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3화 (3/316)

현실적응

꿈을 꾸었다.

나를 죽인 여인이 독기를 품은 눈으로 창천검을 겨누고 있다. 무섭진 않다. 다만, 그녀에겐 미안함이 따를 뿐이다. 천하칠대고수 중 하나인 창천뇌검을 죽일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도움이 컸다. 살수는 목표를 죽이기 위해 모든 가용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그녀는 하나의 패였다.

창천뇌검을 죽일 최적의 패.

“지옥에나 떨어져라.”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돈다.

동시에.

하늘이 갈라지고, 그 틈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대지를 강타했다.

콰아아아-!

207호는 정신을 잃었다.

* * *

깨어났다.

- 음머어어~

누렁이의 서글픈 울음소리와 어린 소년들의 비웃음이 귓가에 들려온다. 207호는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들었다. 왜인지 그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어쭈? 웃어?”

어젯밤엔 왠지 모를 불길함에 도망쳤던 황일문. 그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이제 갓 성인이 된 듯한 청년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는데, 그는 황일문의 시종 고당이었다. 황일문과 함께 207호 아니, 황극린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인물이다.

‘정말 현실이구나.’

몇 번에 걸친 검증을 완벽히 통과했다.

황극린은 잠을 청했으며 꿈을 꾸었고, 잠에서 깨어났다.

두 사람의 행패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이곳이 현실이라는 완전한 확신이 들어 미소가 새어 나온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수의 삶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살수의 삶을 후회했었다. 그렇기에 꿈에서 ‘그녀’가 나왔겠지.

아무튼, 이제 황극린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왜! 어쩌게?”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치는 황일문.

그의 시종 고당이 팔짱을 풀고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황극린의 다음 행동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늦게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깨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뭐···?”

황극린은 깊게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황일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황씨가문에서 노예처럼 부려먹고 있긴 했지만, 썩 마음에 드는 성정은 아니었다. 음침한 표정과 눈빛. 정중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 괴롭히기 좋았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황극린은 어젯밤 연못에서 만난 것과는 또 달랐다.

그는 너무도 정중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큼큼···!”

예상치 못한 사과를 받자 황일문이 눈동자를 굴려 시종 고당을 바라본다. 시종이긴 하지만 그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삶의 경험이 많았다. 하지만 고당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버릇없는 꼬마를 교육하려고 했는데, 이토록 저자세로 나올 줄은 몰랐다.

“얼른 우사를 치우고 장원도 쓸어!”

딱히 할 말이 없던 고당이 짐짓 분노한 척 외친다.

그것을 들은 황일문도 동감한다는 듯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 당장 청소를 하겠습니다.”

“···그, 그럼 나갈까? 냄새가 너무 역한데.”

“예에···. 그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격한 반응을 보이면 몽둥이질을 할까도 생각했다.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니 두 사람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사를 빠져나가던 황일문이 빽 외친다. 뭔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너! 내가 지켜본다? 그리고 형님이 수련을 마치고 오시면 바로 어젯밤 일을 다 말할 거야!”

“예, 죄송합니다.”

“각오하라고!”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잠깐의 소동이 끝나고 황일문과 고당이 우사에서 빠져나간다. 뒤에선 음메, 하는 소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마치 괜찮냐고 묻는 듯하다.

“괜찮아. 아니, 너무 좋군.”

그가 저자세로 나간 것은 살수의 생존 방식 때문이었다.

혹자는 살수를 신념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고집불통으로 생각하곤 한다. 사실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살행을 위해서라면 ‘가면’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살수였다. 다른 인물의 얼굴로 위장하여, 그를 연기한다. 상대가 방심하면 그때서야 본색을 드러내고 검을 심장에 찌른다.

그렇기에 살수는 중원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절호의 기회를 엿보는 종자들이었으니까. 틈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와 심장에 검을 박아넣는다.

살수도 사람이니만큼 물벼락을 맞고 깨어나면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지금 화내는 것은 오히려 화만 부른다는 것을 황극린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현실에 적응하여 기회를 엿봐야 할 때이다.

‘황씨가문은 금황상가(金皇商家)를 운영하고 있지.’

자신이 황씨가문에서 미움을 받은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른이 되었던 그는 이해하고 있다. 지금 그의 육신은 지옥 같은 살수의 훈련을 받은 강인한 육신이 아니다. 강호로 나아간다면 조금 더 자유로울 순 있겠으나 기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목숨을 위협할 변수들이 너무도 많았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최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첫 시작은 황씨가문이다.

이곳에서 기반을 닦아야 한다. 노예처럼 부려먹는 곳이니만큼 힘들긴 하겠지만, 적어도 목숨을 잃진 않으리라. 또,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었으니까.

‘이번에 죽으면 완전히 끝이겠지.’

운이 좋았다.

그 이외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과거로의 귀환이다. 이번에 죽으면 인형혈삼이고 뭐고 완전히 끝이리라. 207호는 그러한 행운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많이도 싸놨구나.’

역겨운 배변물 냄새.

인상을 찌푸릴 법도 하건만 황극린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치우기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뇌수와 장기 등을 수없이도 많이 보았던···.

혈귀였다.

* * *

“그놈, 뭔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흐음···.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 고당, 네가 애들을 시켜서 좀 감시해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닌지. 저놈은 분명히 우리 가문을 말아먹으려 할 거야.”

가문을 말아먹을 것이다.

황씨가문의 가주이자 금황상가의 주인인 황천옹이 매번 하는 말이었다. 그 대상은 황극린이 아니었다. 그의 아비인 황용철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황일문은 가주의 행동을 보고 따라 하는 것에 불과했다.

“예, 알겠습니다.”

잠시 더러운 우사를 바라보던 황일문.

그는 콧김을 흥, 내뿜으며 몸을 돌렸다.

* * *

“저놈을 감시하라고 했다고?”

“응. 뭐, 수상한 짓 하면 바로 고 형한테 보고하라는데?”

“쯧, 또 둘째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야.”

제 몸보다 큰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고 있는 황극린. 그를 보며 어린 시종들이 속닥거린다. 황씨가문에 밥을 빌어먹고 사는 식솔들의 자식들이다.

강호에서 누군가의 밑에서 밥을 빌어먹고 산다는 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칼 든 강도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황씨가문의 버팀목이 있다면 적어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황씨가문에 충성한다.

황극린은 황씨가문의 피가 이어져 있긴 하지만, 황씨가문은 그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판 처음 보는 남에게 더 잘해주리라. 현재 황극린의 위치는 황씨가문의 시종들보다 더 낮다고 할 수 있었다.

“심심한데 장난이나 칠까?”

“감시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에이, 넌 둘째 도련님을 모르냐? 괴롭혀주라는 거잖아.”

“그런가?”

“그래, 아마 잘 했다고 칭찬받을걸? 어쩌면 상으로 은자를 내려주실 수도 있어.”

“오···.”

또래 중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한 소년 주서웅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황극린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기껏 쓸어서 모아놓은 쓰레기를 툭툭 건들었다. 열심히 빗자루를 놀리고 있던 황극린이 고개를 돌린다.

“뭘 봐? 이 새끼야.”

다짜고짜 손을 휘두르는 소년.

당연히 그 우스운 공격에 당할 황극린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귀를 쫑긋 열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이미 행동할 준비를 마쳤다.

휘익!

꽤 힘을 실었던 모양인지 바람 가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반동을 이용해서 황극린의 뺨을 후려버리려 했던 모양이다. 당연히 주서웅의 손바닥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피하는 동시에 황극린은 살짝 다리를 내밀어 그가 중심을 잃도록 했다.

콰당!

주서웅이 볼품없게 바닥에 넘어졌다. 어찌나 세게 넘어졌던지 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매우 컸다. 멀찍이 서서 시시덕거리던 어린 시종들이 달려온다.

“서웅아!”

“괜찮아?”

“캐흑···! 씨이바알!”

자신이 화가 났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말투. 참으로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는 당장 일어서지 못했다. 넘어지면서 잘못 부딪힌 것인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다.

그런 주서웅을 바라보던 황극린.

조용히 시종들의 얼굴을 눈에 담는다.

‘기억에 없군.’

이런 시종들의 얼굴까지 기억할 정도로 그의 기억력이 좋은 건 아니다. 단지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이러했다는 것만 깨닫고 있을 뿐.

“죽고 싶어? 감히 서웅이를 때려?”

아이들이 황극린을 둘러싼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듯이 씩씩대는 모습이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연약한 육체이긴 하지만 저런 아이들에게 질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이런 싸움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요령으로 하는 것이다. 저들은 무공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 일각의 시간만 주어져도 황극린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소년들을 모두 제압하거나 죽일 수 있으리라. 솔직히 죽이는 게 더 쉬웠다. 급소만 노리면 되니까.

다만, 황극린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그럴 필요가 없다.

“내일 손님이 오신다고 하지 않았나? 청소하지 않고 이렇게 놀고 있으면 시종장님이 뭐라고 하려나.”

“···!”

“나야 뭐 매번 혼나니까 크게 상관없지만···.”

황극린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주서웅을 향한다.

아무리 성격이 못났더라도 아이들을 아이들일 뿐. 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인물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시종장 여명회. 그의 이름을 팔아넘기면 아이들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리라.

때마침 뒤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렸다.

“이놈드으을-!”

“헙!”

“마귀할아범이야!”

“가, 가자. 서웅아!”

아이들이 쓰러진 주서웅을 부축하여 우르르 도망친다.

황극린은 기껏 쓸어놓은 바닥이 다시 더러워진 것에 한숨을 토해낸다.

“후우.”

“괜찮으냐···? 다친 곳은 없고?”

이제 막 예순이 되었을 법한 노인. 그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비 노인이라 불렸던 것은 기억한다. 그는 황씨가문에서 유일하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인물이다.

“매번 있는 일이니까요.”

“···.”

슬픈 눈동자로 황극린을 바라보는 비 노인.

그는 황극린이 황씨가문에 머물 적, 유일하게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었다. 황극린에게 잘해준다면 윗분들의 눈 밖에 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당시 황극린은 그의 도움을 극구 거부했었다. 어린아이였지만, 꼴에 자존심이 있었다고나 할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오늘도 제대로 못 먹었지···? 이거라도 얼른 가져가거라.”

비 노인은 황극린에게 몇 번이고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수없이 많이 거절했음에도 이렇듯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아마 받지 않는다면 황극린의 보금자리인 우사에 몰래 가져다 놓겠지. 어린 황극린은 그마저도 모두 거부했었다. 홀쭉하게 들어간 양 볼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번에도 비 노인은 이 딱하고 안쓰러운 아이가 도움의 손길을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과거가 생각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아는 누군가가 생각나기 때문일까?

도움을 주는 것은 비 노인이었지만 오히려 그가 을의 자세로 나왔다. 제발 받아주었으면 하는 표정. 그것이 소원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

“감사합니다.”

비 노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주먹밥이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네, 네가 가져간 것이냐?”

“예,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허, 허허···.”

비 노인이 감격한 듯 눈시울을 붉힌다.

“그래, 잘 생각했다. 먹어야 힘이 나는 게야. 그래야 이 거지 같은 곳에서도 버틸 수 있어. 정말 잘 생각했다. 장하다. 장해···. 언제든 이 할애비의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거라. 응? 알겠지···?”

도움을 받는 것은 황극린이었다.

그런데 비 노인은 자신이 구원이라도 받았다는 듯 행동한다. 오랜 살수 생활로 감정이 무뎌진 그였지만, 죽음을 겪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린 소년의 몸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런 노인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누가 볼 수도 있으니···.”

“어이쿠, 그렇구나. 이 할애비는 이만 가마.”

황극린은 떠나가는 비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동시에 소매 속에 감춘 식은 주먹밥을 매만졌다.

‘은혜는 몇 배로 돌려주겠소.’

살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약조를 지킨다.

설령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물우물.

소매 속에 감춰둔 주먹밥을 조금 떼어 입으로 가져간다.

이곳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면서 현실이다.

과거의 선택들을 하나씩 뒤집으며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

207호는 오늘 과거엔 생각지도 못한 선택을 했다.

혈귀의 삶은 여기서부터 크게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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