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화 (2/316)

현실자각

“···.”

207호는 당황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시의 시선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의 소 한 마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가 핥은 머리가 찝찝했지만, 그것을 신경 쓸 때는 아니었다.

‘똑같다.’

5장 정도의 넓이의 우사(牛舍).

기분 나쁜 악취가 코를 자극했지만, 살수의 훈련을 받은 207호에겐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그가 눈여겨보는 것은 우사 내부가 지나치게 익숙하다는 것이다. 소를 키우는 우사라면 그 형태가 비슷비슷할 테지만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래전 과거.

깊숙한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백목검···.’

짚더미 아래에 감춰둔 목검은 사실 적당한 나무 막대기에 끝부분만 뾰족했다. 또, 미숙하게 목검에 글귀를 새겨놓은 것도 똑같았다. 이것은 어린 시절의 207호가 만든 첫 번째 목검이었다. 우연히 마주한 무림인을 보고 동경심에 만든 것이다. 사실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부끄럽긴 하지만 말이다.

백목검이라는 이름을 붙여줬으니만큼 어린 시절의 207호에겐 꽤 소중한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살수가 되어 인간의 감정을 대부분 잃어버렸다고 해도 묘한 감정이 인다.

아니.

무언가 다른 감정이···.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군.’

심호흡하며 감정을 추스른다.

쉬이 제어되지 않았지만, 조금씩 심장의 박동이 줄어들었다.

“음머어~”

뒤를 돌아보자 초롱초롱한 눈빛의 소 한 마리가 207호를 마주하고 있다.

“누렁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연 207호.

그것에 화답하듯 누렁이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낸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기껏 가라앉힌 심장이 다시금 흥분하려 한다.

207호는 천천히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귀를 대고 바깥의 기척을 살핀다. 딱히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끼이···.

최대한 섬세하게 힘을 조절하여 문을 연다. 문틈 사이로 바깥을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것은···.

‘대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기억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제법 넓은 장원 중앙에 있는 정자. 그나마 꽤 공을 들인 연못이 달빛을 받아 운치를 더하고 있다.

근처엔 감시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207호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어딜 가냐는 듯 뒤에서 소가 울음소리를 내었지만 그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황씨가문.’

207호가 207호라는 이름을 받기 전.

그는 먼 친척의 가문에 살았었다.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다. 그가 평범한 방이 아니라 우사에서 깨어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황씨가문은 그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노비처럼 살게 했다. 솔직히 노비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깊숙한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광경.

현실에서 그것과 마주하자 아무리 흑살문의 최상급 살수였던 207호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분명히 심장이 꿰뚫려 죽었었다.

‘꿈? 아니면 이것이 내세(來世)인가?’

207호는 바로 자신의 볼과 허벅지 등을 강하게 꼬집었다.

피부가 빨갛게 부풀 때까지 감각을 확인한다. 꿈이었다면 이런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

몇 번의 확인 끝에 이곳에 현실과 다를 것 없는 세상인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른 의문도 생겨났다.

‘몸이 다르다.’

살수는 보통 날렵한 몸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해도 근육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살수들이 상대하는 것은 대부분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다. 정면대결을 선호하지 않더라도 그들과 맞서 싸울 수준으로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의 신체는 근육이 거의 없었다.

배는 등에 붙을 정도로 홀쭉했으며, 피부는 몹시도 건조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손가락이 짧다.’

이건 성인의 몸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어떤 상황에도 적응할 수 있도록 지옥 같은 수련을 견뎌낸 207호였지만, 이런 상황에 태연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할 뿐.

‘그걸 확인해야 한다.’

207호가 연못 근처로 달려간다.

비록 밤이었지만 달빛이 밝고, 몇몇 등불이 있었기에 연못에 비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 그가 확인해야 할 것은···.

“···!”

연못을 들여다본 207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게 말이 되는가?

지금 연못에 비치는 모습은···.

어릴 적의 207호였다.

‘꿈은 아니다.’

몸의 감각이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은 현실이라고.

그렇게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 하고 있을 때였다.

뚜벅뚜벅.

숨을 잔뜩 죽였지만 누군가가 그의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207호는 당황하지 않고 눈을 사방으로 굴린다. 그는 권법이나 장법 등을 익혔지만 지금은 과거의 몸이다. 제대로 식사하지 못해 근력이 몹시 부족하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근처에 뾰족한 돌멩이가 있었다. 연못을 바라보는 척하며 207호가 그것을 잽싸게 손에 쥐었다. 긴장할 법도 하건만 전혀 긴장되지 않는다. 살수는 누군가에게 죽음을 내리는 사신(死神)이다. 설사 자기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했더라도 긴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훈련받았으며 그리 살아왔다.

잔뜩 숨죽인 발소리가 거의 지척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허업!”

207호는 낮은 자세로 신형을 돌렸다.

깜짝 놀란 눈동자가 보인다. 몰래 다가온 것은 분명히 눈앞의 소년이었음에도 207호의 재빠른 대처에 놀란 것이다. 소년의 두 손은 앞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마치 207호를 물에 빠트리려고 했던 것처럼.

짧은 순간, 그는 판단했다.

뾰족한 돌멩이로 급소를 찌르면 불구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심할 경우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었다. 207호가 보기엔 눈앞의 소년은 빈틈투성이였다.

‘황일문.’

잊어버렸던 과거의 기억은 추억의 장소에서 새록새록 솟아난다.

소년의 이름을 깨달은 즉시 207호는 살의를 거두었다.

지금 상황을 명확히 인지할 수 없었지만, 소년의 몸으로 그를 죽인다면 뒷감당을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이 꿈이라 해도 잘못된 판단을 할 순 없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으니까.

“으아악-!”

207호는 돌멩이로 소년의 급소를 치지 않았다.

단지, 한 발짝 옆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풍덩!

연못에 빠진 황일문이 금세 얼굴을 내밀고 두 손을 휘젓는다. 수면이 그리 깊어 보이진 않았지만, 소년의 작은 키로는 땅에 다리가 닿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빠질 줄 몰랐다면 당황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 살려줘! 극린!”

“극린···.”

그 이름으로 207호는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혈귀, 207호 창천뇌검 살해자.

수많은 수식어가 있었지만 ‘극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땐, 피에 물들어있진 않았었다. 그렇기에 더욱 특별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닐지는 몰라도 그나마 추억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있었다.

“사, 살려달라고! 미안! 내가 미안해애애!”

황일문은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솔직히 저렇게 소리 지를 정신으로 조금만 수영하면 땅에 닿을 수 있을 테지만, 그런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특별한 상황과 조우할 때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습관이 있다면 저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207호는 그를 구해주기로 했다.

꽤 튼튼해 보이는 막대기를 그에게 내민다.

연못에 빠져 허우적대기만 하던 황일문은 생명줄이 내려오자 그것에 집착했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막대기에 손을 뻗었으며, 결국 그것을 잡아챌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207호의 근력이 모자랐을 뿐.

“당기라고! 이 노예 새끼야!”

조금 전 만 해도 극린이라며 친히 이름까지 불러준 황일문이었지만, 막대기가 생기자 행동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당연히 207호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노예라는 단어로는 그를 자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황일문이 겨우 연못에서 빠져나왔다.

“허어억···! 허어억···!”

볼썽사납게 엎드린 채로 숨을 허덕이는 황일문.

207호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다 황일문이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홱 든다. 그의 눈빛은 살인이라도 할 것처럼 독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소년일 뿐이었으며, 살수의 기억을 품고 있는 207호에겐 이제 막 젖을 뗀 강아지가 노려보는 것처럼 가소로울 뿐이었다.

“감히 네가 날 밀어?”

황일문이 벌떡 일어서서 207호의 멱살을 잡는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어엉!”

207호의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고 흔들리기만 하던 207호가 반응한 것은 황일문의 입에서 또 다른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이었다.

“네 아비처럼 만들어줄··· 흐읍···!”

207호는 아비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허약하고 허약한 육체가 앞뒤로 흔들려 어지러움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에 흔들리며 그는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자각했다. 이토록 생생한 것이 현실이 아니라면, 그가 ‘과거’라 생각하는 모든 것들도 현실이라 말할 수 있을까?

“뭐, 뭐야? 네가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응? 날 죽이기라도··· 할···.”

꿀꺽.

황일문의 시선이 207호가 왼손에 쥔 돌멩이에 손이 갔다.

‘서, 설마 저걸로 날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의 우려와는 달리 극린은 돌멩이를 휘두르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은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꼬맹이를 죽이는 것은 더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또한, 그가 살수였다고 해서 아무나 막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진 그를 죽일 이유가 없었다.

다만···.

“한 마디만 더하면 그럴 수도 있지.”

“···!”

황일문은 자신이 겁먹었다는 걸 숨기기 위해 막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207호의 눈빛에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때리면 맞기만 하던 황극린이었지만, 지금은 무언가가 달라졌다. 정확히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말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에, 에잇! 비켜!”

황일문이 207호를 밀치곤 거리를 벌렸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고 생각한 그가 외친다.

“오늘 일은 형님한테 말할 테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걸?”

“···.”

떠나가는 황일문을 바라보는 207호.

당연히 그의 협박에 겁먹거나 한 눈빛은 아니었다. 단지···.

‘황일문···. 그래, 생각나는군.’

과거를 돌이켜본다.

황씨가문의 둘째로 어릴 적 207호를 많이도 괴롭혔었다. 당시엔 심적으로 괴로웠던 기억이 있었지만, 흑살문에서 받은 살수 훈련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귀찮은 정도라 할까? 물론, 막상 괴롭힘이 시작되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과거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결과가 있다면 원인이 있다.

황일문과의 드잡이질로 207호는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는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207호가 아랫배를 쓰다듬는다. 창천뇌검과의 싸움에서 깨져버린 단전.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었다.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했던 그 영약도 당시엔 별 효과가 없었다.

다만, 창천검에 심장이 꿰뚫리기 전에는 분명히···.

‘인형혈삼(人形血蔘).’

그것이 만들어낸 기적일까?

확실하진 않았지만, 심장이 꿰뚫리는 순간 용솟음치는 내력을 분명히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완벽히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그 영약이 발견되지 않았을 때군. 당장 그곳으로 가보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이 유약한 몸으로 그것을 찾아 나섰다간 죽기 십상이었다. 살수가 생존하려면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지금의 207호는 무공도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렇군. 난 지금 어린아이다.’

순간 머리를 관통하는 깨달음.

지금 이곳은 현실이다. 무공도 배우지 않았으며, 심장에 똬리를 튼 혈고독도 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새로운 시작.

그의 삶은 새롭게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과거 207호는 늦은 나이에 무공에 입문하여 흑살문의 특급 살수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출중했다. 지금부터 무공을 익힌다면 적어도 과거보다는 1년 이상 빠르게 무공에 입문할 수 있다. 고작해야 1년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었다.

겉모습은 어린아이일지 모르겠으나 그의 본질은 ‘혈귀’라는 별호를 가졌던 살수였다. 수많은 살행을 성공시키고, 늦은 나이에 무(武)에 입문하여 흑살문 특급 살수가 될 뻔했던 경험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연륜(年輪).

그것은 1년의 차이를 10년 이상으로 늘릴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으리라.

‘일단···.’

207호 아니, 황극린이 걸음을 옮긴다.

그가 향하는 곳은 잠에서 깨어났던 우사였다.

‘자야겠군.’

훈련받지 않은 연약한 육신.

자야 할 시간에 깨어 있었으니 피곤한 것은 당연하다. 살수의 기본 덕목 중 하나는 몸을 아끼는 것이다. 중요한 순간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당연히 이번 삶에서는 상급자의 명령만 받다가 죽는 살수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살수의 원칙은 분명히 무인에겐 도움이 된다.

그렇기에 그는 잠을 청하러 갔다.

내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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