에 침투한 것이다.

하오문의 부문주 굉요득에게 얻은 정보는 황씨가문에 장보도가 있다는 것.

그것뿐이다.

장보도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거다.

“어이, 빨리빨리 옮기라고!”

황씨가문에 들어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서성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상가 금황상가를 운영하는 만큼 매일 일손이 부족하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웬만한 일꾼이 아니고서야 하루를 버티지 못한다.

124호는 상가로 들어오는 물품들을 나르는 일꾼이 되어 황씨가문에 잠입했다.

당연히 험상궂게 생긴 덩치들이 감히 상가의 자산을 도둑질할 것을 예상하여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 따위를 속이는 건 일도 아니다.

그는 틈틈이 눈알을 굴려 황씨가문 장원의 지형을 익혔다. 상행 물품들이 적재하는 장소가 어딘지, 그것을 검수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말이다.

‘장보도를 숨길 수 있을 법한 표물. 약초들을 실은 목함에 숨겨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가치가 그리 큰 약초들은 아니겠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비싼 약초나 약재들을 담은 곳에 장보도를 숨겨뒀다면, 상행 중 그 약초를 노리는 자들이 생길 수도 있었다. 아마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저렴한 상품들 속에 감춰두었으리라. 하오문이라면 분명히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했으리라. 물론, 확신은 아니었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였을 뿐이다.

‘이곳은 약재와 약초. 저긴 육포나 말린 생선류 따위를 모아놓고 있군. 한 번 쓴 목함은 회수해가지만, 저것들은 목함 그대로 적재한다.’

그렇게 열심히 노동하면서도, 황씨가문 창고 구조를 익히고 있을 때.

먼 거리에서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갈 죽이러 온 것이 아니로군.’

황극린은 그를 지켜본 지 일 각 만에 그것을 눈치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흑살문의 상급 살수가 황씨가문의 식솔 중 하나를 죽이기 위해 위장했다? 인력 낭비다. 흑살문에서 그딴 지령을 내렸을 리 없었다. 실제 살행은 살수 본인이 마지막으로 결정하지만, 상급에 오른 살수가 저런 비효율적인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사람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면?

그는 무엇을 얻으러 왔을까?

황극린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스쳐 지나갔다.

‘보화(寶貨).’

합리적인 가설이었다.

황씨가문에서 죽일 표적이 없다고 한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건 황씨가문의 재력이었다. 그들은 꽤 많은 보물을 지하 금고에 숨겨놓고 있었다. 황씨가문의 둘째 황일남이 가끔 그를 괴롭히러 와서 금고에 쌓인 금괴들을 본 적이 있느냐며 놀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금고에 있는 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방식으로 침투하지 않았을 거다. 살수의 행동은 모두 이유가 있다. 그가 창고를 둘러보는 이유가.

‘그렇군. 너도 뇌불의 장보도를 노리고 있던 거였구나.’

뇌불의 장보도.

어찌하여 황씨가문에 도착하게 된 것인지는 황극린도 모른다. 단지, 그것을 발견한 황씨가문의 계를 탔다고 할 수밖에. 그런 무공을 얻었다면 다른 세력에 빼앗길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뒤에는 무당파가 있었다.

무당파에 진본을 주고, 사본은 황씨가문의 첫째인 황보휘가 익히는 조건으로 보호를 요청했다. 다른 살행을 가며 어찌어찌 알게 된 일이었다. 장보도가 황씨가문에서 발견됐을 당시에는 황극린은 앞에서 열심히 눈알을 굴리고 있는 124호와 함께 흑살문으로 돌아갔으니까.

처음 보았을 때, 124호의 얼굴에 떠올랐던 상심을 기억한다.

살수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지만, 당시의 그는 무언가 언짢은 기분인 듯했다. 어린 시절의 황극린은 그가 임무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 유추했었지만··· 알고 보니 124호는 뇌불의 장보도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찾지 못하고 길가에 버려지다시피 한 황극린을 데리고 흑살문으로 돌아갔다.

새롭게 발견한 인재라며 교관에게 던져주었다. 당연히 변명에 불과했다. 임무를 마치고도 바로 복귀하지 않은 이유가 필요했다. 때마침 발견한 황극린은 괜찮은 변명거리였다.

당시의 그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공허한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흑살문에서는 이런 식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납치하여 살수를 키우기도 했었다. 황극린은 썩 괜찮은 살수 교육생이었으니 124호의 변명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흑살문의 생리를 모두 꿰뚫고 있는 황극린이었기에 모든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동시에 혐오감이 들었다.

살수도 인간이다.

당연하다. 아무리 지옥 같은 훈련과 고문으로 감정을 거세당했다고 해도 완전히 지워낼 수가 없었다. 불가를 계승하는 소림사에선 세상의 모든 번뇌를 잊기 위해 면벽 수련을 수십 년이나 하는 고승들이 있다. 그런 고승들도 번뇌를 잊지 못한다.

만약 살수의 훈련 방식이 번뇌를 모두 없애줄 수 있다면, 그들이 바로 달마였으며 부처였을 것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납치했던 건가.’

천천히 황극린의 마음속에 차가운 분노가 서리 맺힌다.

고작 그런 이유때문에 자신을 흑살문으로 데려간 것인가? 어쩌면 124호는 자신을 살린 은인이라 볼 수도 있다. 길가에 버려진 황극린은 언제 죽었을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상급자의 명령대로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삶을 살긴 싫었다.

적어도 자신의 의지를 갖고 살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현재의 황극린은 그럴 수 있었다.

‘역시 넌 죽어줘야겠다.’

과거를 후회한다.

그렇기에 과거를 바꾼다. 황극린은 결심했다. 124호를 죽이기로 말이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던, 124호.

그가 갑자기 몸을 떤다.

“···?”

왠지 모르게 스산한 기운이 주위에 감도는 것 같았다. 살수는 외부의 기척에 민감하다. 혹시 몰라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다.

‘기분 탓인가?’

흑살문의 임무, 하오문의 부문주 굉요득을 처리했음에도 그는 복귀하지 않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가 있는 건 당연하다.

‘얼른 찾고 돌아가야겠다.’

그런 조급함은 약점이 된다.

살수는 작은 틈을 비집고, 비수를 꽂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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