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비에 그 아들
황극린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대장간이다.
묵철을 다룰 수 있는 장인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깐깐하다고 욕을 많이 먹는 장인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병기를 만들지 않은 장인. 재료 탓을 한다고 비아냥대는 이들도 있었지만, 묵철을 다루기엔 딱 적당했다.
몇 명의 후보군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최고의 비수를 만들어주겠다며 황극린에게 사정했다. 그런 철을 한 번이라도 다뤄본 경험은 평생 남게 된다. 묵철은 크기에 비해 금값보다 훨씬 비싸다. 그렇기에 다뤄보긴커녕 구경도 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당연히 그런 이들은 제외였고.
마지막에 들른 대장간에서 황극린이 원했던 장인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긴 아이가 오는 곳이 아니다.”
용광로의 열기가 몸을 뜨겁게 달군다.
그런데도 황극린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가만히 장인이 담금질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황극린이 입을 연다. 이 정도면 묵철을 충분히 다룰 장인이다.
“의뢰를 맡기러 왔습니다.”
“···.”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팔근육을 가진 중년 사내.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팔이 꿈틀거린다.
“묵철입니다.”
중년 장인이 의아한 얼굴을 한다.
이런 어린아이가 어떻게 묵철을 가지고 있는가? 어른들의 심부름이라도 왔단 말인가? 애초에 묵철은 달랑 아이 한 명을 보낼 수준의 재료가 아니긴 했다.
“누가 쓸 거냐?”
“접니다. 비수로 만들 겁니다. 암기로도 활용할 수 있고, 단검으로도 쓸 수 있게. 만들어주십시오.”
“허허, 어디서 훔치기라도···.”
아니다.
이건 이런 아이가 훔칠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물건이다.
세상 풍파를 모두 겪으며, 자신만의 신념을 세우고 대장장이 일을 해왔던 초우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너···.”
“원하는 모양은 그림으로 그려왔습니다.”
틀을 잡은 그림. 삼지창과 비슷했지만, 중앙의 칼날이 길게 툭 튀어나왔으며 끝에는 원형의 작은 고리가 그려져 있다. 실을 연결하여 던지고 회수하려는 건가? 애초에 묵철 같은 귀한 광물로 암기를 만든다는 거 자체가 사치였지만···.
초우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재밌겠는데.”
초우의 장인정신을 자극했다.
묵철에 호기심도 들었고, 아이가 이것을 가져왔다는 거에 의아함도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이 그려온 그림을 보고,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은 그가 처음 보는 모양의 암기였다.
“맡기면 언제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한 달, 아니 보름··· 어쩌면 칠주야 안에 할 수도 있다.”
계속 줄어든다.
아마 초우는 밤을 새워서라도 묵철의 담금질을 할 생각인가보다. 황극린으로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동전 한 푼만 받지.”
동전?
“설계도라고 하기엔 조잡하지만, 병기의 틀을 내 머릿속에 익히는 값이다.”
“저야 나쁠 건 없지요.”
황극린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대장간을 떠나갔다. 의뢰를 맡기고 장인의 실력을 알아보겠답시고 온갖 종류의 질문을 던져대는 놈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런 비싼 광물을 맡기면, 보통은 그렇게 행동한다.
그것이 장인 초우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결과로 자신을 평가하겠다는 의도일 것 같기도 했고, 얼마 있지 않은 자신의 이름값을 믿겠다는 행동일 수도 있었다.
아무렴 어떠하리.
“재밌겠군.”
초우는 황극린이 놔두고 간 그림을 고이 접어 소매 속에 넣었다.
* * *
“관주님, 황극린이 무단으로 훈련을 이틀이나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피식.
시운량 교관의 말에 황보휘가 어이없다는 미소를 짓는다.
“벌써 힘들다고 포기한 겁니까?”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황보휘가 한숨을 내쉬며 답한다.
“교관님께서 조금 더 신경 써 주십시오. 불쌍한 아이입니다.”
“허나, 무단으로 훈련을 참석하지 않은 것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에도 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그 아이에겐 황룡무관이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을 텐데요.”
무관주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이번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예, 그럼 관주님의 뜻대로···.”
“그래도 벌은 주십시오.”
“예?”
“극린이가 불쌍하긴 하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교관님께서 잘 타일러주시리라 믿습니다.”
“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은 듯한 황보휘다.
이 사내가 황극린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가 잘되기를 원해서라기보단···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하다. 마치 알아서 포기해줬으면 하는···.
이건 생각이 너무 나간 걸까?
황보휘는 생각이 많은 듯한 시운량 교관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로군. 쓸모없는 것.”
그런데 왜인지 그의 표정이 해맑았다.
황극린의 실패가 그에겐 더없는 행복인 것처럼 말이다.
* * *
황극린은 돌아온 후, 시운량 교관에게 벌을 받았다.
육체적인 형벌은 아니었다. 솔직히 황극린에겐 상당히 귀찮은 벌이었다. 잘못한 점을 종이에 빡빡하게 적으라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잘못을 반성하라나? 뭐, 황극린은 쓸데없는 말을 구구절절하게 적으면서도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분명히 황보휘의 친우들이 이곳을 떠나는 게 기점이었지.’
그 이후로 많은 일이 벌어진다.
황씨가문은 남창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천하무관을 인수하여, 그리로 옮긴다. 그 과정에서 남창에 자리를 잡은 중소 문파들과 시비가 붙기도 하고, 가문의 재물이 도둑맞는 등 여러 사건이 생겼다.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황극린은 당시에 도둑으로 몰려 몰매를 맞았던 기억이 있다.
안 그래도 힘들었던 황씨가문에서의 생활이 더 고통스러워진다. 그때 황극린은 황씨가문에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몸이 회복했음에도 나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장보도.’
장보도는 쉽게 말해서 보물 지도였다.
무림에서 보물이라 함은, 신병이기나 막대한 보석 그리고 천하를 논할 수 있는 무공을 뜻한다. 장보도는 그것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려주는 지도였다.
당연히 장보도는 태반이 가짜다.
검존(劍尊)의 장보도가 발견되고 강호에 피바람이 분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장보도가 가리키는 곳에선 금창약 하나가 발견된 일도 있었다. 장보도를 두고 피 터지는 싸움은 모두 의미 없는 희생이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남창에서 발견되는 장보도는 진짜다.
누군가의 장난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짜 장보도. 황극린은 그걸 노리고 있었다.
그가 아는 내공심법은 흑살문의 것.
특급 살수가 될 수 있을 만큼, 최상급의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아직 단전을 만들지 않고, 무영심결로 세맥을 깨끗이 하는 이유는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서다.
천하제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그런 추상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단지, 힘이 있으면 휘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과거의 삶에서 그는 이름도 아닌 번호로 불려왔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다 썼습니다.”
열 장.
빼곡히 채운 종이엔 황극린의 반성이 담겨 있었다. 찬찬히 읽어보던 시 교관이 고개를 끄덕인다. 일부러 글자 크기도 키우지 않고 열심히 벌을 받았다. 굳이 더 혼낼 필요는 없었다.
“황극린.”
“한 번만 더 무단으로 훈련을 이탈한다면 제명할 수밖에 없다. 만약 무공이 네게 맞지 않는다면 일찍 포기하는 게 좋다. 무공만이 네 삶의 전부가 아닐 거다. 맞지 않는 길이라면, 빨리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게 좋다.”
시운량 교관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이었다.
그 말에 황극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 가 보아라.”
황극린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괜한 말을 했던 걸까?
황보휘는 황극린에게 황룡무관이 마지막 희망이라 했다. 전엔 장원의 마당이나 쓸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안될 걸 알면서도 포기하라고 해야 하는가? 처음엔 재능을 판별할 수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사정을 대략적으로 듣고난 뒤엔 불쌍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그래, 일단 해볼 수 있는데 까진 해보아라. 상처가 아물면 더 크게 성장하는 법이니.’
그가 포기하겠단 말을 하기 전까지는 계속 지켜보기로 한 시운량 교관이었다.
* * *
“안녕!”
“···.”
서문취아.
좋은 환경에서 자라 참으로 순수한 여인이다. 그런 점이 오히려 황극린에겐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이틀 동안 어디 갔었어?”
“의방에 다녀왔습니다.”
“뭐? 의방? 어디 아픈 거야?”
걱정 가득한 얼굴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훈련 많이 힘들어? 만약 힘든 일이 있으면 이 누님한테 언제든지···.”
“이제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만.”
매번 고개만 까딱이고 사라졌던 황극린.
질문이 있다는 말에 서문취아가 흥분한다.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연 것인가? 화사한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이었다.
“언제 떠나십니까?”
“어? 나? 언제 본가로 돌아가냐고 묻는 거야?”
“예.”
“···.”
황극린으로선 꽤 중요했다.
오랜 과거의 일이다 보니 사건의 발생으로 시간을 유추해야 한다. 그 장보도가 발견된 것은 친우들이 떠난 뒤였다. 언제 떠나는지 알 수 있다면, 더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내가 갔으면 좋겠어?”
입술을 삐죽이며 묻는 서문취아.
그녀가 싫다는 건 아니다. 애초에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황극린은 관심이 없었을 뿐.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아마 곧···.”
그녀가 대답하려 할 때.
누군가 나타난다.
“어이구, 취아야.”
“어, 안녕하세요. 상가주님.”
“허허, 그리 격식을 차릴 필요 없대도.”
황씨가문의 가주 황천옹.
그는 황극린의 작은 아버지였다. 쉽게 말해서 황극린 아버지의 동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극린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냐?”
“아, 별건 아니에요. 극린이가 다쳐서 의방에 다녀왔다고 해서···.”
“허? 그게 정말이더냐. 다쳤으면 다쳤다고 내게 말하지 그랬느냐?”
황천옹이 황극린을 걱정하는 척했다.
이제까지 그를 방도 아니라 소랑 함께 살게 했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 물론, 황극린 또한 그걸 언급하진 않았다.
“괜찮습니다.”
“쯔쯔, 내 보휘에게 잘 말해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힘들면 무공을 계속 배울 필요는 없단다. 형님께서도 무공을 익히다가··· 그런 일을 겪었지 않으냐?”
황천옹의 말에 서문취아가 깜짝 놀란다.
황극린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단 말인가?
서문취아의 눈빛이 걱정으로 물들자 황천옹이 황급히 말한다.
“그래, 극린아. 피곤할 터인데 얼른 가서 쉬도록 해라.”
기다렸다는 듯 황극린이 대답한다.
“감사합니다.”
“···.”
“···.”
황극린이 떠나갈 때.
황천옹과 서문취아는 서로 다른 감정을 담아 그를 바라본다. 서문취아의 시선엔 안타까움과 걱정이 깃들어 있었지만, 황천옹은···.
‘아비와 똑같은 새끼로구나. 피는 속이지 못하는 건가? 감히··· 내 아들의 여인을···.’
황천옹의 머릿속에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사랑했던 여인을 어리숙하고 우습게만 보았던 형인 황용철이 빼앗아갔던 그 일을 말이다.
* * *
며칠 뒤.
남창의 북쪽 거리.
“뭐라고? 초우 대장간에서 묵철을 가지고 있다고?”
“예, 거기 대장장이가 까탈스럽기로 유명한데 며칠 전에 작업해야 할 게 생겼다며 모든 의뢰를 거절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문으로는 묵철이 들어왔다고···.”
“···.”
칠성방주 강백언.
흑도가 괜히 흑도겠는가? 건실하게 살아가고, 과거에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면 흑도라 할 수 없었다. 거기다 그에겐 믿는 구석이 생겼다.
“조만간 흑랑파(黑狼派)의 적 대협께서 오실 거다.”
“헙! 흑랑파에서요?”
흑랑파.
강서성과 호북성 사이를 주름잡는 사파 문파 중 하나로, 칠성방이 충성을 바치는 집단이었다.
“슬슬 남창 거리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서신을 보냈다. 북쪽 거리 하나로는··· 내가 입은 손해를 메꿀 수 없으니까. 적 대협을 모실 준비를 해라. 그리고 그분이라면 묵철을 가져간 도둑놈도 같이 처리할 수 있겠지.”
강백언의 결단.
그것이 좋은 선택일지 최악의 선택일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