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흐름
황극린이 이제껏 단전을 만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무영심결로 인한 세맥의 발전. 눈덩이가 쉬이 커질 수 있도록 길을 터놓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세맥의 불순물이 깎여나가는 것뿐 아니라, 근질이나 뼈가 튼튼해지는 것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성장세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
하지만 조만간 내공심법을 익히긴 해야 한다.
무엇을 익혀야 할까?
살수 시절 익혔던 흑살문의 내공심법을 익혀야 할까?
황극린은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고작 과거와 비슷한 수준까지 오르길 바라면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바보다. 활용할 수 있는데도 그걸 활용치 않는다면, 멍청한 것이다.
그는 최소 천하칠대고수의 수준을 원했다.
과거 그가 천하칠대고수 중 하나인 창천뇌검을 꺾은 적이 있었지만, 그건 상당한 운과 황극린의 작전이 잘 먹혀든 탓이다. 살수의 방법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제약이 많았다. 그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건, 어떤 환경이든 발휘되는 강인한 힘이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과 극독에 당하고, 검에 배가 뚫리면서도.
황극린의 단전을 부숴버렸던.
창천뇌검처럼 말이다.
‘이제 슬슬.’
왜인지 서문취아는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황보휘의 다른 친우들은 오늘 모두 떠났다.
이제 곧 소문이 떠돌기 시작할 것이다.
뇌불의 장보도.
혈풍뇌전신공(血風雷電神功)이 포양호에 있다는 소문이 말이다.
* * *
“그놈이 계속 무공을 익히게 둬도 괜찮겠느냐?”
진중한 아버지의 얼굴.
황씨가문의 가주인 황천옹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마주 앉은 상대를 긴장하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타고난 성정 덕도 있었지만, 그가 가진 부와 권력 때문에 더 강하게 발현된 후천적인 능력이다. 황보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물려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최대한 조심스레 설득해야 했다.
“무공이란 재능이 없는 자에겐 좌절을 선사합니다. 무당에서도 무수히 봐 왔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변질되고 포기하는지를 말입니다. 황극린은··· 재능이 없습니다.”
“재능이 없다고 하더라도 주먹다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느냐? 황극린이 무림인에 뜻이 없다면 좌절을 느끼지도 않을 터인데? 오히려 먹고 살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더냐?”
맞는 말이다.
일단 좌절을 느끼려면, 희망이 있어야 한다.
황극린이 무림인이 될 생각이 없다면, 자신도 고수가 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하지 않는다면··· 재능이 없다고 좌절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닙니다. 황극린은 욕심이 많습니다. 전 알 수 있지요. 그놈은 우사에 살면서도 눈빛이 죽지 않았습니다. 언젠간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지요. 우사에 그놈이 각목을 깎아 목검을 만든 것은 아십니까? 꼴에 백목검이라는 이름을 붙였더군요.”
“목검을 깎았다? 참으로 의도가 불손하구나.”
황보휘가 자신의 의도대로 대화가 흘러간다고 생각할 때.
“취아, 그 아이가 극린이에게 관심을 가지더구나.”
흠칫.
황보휘의 몸이 굳는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상인의 덕목은 감정 제어다.
“하하, 취아는 단지 극린이를 귀엽게···.”
“황용철도 그러했지. 가진 바 능력은 쥐뿔도 없는 주제에, 여인들의 마음 쥐락펴락했었어. 그런 마음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 어느 순간 태산처럼 단단해져 그걸 옮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든다.”
황용철은 황씨가문의 가주 황천옹의 역린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걸 극복한 것이다. 사실 극복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감정을 황극린에 대한 분노로 치환했다는 말이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너도 이 아비처럼 뺏길 셈이냐? 아무것도 아닌 놈한테? 네놈이 기회까지 주면서?”
“그건···.”
“난 그냥 그놈이 고통을 받았으면 한다. 하지만 이제 얼굴도 보기 싫구나. 과거에 연연하는 것은 상인의 자세에 맞지 않지. 네가 무관에 들이자는 제안만 하지 않았다면, 그놈을 흑도 무리에 팔아버리려 했다. 얼굴은 그녀를 닮아 예쁘장하니까.”
그녀.
황용철을 언급할 때와는 전혀 다른 말투였다. 황보휘는 그 부분이 상당히 거슬렸다. 아버지가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이었던가? 그렇기에 황보휘 또한 황극린을 저주했다. 아버지를 저주할 수는 없었으니까. 지금 당장은 말이다.
“기회를 주고, 자비를 베풀면 자기가 사람인 줄 알 것이다. 그놈은 아비의 죄를 연좌한, 가문의 죄인이다. 이번 생은 기필코 고통에서 살아야 한다.”
“아버지.”
“너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더 늦기 전에 매듭을 지어라. 그게 이 아비의 조언이다.”
황천옹의 눈가에는 고집이 어려 있었다.
아마 황보휘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의 말처럼 흑도 무리에 황극린을 팔아넘길 것이다.
‘제기랄···.’
아무리 무당에서 무공을 익혔어도, 아직 그에겐 금황상가를 움직일 권한은 없었다.
아버지에게 모든 걸 이어받으려면 그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황극린의 진정한 좌절을 원하는 황보휘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그가 무공을 익히고.
재미를 붙이고.
성과를 만끽할 때.
그에게 천명과도 같은 좌절을 선물해야 했다.
그것이 잔인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어쩔 수 없다. 아직 여물지 않았지만···.’
곧 황극린에게 좌절을 보여줘야 한다.
* * *
“흐음.”
황극린은 기분이 좋았다.
과거엔 이런 사소한 것으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묵철로 만든 비수 따위가 생겼다고 왜 좋아하겠는가? 어차피 상부의 지시대로, 죽이고 싶지 않은 사람을 죽여야 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묵철로 만든 비수. 순전히 자신의 의도대로 만든 것이다. 이것을 손에 쥐고 있는 것 자체가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명령받지 않아도 되는 삶.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 갈림길이 너무 많아 혼란스러워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평생을 속박받아왔던 황극린에겐 모든 것이 자유의 증명이었다.
쉬잇! 퍽!
비수가 벽면에 꽂힌다. 벽면에 표적을 그려놓았는데 정확히 작은 원에 들어갔다. 비수를 받아온 날부터 매일 던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삼 장 거리의 표적도 정확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섬세함은 확실히 늘렸다. 이젠 이 감각을 유지하면서 근력을 늘리면 된다.’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시운량의 훈련은 상당히 도움이 됐다. 무영심결의 효과도 상당하여 짧은 시간에 키도 자란 듯하다. 과거엔 한창 자랄 나이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가 잘 먹고 있는 것도 컸다.
그렇게 비수를 던지며 감각을 익히고 있을 때.
“형님, 저 왔습니다.”
언제부터 형님이라 불렀는지 모르겠다.
알고 보니 주서웅보다 황극린이 나이가 더 많다나? 과거 그를 괴롭히긴 했지만, 딱히 감정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몸 좀 풀어볼까.’
주서웅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황극린은 주서웅의 튼튼한 몸을 때리면서, 힘을 조절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또한, 타인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무공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오늘부터 100대에서 200대로 늘린다.”
“예, 형님!”
반문조차 하지 않고 수긍한다.
상희륭과의 비무에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패배했던 것에 비해서 그는 성장했다. 알게 모르게 주서웅의 마음속에는 황극린에 대한 신뢰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 * *
발 없는 말.
소문이라는 것은 훨훨 날아 급속도로 퍼진다.
뇌불의 무공은 그 가치가 구파일련의 절기에 준한다.
그의 출신이 소림사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소림사의 대반야금강공(大般若金剛功)과 동급 내지는 그 이상이다. 소림에서 파계(破戒)를 당했는데도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강호 무림을 뒤흔들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핏빛이 난자하고, 붉은 뇌광이 공간을 꿰뚫었다.
소림사에서 불을 켜고 뇌불을 잡으려 했었지만, 소림사의 백팔나한진을 뚫고 유유히 탈출했었다.
그러니까.
강서성 남창에는 고수들이 모이고 있었다.
일확천금의 대박. 절대 고수가 될 수 있다는 기대.
혹은, 장보도의 진위를 믿진 않지만··· 고수들의 싸움에서 떡고물이라도 얻으려는 존재들까지.
남창에 혼란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치겠군!”
흑랑파의 적사갈이 분통을 터트린다.
흑랑파 또한 부근에선 퍽 유명한 사파 문파다. 흑랑파의 장문인은 일류 이상의 고수로 곧 절정을 바라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들의 위상은 알 만하다. 무림 문파에서는 고수의 숫자나 경지가 그들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간다.
남창에 고수가 점점 늘어난다.
이류 고수와 일류 고수들.
심지어는 절정 고수까지 왔다는 소문이 있다.
이미 흑랑파에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네놈이 퍼트린 거냐!”
“아, 아닙니다!”
칠성방주는 억울했다.
안 그래도 의문에 고수에게 묵철을 털렸는데, 갑자기 포양호 부근을 수색하라더니 이제는 남창에 고수가 모인 것도 자신의 탓이라 한다. 이래서 사파 놈들은 안 된다며 속으로 욕을 했지만, 겉으로는 빌빌 기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연합해야 한다.”
“연합이요? 누구랑···.”
“누구긴 누구야! 호양문이지.”
“예에?”
호양문.
남창의 남쪽 거리를 지배하고 있는 흑도 문파 독존파의 뒷배였다. 어떻게 그놈들과 연합할 수 있는가?
“일단 호양문과 연합하여 같이 장보도를 찾는다. 그리고···.”
“그리고?”
따악!
“반말이냐?”
“아, 아닙니다··· 너무 궁금해서 그만, 헤헤헤.”
“당연히 뒤통수를 쳐서 뺏어야지. 우린 그놈을 이용하는 거야.”
“그렇군요···.”
아마 호양문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괴물 같은 고수들이 냄새를 맡기 전에 얼른 찾는다. 넌 독존파에 다녀와라.”
“예, 알겠습니다.”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겠나.
서로 앙숙이던 독존파와 칠성방이었지만, 높으신 분들끼리 대화가 된다면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런데 이런다고 우리가 뇌불의 무공을 꿀꺽할 수 있나? 기껏 찾아놓으면 고수들한테 목이 뎅겅 잘리고 빼앗길 게 뻔한데···.’
그나마 칠성방 방주 강백언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흑랑파야 이 근방에서 알아주는 사파 문파라지만, 이들이 눈치를 챌 정도면 이미 다른 문파에서도···.
에라, 모르겠다.
여기서 적 대협의 명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강백언은 수하들을 이끌고 앙숙이었던 독존파에 손을 내밀기 위해 북쪽 거리를 떠났다.
* * *
적화루.
남창에서 가장 높이 쌓은 기루. 이곳에 있는 기녀들은 모두 상급이나 특급으로, 웬만한 관직이나 부를 가지고 있지 않고서야 출입조차 허가되지 않는다. 그리고 적화루의 가장 상층부엔 한 중년인이 글이 빼곡히 적힌 종이를 바라보다 중얼거린다.
“끌끌, 별 거지 같은 놈들이 무공을 먹겠다고 난리로군. 흑랑파? 우습지도 않군.”
술을 조르르 따라 시원하게 들이마신다.
시큰하면서도 뜨거운 것이 식도를 타고 위를 뜨겁게 달군다. 술이라는 건, 이런 맛에 먹는 것이다. 취하는 건 덤이고.
어차피 뇌불의 무공은 주인이 정해져 있었다.
같잖은 것들이 넘볼 것이 아니었다.
물론, 구파일련이나 사파의 사흑련(巳黑聯)이 나서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중년인이 속한 문파에선 신속하고 은밀하게 북경에서 남창까지 장보도를 옮겼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말이다.
그걸 알고 있는 건, 지금 적화루에서 술을 마시는 중년인과 하오문주 무영천왕(無影天王)뿐이다. 저들이 아무리 포양호 주위를 수색해보았자 뇌불의 장보도는 찾을 수 없으리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뇌불의 무공이 하오문의 손으로 들어온다.
아무리 규모를 키워도 흑도라 불리며 괄시받던 흑도 문파에서, 엄연한 사흑련의 사파 종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뇌불의 무공은 그럴 힘이 있었다. 하오문의 부문주 굉요득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장보도를 작은 상행 따위에 끼워놓은 건 아무도 모르리라.
며칠 뒤, 조용히 상행의 목적지인 황씨세가로 가서 그걸 훔쳐오기만 하면···.
환상을 품고 있을 때.
그림자가 움직였다. 아니, 그림자 속에 숨은 무언가가···.
쿠욱!
“커억!”
정확히 심장을 노렸다.
살수의 일격. 살수들은 비장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적화루에서 근 보름 동안 잠복을 하고 목표를 기다렸다. 하오문의 부문주 굉요득이 방심하는 틈을 타, 술을 마시고 감각이 느슨해졌을 때.
살수는 모습을 드러낸다.
“···.”
그는 가만히 죽은 굉요득을 바라본다.
하오문의 부문주라는 명성치고는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었지만, 살수에겐 죽음이란 모두 똑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르다.
“뇌불의 무공···.”
그게 있으면, 조직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걸 익혀서 특급의 살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심장을 매만지던 살수가 굉요득의 품을 뒤져 손가락만 한 종이 하나를 찾아낸다.
그곳엔 ‘황’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