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5화 (15/316)

드러내다

“뭐, 뭐야?”

“어떻게!”

패배자의 각성이라고 해야 할까?

전 회차의 승자연전 방식의 비무에서는 상희륭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배했던 주서웅. 타고난 신체를 활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힘으로만 밀어붙이려 했던 그였다. 이번에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라 믿고 있었다. 심지어 시운량 교관마저 말이다.

그런데 결과가 달라졌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모두가 숨을 죽인다.

‘대체 뭐지?’

시운량 교관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는 타인의 재능을 찾아내서 끄집어내는 능력이 있다고 자부했다. 그렇기에 무림인의 길이 아닌 무림 교관으로 업을 바꾼 것이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이번 비무에서도 상희륭이 2조를 모두 이겨야 했다.

상희륭의 노력과 재능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그는 무당파의 속가제자인 황보휘에게 무공을 배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공이라고 하기엔 올려치는 경향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육체 단련만 했던 다른 조원들에 비해서 월등히 앞서나가는 건 자명하다.

그런데 주서웅이 완벽하게 승리했다.

상희륭의 주먹 따위는 가소롭다는 듯. 고작 이 정도냐는 눈빛으로 상희륭을 분노케 했다. 하지만 분노는 비무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흥분한 상희륭은 주서웅에게 턱을 얻어맞고 대(大)자로 뻗었다.

‘이딴 주먹에 맞을 거 같냐? 난 말이다. 응? 사신한테 훈련을 받았다고!’

갓 분출한 용암과 같이 자신감이 하늘로 솟구친다.

황극린에게 하루에 100대만 맞는 훈련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상희륭이 아무리 날고 기어보았자 정확히 급소만 파고들고, 빈틈만 생기면 찔러오는 살인 병기의 주먹을 맞다 보면 본능적으로 육체를 활용하게 된다. 상대의 어깨와 발을 보고 움직임을 예측한다.

애초에 주서웅의 재능이 뛰어난 탓도 있었지만, 황극린의 훈련은 확실히 실전에서 강했다.

“2조··· 승리.”

시운량 교관의 승리 선언에 2조 아이들이 괴성을 질러댔다.

그들은 당연히 이번에도 패배하여 매일 벌을 설 것이라 예상했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거들먹거리던 1조원들의 건방진 얼굴이 눈에 선하다.

“와, 정말 미쳤구나! 서웅아!”

“어떻게 특훈이라도 한 거야? 응? 나도 알려주라.”

“나도! 나도!”

아이들의 성화에 주서웅이 팔짱을 낀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를 흉내 내듯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한다.

“하루에 백 대만 맞자.”

“뭐?”

“무슨 소리야? 백대를 맞자고?”

“후후후···! 그럼 다 해결될 거다.”

그때 시운량 교관이 말한다.

“···오늘 훈련은 이것으로 끝이다. 내일 아침 훈련시간에 늦지 말도록.”

“예! 교관님!”

왠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듯한 시운량이 떠나간다.

아이들은 오늘 하루는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고, 황일문은 2조원들에게 반점에 가서 요리를 사주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둘째 도련님, 근데 극린이는요?”

주서웅도 양심은 있었다.

그 때문에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었으며, 1조에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 도련님이 황극린의 자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왠지 그를 자꾸 자극하다 보면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았으니까.

“뭐? 황극린? 저놈이 뭘 했다고 사주긴 사줘?”

“그래도 같은 조 아닙니까? 그러니···.”

황일남이 같잖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야, 황극린. 너도 먹고 싶냐? 응?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경만 한 주제에 먹고···.”

황극린은 황일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연무장을 빠져나간다.

그것을 본 황일남이 펄쩍 뛴다.

“저 새끼가! 자꾸 내 말을 무시해! 엉! 저번에도 내 말 무시했지? 너 무관에서 잘리게 해줄까! 죽을래! 야!!”

황일남이 달려나가려는 걸 주서웅이 막는다.

왜 자꾸 자살하려고 황극린에게 덤비는지 모르겠다. 과거였다면 황일남의 이런 분노를 무섭게 느꼈으리라. 그는 황씨가문의 둘째였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생각이 바뀌고 있다. 자신도 황극린처럼 되고 싶었다.

존경? 경외? 찬양?

명확한 단어가 생각나진 않았지만···.

‘진짜 멋있다. 나도··· 극린이처럼 되고 싶어.’

그의 모든 행동이 멋있어 보이는 주서웅이었다.

오늘 비무에서 승리했던 건 자신이었지만 진짜 승자는 황극린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 * *

‘···.’

흑도에서도 급이 나뉜다.

녹림이나 하오문 같은 중원 전역에 뿌리를 뻗은 흑도 방파는 자기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할 것 같으면 절대 덤비지 않는다. 아무리 세력권이 넓다고 하더라도, 초고수의 존재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까놓고 천하칠대고수 중 하나가 회까닥 돌아서 녹림 산채를 하나씩 격파한다고 하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 물론, 숫자 앞에 장사가 없겠지만··· 중원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들이 작정하고 치고 빠진다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흑도들은 상대의 눈치를 봐가며 ‘장사’하는 능력이 필수였다.

괜히 강호행을 나선 초출내기들을 족쳤다가 그들의 신분이 명문세가 출신이라면? 구파일련의 제자라면? 세력의 균형이라는 게 있지만, 명분이 있다면 그들은 괴물이 된다.

고작해야 남창.

남창에서도 북쪽 거리를 지배한 칠성방은 그들이 상대하는 이가 누군지 몰랐다.

흑살문.

살수 문파계의 이단아. 살수계의 구파일련. 그것이 바로 과거 황극린이 속했던 흑살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살수가 아니었지만··· 언제든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살수의 싸움은 정면돌파가 아니다.

상대로 하여금 피가 마르게 하고, 공포에 젖게 하는 싸움.

살수들은 끈질기고 집요하면서 잔혹하다.

황극린은 본때를 보여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흑도를 상대할 땐, 자비란 없어야 한다. 자비를 베풀면 상대가 약하지 않을까? 의심부터 한다. 코앞의 나무만 볼 줄 알지 숲 전체를 바라보지 못한다. 그들에겐 눈앞의 나무가 감히 오를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하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황극린은 당당히 초우의 대장간을 지나쳤다.

묵철의 의뢰를 맡긴 고수가 아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지 칠성방원들은 그를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그가 향하는 곳은 칠성방의 전각이었다.

* * *

“허어억! 허어억!”

강백언은 폐가 터지도록 달려 초우의 대장간 앞으로 달려갔다. 그의 왼손에는 붕대가 감싸져 있었는데, 빨갛게 물든 것이 방금 다친 듯하다. 다친 상태에서도 직접 이곳에 뛰어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장간의 감시 임무를 맡고 있던 유충이 당황한다.

“바, 방주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얼른 꺼져! 아니, 얼른 돌아가! 아니면 다 죽는다! 다 죽어!”

“예? 죽어요? 방주님, 근데 팔이···.”

“저번에 왔던 고수가 왔다! 지금도 우릴 지켜보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얼른!!”

핏기가 싹 가셔 허연 얼굴. 공포에 질린 강백언의 표정을 본 유충이 심각한 얼굴로 주위를 살핀다. 하지만 그런 유충이 답답했는지 강백언이 그의 뒷통수를 후려친다.

“얼른 가라고! 얼른!”

“아, 알겠습니다.”

수하들이 황급히 자리를 옮기자 강백언 또한 자리를 뜬다.

기척 없이 나타난 사신의 손길. 황극린 그를 찾아가자마자 손가락 두 개를 잘랐다. 사실 죽이는 게 깔끔했지만, 강백언이 죽으면 칠성방원들을 관리할 사람이 없어진다. 꼴에 방주의 복수를 하겠다고 설칠 수도 있었다.

황극린은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다음에 또 자신을 찾으면, 죽음으로 보답하기로 약조했다. 그 약조는 기필코 지켜질 것이다.

‘나도 마음이 많이 약해졌군.’

과거였다면, 일단 자신의 뒤를 밟았다는 이유만으로 칠성방은 전멸했으리라.

그편이 훨씬 깔끔했으니까.

하지만 황극린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때는 뒤를 캐면 죽인다고 말하진 않았었다. 이제 확실히 말해놓았으니, 다음번엔 망설임없이 강백언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으리라.

황극린은 당당히 정문으로 초우의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왔군.”

“예, 어르신.”

황극린이 인사한다.

초우는 바깥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칠성방 놈들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철과 대화하는 장인들이 고작 투박한 박도 따위를 휘두르는 흑도 놈들을 두려워하랴? 단지 묵철의 의뢰를 맡긴 소년이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칠성방주가 헐레벌떡 나타나서 수하들을 데려간 것을 보면, 이 소년이 무언가를 한 것이 분명하다. 확실히 무언가 있었다. 하지만 초우에게 그런 것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저 때문에 귀찮은 일은 없으셨습니까?

“파리 떼들이 들러붙긴 했지만··· 그런 놈들 때문에 흔들렸다면 난 여기서 철을 만지고 있지 않았을 거다.”

초우가 묵철로 만든 비수를 가져온다.

지금의 황극린에게 조금 컸지만, 아이들은 빨리 자라니 금방 손에 맞게 될 것이다.

황극린이 묵철 비수를 잡고, 슥슥 휘두른다.

무게 중심에 전혀 어긋남이 없었다. 황극린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초우는 남창의 구석에 박혀 있을 실력이 아니었다.

“좋군요.”

가만히 소년을 지켜보던 초우가 입을 연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느냐?”

“예.”

“끝의 고리는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

황극린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준다. 소매 속에서 얇은 실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비수 고리 부분에 감는다. 매듭을 묶자마자 황극린이 비수를 던졌다.

툭!

“허···!”

손놀림을 보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나무판자에 박힌 비수를 실로 빠르게 회수하는 황극린이다.

“묵철로 암기를 쓰는 사람은 처음 보는구나. 확실히 보통의 철보다 가벼우면서도 강도가 뛰어나니 괜찮겠지만···.”

“꽤 있습니다.”

“뭐가 말이더냐?”

“묵철을 암기로 쓰는 사람들 말입니다.”

“허허···.”

대체 이 아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건 은잠사(銀蠶絲)더냐?”

“은잠사는 비싸서 말입니다. 아직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비수에 묶인 실은 여러 겹으로 되어 있었다. 은잠사는 한 가닥의 실로 상당한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 은잠사라면 초우의 거리에서 보이지 않으리라.

“잠시 기다려 보거라.”

초우가 대장간 안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온다.

그의 손에는 안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보이지 않은 실이 둥그렇게 말려 있었다.

“이건···.”

“은잠사다. 내가 만든 비수가 고작 실뭉치에 걸려 있는 꼴은 보지 못하겠구나.”

“지불할 돈이 없습니다.”

피식.

“돈 따위에 집착했다면, 이런 후미진 장소에 대장간을 만들지 않았을 거다. 난 철을 만지는 게 좋을 뿐이다. 내가 만든 병기가 완벽하게 태어나길 바랄 뿐이지. 그 외에는 바람이 없단다.”

“···.”

대가를 바라지 않은 호의.

과거엔 이런 호의를 모두 거부했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빚을 지는 게 싫었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몸으로 다시 돌아온 황극린은 다르게 살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빚을 지기도 하며, 자신도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었다. 그 의도가 어찌 됐든 간에 말이다.

“잘 쓰겠습니다.”

“그래. 이제 가 보아라.”

용건은 다 끝났다는 듯, 초우가 등을 돌려 용광로 앞으로 다가간다.

황극린은 그가 보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대장간을 나섰다.

“내가 만든 병장기로 무림에 이름을 알리는 것만큼 보람찬 일은 없겠지.”

소년은 분명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기다리면 된다. 언젠간 소년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될 날을 말이다.

그것 또한 초우의 즐거움이었다.

* * *

“그래서 누군지도 모르는 놈한테 금고를 털리고, 손가락까지 빼앗겼다?”

“···죄송합니다.”

흑랑파 적사갈.

흑랑파는 강서성과 호북성 사이에 터를 잡은 사파 문파로, 흑도 방파와는 급이 다르다. 그렇기에 그들은 흑도 문파들을 수하로 들여 이용한다. 자질구레한 일들을 가장 잘 처리하는 건 흑도였으니까. 또, 묵혀둔 금고더미나 다름없었다.

언젠간 칠성방의 배를 갈라 한몫 챙기려 했던 적사갈은 심기가 불편했다.

“어디냐? 호양문이냐?”

호양문은 남창의 남쪽 거리를 관리하는 흑고 방파 독존파의 뒷배였다. 흑랑파와는 남창 일대의 패권을 두고 싸우고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서로 견제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쩌면 그들이 나섰을 수도 있었다.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나타난 고수인지···.”

짜악!

다짜고짜 강백언의 따귀를 날려버린 적사갈.

그가 살기 등등한 눈빛으로 강백언을 내려다본다.

“그걸 네가 모르면 어쩌자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쯔쯔, 됐고! 일단 그놈은 잊어라.”

“예?”

당연히 흑랑파에서 복수를 해주리라 믿었던 강백언이었다.

그런데 잊으라니?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묵철을 얼마나 애지중지···.

“은밀한 소문이 있다.”

“예? 소문말입니까?”

“그래, 뇌불(雷佛)의 무공이 포양호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말이다.”

뇌불!

그는 전전대의 초고수 중 한 명으로, 혹자는 고금제일인으로 평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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