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귀의 심기를 건드리다
비 노인도 사람이니만큼 품에 있는 금자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금자 하나만 있어도 아껴 쓰면 4인 가정이 몇 달은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그만큼 가치가 큰돈이다. 하지만 지금 품속에 고이 간직한 금자는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왜냐고?
그것은 황극린이 번 돈이었으니까.
비 노인은 수년 전부터 황극린을 지켜봤었다.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걸 보면서 응원도 하고, 눈물도 흘렸으며, 힘을 내기도 했다. 황극린은 존재 자체만으로 비 노인에게 힘을 주는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이 무언갈 하려고 한다.
어떤 계기로 황극린이 바뀌었는진 모른다. 알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자기 일을 밝히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비 노인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어쩌면 우울하고 처량했던 과거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으니까. 마음의 빗장을 꼭 틀어 잠그고 숨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비 노인은 황극린이 세상을 향해 나아갔으면 했다.
분명 황씨가문에 속박되어 슬픈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렇게 꾸준히 돈을 모으다 보면 황씨가문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비 노인은 그것만으로 족했다.
분명히 그러했을 뿐이었다.
“어어어! 어어억! 아, 안 된다! 그건 안 돼!!”
목이 터지도록 소리친다.
이미 혀에서는 피 맛이 느껴진다. 입가에 흉터가 있는 저 뱀 같은 얼굴은 가진 사내가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일까? 죽도로 소리쳤기 때문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건,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황극린의 행낭을 빼앗겼다는 점이다.
이제야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 황극린.
과연 자신이 그것을 빼앗겼다고 말하면, 그는 무어라고 할까? 그를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절대 안 된다.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그건 안 될 일이다.
“좀 닥치고 있어.”
“커억!”
발길질에 비 노인이 바닥을 뒹군다.
극심한 공포에 사지가 떨려왔지만,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것을 빼앗길 순 없었다.
“노친네 주제에 돈이 꽤 있네? 고작 동전이나 몇 푼 가지고 있을 줄 알았더니. 완전 횡재했구나.”
“이노오옴! 그게 어떤 돈인 줄 아느냐! 어엉! 이 돈이 어떤 돈인지······! 그 돈은 말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명이···!”
“정말 시끄럽네.”
뱀 같은 사내가 노인의 앞에 다가온다.
그리고 날카로운 단검을 뽑아, 그에게 겨눈다.
“···!”
“어이, 네놈 말대로 이건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돈이야. 왜냐고? 기분이 좋아서 널 살려주려 했거든. 네까짓 노친네가 뒷골목에서 죽어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
칼날로 비 노인의 목을 지그시 누른다.
뜨거운 선혈이 흘러나온다. 죽음에 대한 공포. 비 노인의 동공이 마구 흔들린다.
“그러니까 갈 길 가자? 넌 운이 좋았던 거야. 더 시끄럽게 굴면 죽을 줄 알아.”
두려움으로 아래턱이 떨린다.
죽음과 황극린의 돈을 빼앗긴다는 공포. 과연 어느 것이 더 클 것인가?
비 노인은 덜덜 떨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제, 제발 그 돈을 돌려주시오. 제발, 부탁이오···! 내 시키는 건 뭐든 하겠소. 제발, 그러니···.”
“아, 거참. 말귀를 못 알아듣네. 노망이 나셨나?”
뱀 같은 얼굴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그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사정한다.
“제발! 제바아알! 부탁이오. 부탁이외다. 제발···.”
“야.”
사내가 허리를 낮춰 비 노인과 눈을 마주친다.
차가운 눈빛에 비 노인은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뒷골목에선 흑도가 살아간다. 그들은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오늘이 이 몸 생일이라 기분이 좋아서 피를 묻히지 않는 거거든? 그걸 다행으로 알아라.”
무언가 비 노인의 얼굴로 날아온다.
사내의 주먹이었다. 죽이지 않겠다고 했었지만, 대충 힘 조절을 할 필요는 없다. 노인을 기절시킬 생각으로 내지른 주먹은 정면으로 꽂혀버렸다.
퍽! 퍽! 퍽!
정확히 세 대.
비 노인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는 중에도 바짓가랑이를 잡은 손아귀에 힘이 풀리지 않았다. 사내는 발에 힘을 주어 노인을 밀어낸다. 살려줘서 감지덕지 감사해야 할 판에 돈을 내놓으라니, 참으로 멍청한 노인이 아닌가?
“진짜 귀찮게 하네. 퉤.”
사내가 쓰러진 노인에게 침을 뱉었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건 자신이 죽인 게 아니지 않은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결정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살겠지. 죽으면 운이 나쁜 것일 뿐이다. 인생이 그런 게 아니던가?
사내는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뒷골목을 떠나갔다.
* * *
황룡무관의 수련생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훈련을 받고 있다.
1조원들과 2조원들의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다.
1조원들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앞서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지 배웠으며, 2조원들은 패배가 얼마나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지 배웠다. 허나, 다음번엔 쉽게 패배하지 않겠다며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특히, 주서웅은 살벌한 표정으로 훈련에 임했다.
‘음, 잘하고 있군.’
주서웅이 다음 시험에 반란을 일으킨다면, 1조도 위기감을 배우게 될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모두 발전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한쪽이 승리하게만 하는 것은 의도에 맞지 않았기에 조만간 새로이 조를 짤 수도 있었다. 2조원들 중에서도 노력하려는 자가 있었고, 1조원들 중에서도 점점 자만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오전 수련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같은 조원끼리 모여 식사를 시작한다. 시운량 교관도 이때만큼은 아이들은 감시하지 않았다.
그가 떠나자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한다.
가장 말을 많이 하는 건, 황씨가문의 둘째인 황일남이었다.
“야, 주서웅. 너 얼굴에 멍이 뭐냐?”
“아, 그게 넘어져서 그만, 헤헤.”
“중심도 못잡고 넘어져서 상희륭 저 새끼 이길 수 있겠어?”
주서웅이 힐끔 1조원 아이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당연히 이길 수 있다. 그의 뒤에는 든든한 사신님이 있지 않은가! 어젯밤 백 대를 맞으면서 깨달았다. 이렇게 맞다 보면 상희륭 따위의 주먹과 발길질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 같아고 말이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잘 해라. 이번에 또 지면 국물도 없다.”
“옙!”
“황극린, 너한텐 기대도 안 하니까 그냥 얌전히만 있고.”
황일남은 가만히 있는 황극린에게 시비를 건다.
당연히 황극린은 평소처럼 작게 고개만 끄덕일 뿐, 반항 따위는 하지 않는다. 황일남이 재잘거리는 건 그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단지, 그걸 지켜보는 주서웅만 위태로울 뿐이다.
‘저, 멍청한 도련님··· 언젠간 분명히 혼쭐이 날 게 분명하겠군. 쯧쯧.’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있었다.
주서웅은 어제 이후로 황극린을 완전히 인정하게 되었다. 사정은 모르지만 힘을 숨기고 있는 이유가 있으리라. 그가 힘을 드러내게 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왠지 모를 기대가 자리 잡았다.
그때, 밥도 다 먹지 않은 황극린이 일어선다.
‘버, 벌써? 오늘이 그날이야?’
주서웅은 긴장했지만, 황극린은 황일남에게 향하지 않았다.
그가 걸어온 곳은 주서웅이다.
‘왜, 왜 나한테···.’
위축되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황극린과의 약조였다. 그와의 약조는 어기면 안 된다. 그는 그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교관님께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쉬어야겠다고 전해줘.”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이는 황극린
당연히 주서웅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황극린! 너 어디 가는 거야! 야!”
갑자기 연무장을 빠져나가는 황극린을 보며, 황일남이 분개한다.
“야, 주서웅! 저 새끼 어디 가는 거야?”
“아, 그게··· 몸이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뭐? 누군 몸이 좋은 줄 아나? 나도 온 근육이 뭉쳤구만!”
주서웅은 황일남의 말을 깨끗이 무시한 채 떠나가는 황극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평소의 황극린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주서웅은 느낄 수 있었다.
* * *
“허으윽··· 미안, 하구나. 극린아. 정말 미안하다. 정말, 흐으으윽···!”
비 노인이 넝마가 된 모습을 황극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일어나서 황극린을 찾아왔다. 일단 뒷골목에서 만난 뱀 같은 얼굴의 사내를 찾아야 한다고도 생각했지만··· 먼저 황극린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는 게 먼저였다. 잘못을 해결하는 것보다 그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비 노인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은 몸을 이끌고, 연무장을 찾아왔다.
황씨가문의 식솔들이 당장 의방에 가야 한다고 하는 것도 극구 거절하며 말이다. 일단 황극린에게 사과를 한다. 일을 해결하는 건 그다음이다.
“정말···, 정말 미안하다. 네가 날 믿고 그것을 맡겨 주었건만, 흐으윽. 내가 이 멍청한 노인네가··· 모든 걸 망쳐버렸다. 내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 돈을 갚으마. 어떻게든 갚으마···.”
“비 노야, 지금 뭐하십니까?”
황극린의 낮은 목소리.
그는 비 노인의 두 어깨를 부여잡았다.
“내가··· 망쳐버렸다. 미안하다. 금자 두 냥을···.”
황극린이 비 노인의 옆구리로 파고든다.
“나중에 듣겠습니다.”
“그, 극린아···?”
“치료가 먼저입니다.”
그깟 금자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비 노인이 이번 일로 잘못된다면···.
“허, 허엇! 그, 극린아···!”
작은 체구였다.
그런데 어찌나 힘이 장사인지 비 노인을 번쩍 들어 올린다. 이 아이가 이렇게 힘이 셌던가? 황룡무관에서 훈련을 받은 탓일까?
아니다.
황극린이 힘이 세고 아니고가 뭐가 중요한가?
비 노인은 황극린에게 욕설을 들을 각오까지 했다. 근데 이 아이는 자신을 부축하여 의방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그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비 노인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형님, 한 달 치 상납금을 미리 드리겠습니다.”
“뭐?”
칠성방(七星幇)의 방주 강백언.
탁상 위에 올려진 금자 한 냥을 보고 미소를 머금는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으랴?
“크크, 호구라도 하나 잡은 모양이군.”
“예, 운이 좋았습니다. 웬 노인네가 품에 금자를 품고 다니더군요.”
“호오? 그럼 더 있었다는 건데.”
“에이, 왜 그러십니까? 오늘 제 생일 아닙니까?”
“개뿔, 생일이면 뭐? 축하해줄 여자는 있고?”
“그러니까 이제 만나러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흐흐흐흐.”
흑도(黑道).
사파와는 조금 다른 계열이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중원 어디에나 있으며, 돈을 벌 수 있다면 오늘과 같이 불쌍한 노인네의 돈을 털어먹는 것은 예사로 여긴다. 사파 또한 더러운 돈을 만지긴 하지만, 그래도 추잡하진 않은데··· 흑도들이 돈을 버는 방식은 치졸하고 야비하다.
중원에서는 대표적으로 하오문이나 녹림 등이 대표적인 흑도의 문파다. 그들은 사파를 자처하지만, 본질은 흑도나 다름없었다.
물론, 칠성방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크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전 한 달 치 상납했습니다요~ 그러니까 당분간 절 찾지 마십시오! 형님!”
과장된 동작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한유걸이다.
이제 돈도 벌었으니, 돈을 쓰러 가는 것이다. 뭐, 금자도 상납받았겠다 칠성방 방주의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었다.
“그래, 다음 수금 날이나 제대로 맞춰라. 늦으면 알지?”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다.
흑도의 세계는 냉혹한 편이다.
“예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한유걸이 떠나간다.
칠성방 방주 강백언이 냉큼 금자를 챙겼다. 오늘은 왜인지 수하 놈들이 많은 돈을 갖다 바치고 있었다. 참으로 운이 좋은 날이었다.
‘크크크, 이러다가 금방 기루라도 하나 차리겠어.’
흑도 방파가 규모를 키우는 길은 정해져 있었다.
추잡하게 돈을 모으다가 상대 조직에게 먹히지 않으면, 모은 돈으로 사업을 한다. 물장사와 술장사는 이윤이 엄청나다. 그때부턴 추잡한 짓을 하지 않고도, 계속 돈이 돌기 시작한다.
남창에서 두 손가락에 꼽히는 흑도 방파 칠성방은 곧 흑도가 아닌 사파로 불릴 수 있으리라.
칠성방주가 희희낙락하며 금고를 열었다.
잔뜩 쌓인 돈더미를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가시는 느낌이다. 퀴퀴한 금고 냄새였지만, 돈이 들어있어서 그런지 그 향마저 상쾌하다.
“역시 사람은 돈 냄새를 맡아야 장수한다니까? 이 냄새를 맡고 어떻게 일찍 죽어?”
강백언은 모르고 있었다.
혈귀(血鬼)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