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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8화 (8/316)

새로운 시작

“극린아, 어쩌자고 저 뱀 같은 아이의 제안을 응한 것이더냐? 너도 겪어봐서 잘 알지 않으냐?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 아이가 절대 아니야.”

걱정 가득한 얼굴의 비 노인.

당연했다.

그는 가문 내에서도 황보휘의 진짜 얼굴을 알아본 몇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공을 알려주겠답시고 수작을 걸어올 것이 분명했다. 비 노인은 그걸 막아줄 힘이 없었다. 지금도 해줄 수 있는 건, 남은 음식을 마구 뭉쳐 주먹밥 정도를 전달해주는 것밖에 없다.

“괜찮습니다. 무공을 익히면 좋지 않겠습니까?”

“극린아, 무림인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느냐? 그들은 매일매일을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인간들이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단다. 어쩌면 사람을 죽여야 할지도 몰라. 거기다 더 큰 문제는 황보휘가 너에게 제대로 된 무공을 알려줄 것인지도 의아스럽구나.”

사람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라···.

황극린은 실로 오랜만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과거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살수였다. 어찌나 임무를 확실하게 처리했는지 혈귀라는 별호까지 붙었었다. 특급 살수가 아닌데도 별호가 생긴 것은 그가 유일했었다. 그만큼 그는 많은 이들을 죽여왔었다. 비 노인의 걱정 어린 말을 듣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었다.

“비 노야, 괜찮습니다. 절 믿어주십시오.”

소년과 노인이 눈을 마주한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황극린의 눈빛. 비 노인은 이런 눈빛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이런 눈동자를 지닌 이들은··· 무언가 일을 내긴 냈었지.’

그것이 옳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간에 말이다.

주서웅을 쥐잡듯이 잡은 황극린을 보면, 무언가 있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특히 어른인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딱히 없다는 부분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믿어주시겠습니까?”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비 노인은 힘이 없었으니까.

“이 할애비가 도울 일이 있다면 꼭 말해다오.”

“예, 물론입니다.”

물론이라는 말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인다.

어른이 아이의 말에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이 참 기묘했다.

* * *

“후우.”

이게 얼마만의 목욕인지 모른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그는 정파에서 꾸린 추격대를 따돌리며 도주하고 있었기에 제대로 씻을 여유가 없었다. 물이 따뜻하진 않지만, 묵은 때를 벗겨내는 게 참으로 시원하다. 보통 사람에겐 일상일지도 모르겠지만, 황극린에겐 깜짝 선물과도 같았다.

오랫동안 물을 머금지 않아 마구 엉켜있는 머리카락.

몇 번이나 헹구고 나서야 본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날 수 있었다. 잔잔한 물에 얼굴을 비춰본다.

‘역시 머리는 자르지 않는 게 낫겠군.’

과거에도 머리를 잘 자르진 않았다. 살행을 임할 땐, 머리를 묶거나 했었다. 황극린의 외모는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그는 괜히 주목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은밀함과 음침함이 황극린에겐 익숙했다.

두꺼운 천으로 물기를 닦고, 새로 받은 무복을 입는다.

조금 소매가 길었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한 시진 동안이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욕탕을 나선다.

그리고 새로이 받은 방으로 향하고 있을 때.

휘이잉-!

순간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눈을 가린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린다.

때를 벗겨냈더니 이런 바람에도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다.

“···.”

황극린은 살짝 머리를 흔들어 올라간 머리카락을 다시 원래대로 만들었다. 그리곤 무심하게 가던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잠시 뒤.

“와···.”

한 여인이 기가 막히다는 듯 황극린이 지나간 길을 바라본다.

그녀는 황보휘와 함께 황씨가문에 놀러 온 서문취아였다. 다른 친우들은 오랜만에 술을 마셔 숙취에 고생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나와서 장원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했다.

“진짜 예쁘게 생겼네···. 남자 맞아?”

조금은 토라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도 외모론 딱히 빠지진 않았지만, 방금 목격한 소년의 얼굴은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랄까? 마치 남궁 언니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후우우우···.”

기운 빠지는 한숨을 토해내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서문취아.

그리고 전각의 기둥 뒤에서 잠시 멈춰있던 황극린 또한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 * *

“보휘야! 보휘야!”

“으응? 끄응.”

황씨가문의 장남 황보휘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선다. 고향에 돌아온 기념으로 독주를 연거푸 마셨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하지만 찾아온 서문취아를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황보휘는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더 긴밀한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꿀꺽꿀꺽.

시원하게 물을 마신 황보휘가 서문취아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녀의 눈빛이 초롱초롱한 것이 무언가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방금 엄청 잘 생긴··· 아니, 예쁜 남자를 봤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랑 아주 조금 닮은 것 같아서 말이야. 동생이야? 너, 남동생이 있다며.”

황씨가문은 대체로 외모가 빼어난 편이다.

하지만 예쁜 남자라···.

황보휘의 머릿속에 누군가 스쳐 지나간다.

“회색 무복을 입고 있었어?”

서문취아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응! 맞아.”

“···사촌 동생이야.”

“사촌 동생?”

혹여나 둘째인 황일남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는 서문취아가 저리 호들갑을 떨 정도로 예쁘게 생기진 않았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아마 황극린이 분명했다. 황보휘도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땐, 상당히 놀랐으니까. 아마 나이가 들수록 더 외모가 빛이 나겠지.

“어, 그런데 어떻게 만났어?”

“아니, 너희들은 다 술 먹고 뻗어있으니까 너무 심심해서 장원을 구경하다가 마주쳤어. 근데 조금 음침한 느낌이 있는 것 같기도···.”

“그리 붙임성이 좋은 녀석은 아니지.”

“그 얼굴로 한 번만 웃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황보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본다.

“걘 아직 어려.”

“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걔를 좋아할까 봐?”

“그렇게 보이는데.”

“아니거든요? 그냥 얼굴이 너무 예뻐서 감탄한 거야. 아니, 좌절했달까? 후우, 그 남궁 언니를 보는 것 같았다니까?”

“난 남궁 누님보다 네가 더 예쁜 거 같은데.”

“풋, 너는 남궁 언니를 못 봐서 그러는 거야. 아무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얼른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다른 애들도 깨우고 올게!”

벌떡 일어서서 방을 나서는 서문취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지 무림가의 여식치고는 확실히 순수하다. 그렇기에 황보휘의 마음에 더 들었다.

“···그래도 기분이 더럽군.”

그의 말대로 황극린은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하다.

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애송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서문취아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났다.

“죄인의 자식 주제에 말이지.”

뭐, 상관없었다.

곧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스스로 망가질 것이 뻔했으니까. 그렇게 만들기 위해 희망을 주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말이다.

* * *

“크, 크흐으음!”

불편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다.

거지꼴을 면했지만, 긴 앞머리로 눈을 가린 황극린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주서웅은 그런 황극린의 옆에 있는 것이 너무도 불편하고, 무서울 뿐이었다.

황극린은 그러거나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 괜히 일찍 왔다. 무공을 배운다는 기대감 때문에···.’

무공이라는 건 주서웅과 같은 이들에겐 인생 역전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시종으로 아무리 출세해보았자 인생은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무공을 배운다면 달라진다. 만약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재능이 있다면? 천하제일인이 될 기재였다면 어떨 것인가?

주서웅은 황씨가문의 첫째인 황보휘의 제안을 듣고, 밤잠을 설쳤다.

하지만 옆에 있는 황극린을 의식하고 있으니 그러한 바람이 부질없다는 걸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무공을 열심히 익혀도···.’

절대 이길 수 없다.

잠재의식까지 파고든 공포였다.

“주서웅.”

느닷없이 들려오는 사신의 목소리.

주서웅이 발작하듯 튀어 오른다.

“헤엑!”

“계속 그렇게 어색하게 있으면 들킨다.”

“미, 미안해···.”

주서웅이 사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들은 주서웅과 같은 입장인 시종들이었으며, 처음 보는 소년들도 있었다. 얼굴은 앳되었지만 다들 체격은 또래보다 훨씬 컸다.

마지막엔 황씨가문의 둘째인 황일남도 보였다.

“야야, 줄 똑바로 안 서? 응?”

그는 이곳의 주인이 누군지 알려주겠다는 듯 어깨에 힘을 준 채로 으스대고 있었다.

“어, 이 새끼?”

그러다 황극린을 발견했는지 설렁설렁 다가온다.

“오랜만이다?”

“···.”

황극린은 예전처럼 그에게 빌빌 기는 연기 따위를 하지 않았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답 안···.”

옆에서 주서웅이 안절부절못하고, 곁눈질하고 있을 때.

“모두 주목.”

꼿꼿한 자세로 뒷짐을 지고 걸어오는 황보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친우들과 딱 봐도 위험한 느낌의 중년 사내였다.

‘교관인가.’

황극린은 수많은 교관을 겪어보았다.

흑살문의 살수가 되기 위해서는 교관들의 지도 아래서 악몽과도 같은 교육을 수료해야 했었다. 각자 개성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곤 한다. 중년 사내도 딱 그러했다.

“날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소개하겠다. 난 황룡무관(黃龍武館)의 관주 황보휘다.”

황룡무관.

황보휘가 돌아오고 나서 새로이 만든 조직이었다.

단순히 무인들을 영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들은 충성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황보휘는 적당한 이들을 소집하여 교육하고자 했다. 가주 또한 그 의견에 찬성했다. 황보휘는 대문파인 무당파에서 무공을 익힌 인재가 아니던가?

“그리고 무당파의 속가제자다.”

자랑스레 말하는 황보휘.

황룡무관이라는 말에는 조금은 시큰둥했던 반응이 격해진다. 자리에 모인 소년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황보휘는 그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오히려 그런 것에 흡족해하는 것이 없어 보인다는 걸 잘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일러둘 것이 있다. 너희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건 내가 아니다.”

웅성웅성!

“조용.”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좌중을 압도한다.

그가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 자체가 그런 것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황보휘의 옆에 선 중년 교관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무당의 무공은 외인에게 알려줄 수 없다. 이건 무림의 법도이자 규칙이다.”

“···.”

황보휘에 엄숙한 말에 모두가 침묵한다.

“하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교육에 관해서라면··· 이분이 더 뛰어날 테니까.”

겸손한 말투로 말하며 살짝 뒤로 물러서는 황보휘.

그리고 두 명의 교관이 앞으로 나선다.

“난 오늘부터 너희들을 가르칠 시운량이라 한다. 난 너희들의 사부가 아닌 교관일 뿐이다. 그렇기에 날 사부라 부르지 않아도 된다.”

보통 무공을 익히면 사부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강호 무림에서의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하지만 황룡무관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사제지간을 만들기 위한 조직이 아니었다. 무인을 양성하는 교육집단일 뿐이다. 황씨가문의 패로 쓰일 무인들을 말이다.

“사제의 연을 맺는 것은 아니지만 본 교관이 교육 중 하는 말은 모두 절대적인 명령이다. 따르지 않으면··· 그건 그때 가서 알려주도록 하겠다. 이상.”

시운량이 뒤로 물러선다.

묵직한 중저음. 눈에서 아래턱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 귀기마저 엿보이는 눈빛까지.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싱글벙글했던 열 명의 아이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다.

‘시운량이라···.’

당연히 황극린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본래 너희들을 교육하는 건 전적으로 시 교관님이 담당하실 것이지만, 오늘 내가 온 것은 소개를 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무공이라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함도 있다. 무인과 무인의 비무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마. 이것으로 너희들이 무엇을 배우려 하는 것인지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느끼길 바란다.”

엄중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황보휘.

그가 고개를 돌린다.

“강복, 부탁할게.”

“후후, 너랑 비무는 오랜만이구나.”

황보휘의 친우 제천회의 고강복이 앞으로 나선다.

그는 무당의 속가제자는 아니었지만, 호북성에서 만난 황보휘의 소중한 인연이었다.

무당파와 제천회의 비무.

평범한 백성들은 평생을 가도 구경할 수 없는 진짜 무림인들의 싸움. 그것을 관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가 흥분한 눈망울로 두 사람을 주목한다.

당연히 유일하게 흥분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무당 속가제자의 무공은 견식할 가치도 없지. 하지만··· 제천회 무공 초식의 형(形)은 기억해둘 가치가 있겠군.’

살수는 누가 표적을 살해했는지 숨겨야 한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이 다른 이들의 무공을 흉내내는 것이다.

무공의 초식을 많이 알면 알수록 유능한 살수라고 할 수 있다.

일류에 미치지 못하는 무인들의 비무에서도 황극린은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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