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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6화 (6/316)

기반을 쌓는다

보통 살수는 홀로 행동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표적을 노리고 살행을 나설 땐, 혼자 임무에 투입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전에 작전을 수립하고, 표적의 정보를 모을 땐 정보원들의 도움을 받는다. 하오문이나 개방 등, 비교적 수월하게 정보를 취급할 수 있는 길이 있긴 했지만··· 그런 방식으로 정보를 캐내다 보면 표적 또한 자신이 노려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수도 있다.

정보단체들은 신의나 의리 따위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대부분 돈으로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언제든지 살수 단체와 연을 끊고, 새로이 알게 된 정보를 표적에게 팔아넘길 수도 있었다. 그런 가능성을 차단코자 흑살문과 같은 규모가 있는 살수 문파는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해놓았다.

그리고 살행을 하는 살수들의 조력자는 정보원들만 있는 게 아니다.

높은 등급의 살수들이 기본적인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가치료는 한계가 있다. 곧 죽을 정도로 출혈이 심한데 스스로 치료할 정신은 없으리라. 그렇기에 중원 곳곳에 흑살문과 연계된 비밀 의방이 있었다.

그리고 살수들이 필요한 자금을 융통할 수 있게 돈을 지급해주는 비밀 전장도 존재했으며, 그들이 쉴 수 있게끔 마련된 휴식처도 존재했다. 그렇게 확실한 체계가 있었기에 흑살문은 무림에서 최고의 살수 단체라 불렸다.

황극린이 직접 나서서 행동하지 않은 것은 아직 황씨가문에서 나가 활동할 정도는 아니었기도 했으며, 비 노인을 그러한 ‘조력자’가 될 수 있을지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물론, 조력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이제까지의 도움은 수 배로 보답할 것이다.

“상태가 제법 좋군.”

비 노인이 약재의 품질을 검수하는 일을 한다고 했던가?

황극린이 보기에도 그가 가져다준 행낭 속의 약재들은 확실히 품질이 좋았다.

단산과 울금 그리고 삼지구엽초와 야관문.

이 약재들은 약재방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이었지만, 이것들을 정확한 비율로 환약을 제조한다면 탁월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쓱, 쓱, 쓱.

조심스레 과도를 움직인다.

과거였다면 눈으로 보지도 않고 잘라냈을 테지만, 지금의 황극린은 과거와 다르다.

정신과 육체의 괴리라고 할까?

특급 살수의 자리에 거의 근접했던 그의 육신은 무림인의 경지로 따져도 부족하지 않았다. 살수들이 암습만 특화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살행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여러 무공을 익힌다.

보법, 권법, 장법, 수법, 심법 등 여러 가지를 폭넓게 익히고 있다.

다룰 수 있는 병기의 종류도 대단히 많았다.

당연히 재능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몸에 익으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황극린은 지금 과도를 다루면서, 몸이 적응할 수 있게끔 ‘수련’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급할 필요는 없다.’

당연히 답답한 부분은 있다.

과거엔 일 다경이 지나기도 전에 약재들을 정확히 잘라냈을 테지만, 지금은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집중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황극린은 열중했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

약재의 손질이 모두 끝났다.

- 음머어어~

누렁이가 흐뭇한 눈으로 울음소리를 냈다.

집중할 땐, 전혀 소리를 내지 않더니··· 기특한 녀석이었다.

“착하구나. 상을 주마.”

여물을 누렁이의 앞에 갖다 주곤 이마 춤에 맺힌 땀을 닦는다.

‘이건 이제 이틀 동안 말리면 되겠군.’

햇볕에 말리는 것이 아니라 그늘에서 이틀 동안 말려야 했다. 어차피 우사라는 좋은 보금자리가 있었기에 황극린은 구석진 곳에 볏짚으로 시선을 가리고 약재를 넓게 퍼트려놓았다.

몇몇 정파인들이나 자긍심이 높은 무인들은 돈에 집착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무인이라면 응당 무(武)의 정진에 매진하고, 다른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나, 황극린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순 없겠지만, 돈이 있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선택의 폭이 달라진다. 그는 이제까지 타인의 명령을 받으며 살아왔다. 황씨가문에선 노예 취급을 당했으며, 그곳에서 나와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지만, 결국 살수가 되어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만약 흑살문의 명에 반항했다면, 혈고독은 그의 심장을 파먹었을 것이다.

돈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은 황극린이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다.

다만, 돈이 없어서 선택을 강요받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이 환약은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수단일 뿐이다.

대충 정리를 끝낸 황극린은 평평하게 깔린 볏짚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침 일찍부터 깨어나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하루의 마무리는 유령의 무공인 무조건 무영심결로 마무리를 해야 한다.

스으으···.

단전은 만들지 않았건만, 외부의 기(氣)들이 흘러들어와 세맥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세맥 곳곳에 쌓여있던 불순물들이 조금씩 부서지고, 갈라진다.

* * *

“그래, 어떻게 됐냐?”

“예에, 제가 누굽니까? 몇 번 손봐주니까 눈물을 줄줄 흘리더라니까요? 그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하하하하!”

왠지 모르게 흥분한 듯한 주서웅의 말에 황씨가문의 둘째 아들 황일문의 시종 고당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황극린을 감시하라는 말은 알게 모르게 괴롭히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황극린은 황씨가문의 죄인인 황용철의 아들이다. 고당도 정확히 그가 어떤 죄를 지었는진 알 수 없었지만, 가문의 높으신 분들 또한 황극린이 고통받길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은 정리되어 금황상가의 주인이자 황씨가문의 가주인 황천옹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고당은 둘째 도련님의 시종이라는 자리에 안주할 생각이 없었으며, 언젠간 금황상가에서 적당한 자리를 하나 차지하는 게 꿈이었다. 이런 작은 일들을 잘 처리하다 보면 분명히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다.

“그래도 혹시 이상한 점 있으면 무조건 보고 해. 둘째 도련님이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신다. 뭔가 사람이 달라졌다나? 넌 보니까 어때?”

고당의 말에 주서웅이 멈칫한다.

순간 고당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뇌리에 떠오르는 황극린의 그 무시무시한 눈동자를 떠올리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악을 쓰며 반항하는 놈보다 언제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놈이 더 무서운 법이다.

주서웅은 절대 죽고 싶지 않았다.

“그, 글쎄요? 달라진 거요? 그런 건 없는 것 같던데···.”

고당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서웅을 바라본다.

“정말이지?”

“예, 당연하죠! 제가 어젯밤에도 죽도록 패버렸다니까요?”

고당은 주서웅의 더러운 성격을 알고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머리도 꽤 돌아가고 주먹도 쓸 줄 알았다. 과거의 자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 알겠다. 이상한 점이 있으면 나한테 바로 말해.”

“예, 고 형.”

고당이 떠나간다.

어쩌면 극적으로 변화한 황극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언젠간 황극린이 달라졌다는 걸 저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황극린의 변화를 알아챘다느니 고백해보았자 매만 벌 뿐이다.

“후우우우···. 어쩌다 이 주서웅이 이렇게 됐냐···.”

주서웅은 축 처진 어깨로 고당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허허허, 이게 네가 만든 약인 게냐?”

“예, 그렇습니다.”

검붉은 색의 작은 환약. 왜인지 묘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이게 무슨 효과가 있는 환약일까?

“이건···.”

황극린은 말을 하려다 현재 나이를 상기했다. 이제 그는 14살의 어린 소년에 불과하다. 그런 자신이 예순이 된 노인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약의 효능을 말해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제조법을 죽은 아버지한테 배웠다고 말해놓았으니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이다.

“이건··· 사내의 밤일에 좋은 환약입니다.”

“음?”

두 눈을 끔뻑끔뻑 뜨는 비 노인.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밤 일이라니, 설마?

“쿨럭! 뭐, 뭐에 쓰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야심한 밤, 자신감이 하락하여 고개를 숙인 남자가 있다면 이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이것이 말이더냐?”

“예.”

“···.”

“그게 정말인 게냐?”

“비 노야께서 한번 약효가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내, 내가 말이냐? 큼큼! 크으음!”

비 노인은 나이에 비해 꽤 건장하다고 할 수 있었다. 사내란 노인이 되어서도 성욕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수컷의 본능이다. 비 노인은 긴가민가한 눈으로 그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거기다 이제 막 세상을 배울 나이인 황극린의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단순히 정력만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매일 아침이나 자기 전에 복용한다면 만성적인 피로를 줄여주고 몸에 활력을 북돋아 줄 겁니다.”

“그래···?”

듣다 보니 비 노인이 고개를 갸웃한다.

밤일에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땐, 당황하긴 했었지만··· 실상 이 환약의 효과가 있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황극린이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한 것이라 적극적으로 응원해주고 있지만, 그 또한 평생을 약재를 다뤄왔었다.

“물론, 너무 큰 기대를 하시면 안 됩니다. 이건 보조적인 환약일 뿐이고, 분명 부작용도 있습니다. 만약 부작용이 나타나면 당장 복용을 중단해야 합니다.”

확실히 환약의 무게와 모양이 일정하고, 부서진 곳이 없는 것을 보니 완성도가 높다고 하겠지만, 환약은 번지르르한 외관보다 효능이 중요한 법이었다. 황극린이 가져오라고 했던 약재들은 그리 비싼 것들이 아니었고, 의방에서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린 황극린이 상처받지 않게끔 비 노인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구나. 일단 이 할애비가 먼저 복용해보도록 하마.”

“예, 감사합니다. 참, 만약 약재상을 통해 유통하게 된다면··· 그리 많은 수량을 풀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가격은 열 알에 은자 한 냥입니다.”

“은자 한 냥? 큼큼, 그래. 일단 이 할애비가 아는 약재방을 통해 팔아보도록 하마.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무 기대하진 말거라.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큰 법이란다.”

“예, 감사합니다.”

비 노인은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잘 하지 못한다.

물론, 약재를 검수하는 일을 하다 보니 이런 부분에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성향이긴 했지만 어린 황극린에게 모진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세상의 일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황극린이 이번 일을 통해 교훈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약재를 다루는 것을 알려줘도 괜찮겠어. 손재주는 확실히 뛰어난 것 같구나.’

행낭에 든 환약을 살펴보던 비 노인이 속으로 다짐을 했다.

당연히 황극린은 그럴 생각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그럼 전 마당을 쓸러 가보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한 황극린이 떠나가려고 할 때.

비 노인이 황급히 그를 불러세운다.

“참, 극린아···!”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 그의 표정엔 미안함과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 그를 응시하는 황극린의 표정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지만, 내심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황극린을 보며,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비 노인.

오랜 고민 끝에 어차피 알게 될 것이라면 자신이 알려주는 게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첫째 도련님이··· 이틀 뒤면 도착하실 거 같다는구나···.”

황씨가문의 첫째.

그는 대 금황상가를 이어갈 장남이었으며.

“무당에서 수련을 마쳤나 보군요.”

무당파의 속가제자였다.

더 중요한 건, 조금 어리숙하게 황극린을 괴롭혀왔던 둘째 황일문과는 다르게 잔인하고 계획적으로 황극린을 괴롭히는 데 도가 텄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둘째처럼 대놓고 그를 핍박하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스스로 좌절감을 느끼게끔, 모든 것을 포기하게끔 만든다.

더군다나 무당에서 무공까지 배워왔으니··· 그 괴롭힘의 강도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비 노인도 그가 어떤 방식으로 황극린을 괴롭힐지 알 수 없었다.

비 노인은 가슴이 답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황극린을 데리고 황씨가문을 나가고 싶었다. 허나, 그에겐 사정이 있었다. 황씨가문에 머무를 사정이 말이다. 그를 도울 방법이 없었기에 무력감을 어깨를 짓누른다.

그런 비 노인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괜찮습니다. 그 유명한 무당파에서 무공을 배웠으니,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당파는 무공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다루는 법도 가르친다 하지 않은가? 무당의 도인들은 모두 성품이 어질다고 정평이 나 있다.

“정말 그러했으면 좋겠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황극린은 평생 황씨가문에 머무를 생각이 없다.

무당파에서 무공을 익힌 장남 황보휘의 귀환.

그건 과거의 선택을 또 한번 뒤집을 기회 중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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