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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1화 (1/316)

혈귀귀환 ⓒ한야월

서장

창천뇌검(蒼天雷劍) 살해자.

207호.

혈귀(血鬼).

모두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였다. 가장 많이 불렸던 것은 207호라는 숫자로 된 이름이다. 그는 나이 열다섯에 중원 최악의 살수 단체인 흑살문에 끌려가 살수로 키워졌다. 무공에 입문하는 나이로는 늦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는 무(武)에 재능이 있었다. 200번 대에서 그는 최고였으며 한 자리 숫자의 살수들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시작이 빨랐다면 그는 흑살문에서도 세 명만 도달할 수 있다는 특급 살수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 창천뇌검과의 싸움이 없었다면 분명히 가능했으리라.

천하칠대고수 중 하나인 창천뇌검 암살 임무는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컸으며, 실패한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흑살문에서도 도박이라 여겨지던 작전이다. 그것을 성공한 것이 바로 207호였다. 다만, 그 싸움에서 단전을 잃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잡히지 않으리라 생각했나?”

울림처럼 들리는 목소리.

흐릿한 시선에 한 인영의 흔들림이 보인다. 제대로 볼 순 없지만, 여인의 눈가에 살기가 깃들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흑살문에서도 널 버렸다는 말이다.”

여인의 목소리에서 경멸이 잔뜩 묻어났다.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창천뇌검과의 싸움이 없었다면 그는 특급에 올랐을 수도 있다. 흑살문에서도 특급의 살수는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는다. 이제까지처럼 심장에 똬리를 튼 혈고독(血蠱毒)으로 협박당하지도 않으며, 원하는 의뢰만 받아도 된다. 특급의 살수는 흑살문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이었다.

207호는 결국 특급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택하는 건 본능이다. 흑살문의 살수들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게 훈련받지만,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가지는 것이 많아진다. 그들은 이제 쓸모가 없어진 207호를 제물로 주었다.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씁쓸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207호는 그것을 부정하거나 하진 않는다.

“네놈은···.”

“죽여라.”

207호의 말에 여인의 흐릿한 형체가 멈칫했다.

“살고 싶지 않나?”

“···.”

당연히 살고 싶었다.

생존의 본능은 생명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것. 살수라고 하여도 그것에 완전히 초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살기 위해서 깨진 단전을 치료하려 했었으며, 여러 겹의 포위를 뚫고 여기까지 도달했다. 결국, 눈앞의 여인에게 붙잡히긴 했지만 말이다.

207호는 자신이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내공은 없었으며,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독에 중독되어 눈도 흐릿하여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도 없는 상태다. 내공이라도 있었다면 독기를 몰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미안했다.”

“···.”

207호는 여인에게 사과한다.

멈춰있던 그녀가 움직인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발이 207호의 가슴을 짓누른다. 동시에 예리한 무언가가 그의 심장 부근에 닿았다. 그는 그 검이 무엇인지 안다. 창천검(蒼天劍). 이제는 여인이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 살려달라고 발악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야. 그렇게 추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여인.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내공이 깃들어 있지 않아도 그 예리함을 숨길 수 없는 창천검. 그것이 인간의 살점을 파고든다.

아릿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당연히 207호는 신음을 내지 않았다. 고통은 익숙했으니까.

“끝내라.”

여인의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었다.

마지막 순간, 과거의 기억 때문에 복수를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가문의 수치일 뿐이다.

‘이게 죽음인가···. 어색하군.’

혈귀라는 별호로 수많은 무인에게 공포를 각인시켰던 살수.

언젠간 특급의 살수가 되어 자유롭게 살고자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무림에서 쌓은 수많은 악연은 언젠간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으리라.

그래도 왜인지 아쉬움이 남는다.

삶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어떻게 살더라도 후회가 남는다. 후회가 남지 않는 삶이라는 게 있을까? 살수 또한 인간이기에 회한에 잠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는 과거를 돌이켜보았다.

살수가 되지 않았다면.

심장에 박힌 혈고독만 없었다면···.

과연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인간은 매 순간 선택하며 앞으로 달려간다. 무한히 많은 길로 나아가며 선택의 결과를 목도하며 살아간다. 이제껏 207호가 선택한 삶의 결말은 현재에 당도했다. 억지로 선택한 것도 있었지만 모두 변명에 불과하다.

‘왜 하필 지금···.’

삶이란 참 애꿎다.

단전이 깨지지 않았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단전을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특급’ 살수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지옥에나 떨어져라.”

경멸에 찬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이제껏 반응하지 않았던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오른다.

사람의 모양을 한 영초(靈草).

오색의 찬란함을 내뿜는 그것을 취한 뒤, 단전을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약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수오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효용을 보여주었었다.

얄궂게도 지금 단전에서 그 영약의 효과가 발휘되고 있다. 깨진 단전이 봉합되는 것이 느껴진다. 전신에 힘이 퍼져나간다.

‘어쩔 수 없나.’

왜 하필 지금 단전에서 내공이 솟아오르는지 알 수 없으나.

이미 여인의 창천검은 심장에 닿았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아무리 천혜의 영약의 효과가 있더라도 심장은 재생할 수 없을 터이니.

고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심장이 멈추면 생명도 멈춘다.

207호의 심장은 창천검에 꿰뚫렸다.

* * *

“···.”

뭔가 익숙한 향.

지독한 악취 같기도 하면서도 뭔가 정겨운 느낌을 준다. 그 냄새에 자연스레 눈이 뜨여진다.

그는 당장 일어서지 않고 살짝 뜬 눈으로 눈동자만 굴렸다.

함부로 몸을 일으키는 것은 미련한 선택이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오랜 살수 생활로 ‘몸’에 밴 습관···.

‘이상하다.’

마지막 기억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던 몸이다.

수많은 상처와 독(毒)에 제대로 운신하기조차 버거웠었다. 몸을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더라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뼈와 살에 전해지는 고통은 없었다. 그렇지만 자연스럽지도 않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듯한 느낌. 살수는 육신과 동화되어야 한다. 새끼발가락까지 감각을 동화하여 머리에서 내리는 명령을 당장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왠지 모를 어색함이 엄습해온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했다.

‘···.’

고민을 하면서도 주변의 기척을 감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진 않았다. 살짝 뜬 눈으로 어둠 속에 적응한다. 서서히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장소···.’

하지만 이 장소가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왜일까? 익숙하지만 어딘지는 기억이 안 나는···.

“음머어어~”

움찔!

207호의 몸이 굳어진다.

어두운 밤에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때, 저런 소리가 들려온다면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오랜 경험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게 다행일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 할짝.

“···!”

무언가가 207호의 머리를 핥았다.

그 순간 그는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말이다.

‘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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