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7화 (227/232)

새로운 경지

***

“과거 멸망한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離支)를 지내신 연개소문(淵蓋蘇文) 조사는 연씨 가문의 직계 조사님이다.”

“허!”

지금의 연씨 가문은 중원으로 넘어와 투항했던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淵男生)의 후손이라는 뜻이었다.

“연씨 가문의 대가 끊어질 일은 없겠지요?”

괜히 아쉬운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교주가 야광주에 의해 저 꼴이 되었으니 후손이 걱정된 탓이다.

“······.”

연만호가 답하지 않았지만, 호충은 그의 표정에서 작은 불안함을 읽을 수 있었다.

‘걱정하는 말을 건넸는데 어째서 불안함이 느껴진단 말인가?’

호충은 그의 표정을 통해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손자가 손을 남겨두었나 봅니다? 조금 전에 교주와 그 얘길 나누셨습니까? 증손자가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

“황실에 역모를 꾸미면 구족을 멸한다 하지만, 제가 눈을 감아드리면 누가 알겠습니까. 괜한 걱정은 내려놓으십시오.”

“···연씨 가문이 명맥을 이어나가도 되겠는가? 태자는 허락해주겠는가?”

“이미 교주와 마주했음에도 죽이지 않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연씨 가문의 후손까지 찾아가 말살할 잔인한 놈은 아니지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숨겨주시게. 태자는 우리 가문을 용인할지 몰라도 황궁에선 다를 수 있음이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약조 드리지요. 그나저나 비술은 언제 시작하실 생각인지?”

“······.”

연만호는 천마신교가 끝났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주를 향해 미세한 지풍을 날렸다.

투둑.

교주는 문지방에 걸쳐 있던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고절한 점혈법. 역시 무위가 대단하군.’

“혹여 녀석이 비술을 행하는 중에 방해할까 싶어 재워두었네.”

“노인장께서 안 하시면 제가 할 생각이었지요.”

“편히 앉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네.”

“예!”

호충이 가부좌를 틀고 앉자 연만호가 마주앉았다.

“이 비술은 연씨 가문만의 비기라네. 이 비술을 통해 피술자(被術者)는 높은 경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네.”

“무공을 익힌 상태라면 더욱 수월합니까?”

“아닐세. 피술자(被術者)가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비술은 같은 공능을 보인다네. 만인에게 공평한 비술이지.”

“그럼 이 비술로 노인장의 경지까지 볼 수 있습니까?”

“가문에서 높은 깨달음을 얻은 조사님들의 고고성(呱呱聲)이 그대로 담겨 있기에 비술(祕術)을 실행하는 시술자[施術者]의 경지와 무관하다네.”

사기에 가까운 비술이었다. 누구나 비술의 공능을 누릴 수 있는데, 비술을 실행하는 이의 경지와도 무관하단다.

“하! 뭐 이딴 비술이 다 있습니까?”

“연씨 가문은 고대부터 신선에 이르는 도를 따라왔다네. 이 비술은 신선의 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정도로 중요하며, 시술자는 많은 심력을 소모한다네.”

“어···. 심력 소모가 크다 이거죠?”

호충은 앉은 자리에서 왕호를 불렀다. 작은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왕호!”

“예! 전하.”

“영단 꺼내봐.”

“!”

“괜히 노인장 기력 딸려서 비술이 중간에 끊기면 큰일이잖아.”

“딱 하나만 드릴 겁니다.”

“좋은 걸로 줘.”

“···좋은 거요?”

호충이 말한 좋은 영단은 하오문 방주급이 취하는 영단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건···.”

“달라면 줄 것이지 말이 많다.”

“···예.”

왕호는 품에서 고풍스러운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고, 호충은 왕호의 손에서 상자를 받아 연만호에게 건넸다.

“이거 하나만 드시고 하십시다.”

“···영단이던가? 나도 소문은 들었지.”

“어서 드시죠?”

“···공력은 심력과 다르지 않은가. 이걸 취해도 심력에 보탬이 되진 않는다네.”

“심(心)과 신(身)은 둘이 아닙니다. 공력으로 신(身)을 강하게 하면 심(心)은 이를 기반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허.”

본래 연만호가 중요시 여기는 선심후수(先心後手)와 반대되는 이론이었다.

“그대가 비술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서 드시기나 하십시오.”

딸깍.

상자 안에서 풍기는 깊고 청아한 향기에도 연만호는 한 점 흔들리지 않고 영단을 입으로 가져갔다. 물처럼 녹아 사라진 영단은 연만호의 몸에서 곧장 내공으로 화했다.

후웅. 화아아악.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연만호의 깊은 봉목이 빛을 발하며 열렸다.

파앗.

그의 눈에서 뻗어 나온 안광이 주변을 환히 밝힐 정도였다.

“와. 예상보다 더 대단하신데요?”

짧은 시간 내에 영단을 소화한 것도 그렇지만, 그 끝에 잠시 보여준 지고한 경지는 호충이 손에도 닿지 않을 정도였다.

“···적이나 다름없는 내게 왜 이렇게 좋은 것을 주는가.”

“웃는 얼굴에 침 뱉으시겠습니까? 제 경지가 부족하니 아양을 떠는 것이지요.”

호충은 구김살 없이 웃으며 연만호를 보고 있었다. 연만호는 호충의 얼굴에서 짙은 장난기와 더불어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이 타고난 자질. 같은 황실의 혈통이 이처럼 다를 수 있단 말인가. 대범하고 유쾌하구나. 비범한 태자로다.’

“허···. 먼저 만났다면 그대가 내 제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

[소야 듣습니다. 그런 말씀하시면 제자가 서운하지요.]

[···첫째 제자는 언제 깨달음을 얻을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질이 떨어진다네. 둘째 제자가 아니었다면 난 신선의 도를 닦지도 못하고 속이 터져 죽었을 것이야.]

[······.]

[태자가 꼭 소야를 데려가주길 바라네. 대신 둘째 제자는 남겨두시게. 녀석이야 말로 나의 전진을 이을 자질을 갖췄으니 말일세.]

호충은 멀뚱히 서서 맹한 표정을 보이고 있는 소야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너는 여기서도 천덕꾸러기로구나.’

“비술을 시작하겠네. 연씨 가문의 이 술법은 상단전의 공능으로 진행된다네. 긴장을 풀고 편히 받아들여야 좋을 것이야. 마음먹기에 따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니, 비술의 성공 여부는 내가 아니라 그대에게 달렸음을 명심하게.”

“시작하시지요.”

호충은 오랜 심상수련으로 단련된 터라 상단전의 공능으로 진행된다는 말이 오히려 반가웠다.

‘상단전은 내 전문이지.’

연만호는 잠시 술법을 일으킨 다음 손을 들어 호충의 정수리를 덮었다.

호충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심상수련에 돌입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다른 종류의 심상수련이었던가?’

지금까지 심상수련에서 만나지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는데, 연씨 가문의 시조들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선 인물의 손이 연만호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덮어왔다.

‘이건 또 무슨···.’

“!”

호충은 뇌리로 쏟아지는 정보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천마! 연파천!’

그가 살아온 생애와 그가 거쳐 간 수련, 그의 깨달음이 호충의 뇌리에 펼쳐진 것이다.

그가 창안하고 익힌 천마신공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졌고, 그가 도달한 높은 경지가 환히 보였다. 그리고 천마가 마지막에 강(强)을 넘어서 유(柔)를 그리는 새로운 검에 눈을 떴을 때 호충은 그의 검식을 알아볼 수 있었다.

‘월하답보가 그의 것이었구나.’

월하답보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천마가 이룬 경지였다.

‘깨달음을 전하는 비술 또한 천마의 손에서 만들어졌어.’

호충은 심상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고 천마의 삶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의 깨달음은 현경을 넘어 자연과 하나 되었고, 육체를 벗어나 영의 영역에···.’

호충이 거기까지 도달했을 때 천마의 의식이 끊겨 버렸다. 그곳이 비술의 마지막이었다.

‘···그가 영의 영역으로 넘어 갔다면 인세에 비술을 남기지 못한 것도 당연하지.’

그리고 다음 인물이 호충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다 받아야 하는 거였어?’

본래 비술에서 이와 같은 경험을 한 이는 없었다. 호충이 유일했다. 상단전을 열지 못한 소야와 마한로는 연씨 가문 조사들의 희미한 기억만을 전달 받은 것이었다.

호충은 천마보다 낮은 경지의 조사들이었지만, 이들의 삶을 모두 더하니 방대한 연씨 가문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깊은 깨달음까지 저절로 습득할 수 있었다.

비술 덕분에 연씨 가문에서 내려오는 모든 것을 이해한 것이다.

호충은 심상에서 눈을 떴다.

파앗!

호충은 연만호가 보여준 광채보다 더한 빛을 뿌리며 심상을 환히 물들였다.

‘이것이 연씨 가문의 비술. 실로 믿을 수 없는 비술이로다.’

타닥. 탁. 탁.

누군가의 발소리에 호충의 이마에 내천(川)자가 그려졌다.

‘스승님들. 오늘 제자는 수련하러 들어오지 않았습니다만?’

호충의 네 스승이 평소와 같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호충은 스승들과의 드잡이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호충은 그저 네 스승을 밀어낼 생각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후아앙. 퍼버버벅.

소림의 대수인(大手印)이 저도 모르게 발출되어 나가며 네 스승을 모조리 뒤로 튕겨내 버렸다.

‘어, 어라?’

본래 같은 현경인 네 스승과 대련은 쉽지 않았다. 오래도록 공방을 주고받으며 빈틈을 만들어내고 회심의 일격을 성공시키는 방식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수월하게 네 스승을 밀어내고 승기를 챙긴 것이다. 대수인(大手印)이 생성된 힘과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연과 온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인다. 내 의지가 곧 대자연의 뜻.’

호충은 비술을 통해 자신이 현경을 넘어섰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교주를 죽이지 않는 대가로 차고 넘친다.’

호충은 다시 눈을 감고 심상수련에서 벗어났다.

***

연만호는 호충의 정수리에 올렸던 손을 떼고 턱밑으로 흐르는 땀을 훔쳤다.

“흐음.”

비술의 성공 여부는 아직 그도 알 수 없었다.

‘태자는 조사님들의 경지를 어디까지 엿볼 것인가···.’

연만호가 뒤로 물러서자마자 호충의 눈이 번쩍 떠졌다. 깊고 맑은 눈이긴 했지만,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눈은 아니었다.

“······.”

‘비술은 실패다. 소야 때와 같구나.’

소야에게 비술을 펼쳤을 때도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소야는 비술에서 연씨 가문에서 배우는 최소한의 체술만 익힐 수 있었다.

“긴장을 풀라하였거늘···. 어쨌든 나는 태자에게 비술을 펼쳤으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없구나.”

“······.”

호충은 빙긋 웃으며 연만호를 보고 있었다.

“이제 보입니다.”

“뭐가 말인가?”

“노인장의 경지 말입니다.”

“!!”

“아까 제게 해주신 말씀을 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호충은 약간 자존심이 상했던 연만호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적이나 다름없는 제게 너무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어, 어디까지 보았는가?”

“어디까지 보았다 말씀드려야 노인장이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허!”

“다만 지금까지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 말씀드리지요.”

“······아쉽구나. 그대가 연씨 성을 갖고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까는 제자를 욕보이시더니, 이젠 손자까지 욕보이십니다 그려.]

호충은 연만호가 연소문에게 선보였던 심어(心語)로 뜻을 전하고 있었다.

[이것도 인연이 아니겠는가. 부디 연씨 가문을 잊고 황상과 나라를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루시게.]

[이번 비술을 통해 연씨 가문의 독특한 비술이 또 있음을 알았습니다. 제 과거를 보시겠습니까?]

[그대가 허락한다면?]

[보시지요.]

호충은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영단을 먹어 심력에 여유가 있구나. 이 또한 태자의 말이 옳았다.’

연만호는 비술 시전 전에 먹은 영단으로 심력이 남아 있음에 안도하며 호충의 팔에 손을 올렸다.

사락.

호충은 자신이 이곳 중원에 도착한 순간까지만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연만호도 그 이상을 볼 필요가 없었다.

“!!”

연만호는 호충의 과거를 읽다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현대를 살던 진호충이 중원 진가장 막내아들의 몸으로 다시 눈을 뜬 순간에서 더 이상 나아갈 심력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호충은 그가 어디까지 보았는지 알고 있기에 심어로 다시 뜻을 전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제 과거입니다.]

[···기사(奇事)로다. 어찌 영(靈)이 시공(時空)을 뛰어넘을 수 있단 말인가.]

연만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저도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부디 노인장이 높은 깨달음을 얻어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틀린 것 같네. 사실 정체된 지 오래거든.]

호충은 그가 신선의 도를 닦는데 길을 막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노인장은 오욕(五慾 : (재물욕(財物慾), 명예욕(名譽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색욕(色慾))을 멀리하였고, 칠정(七情 : (희(喜, 정신적 즐거움), 노(怒, 분노), 애(哀, 슬픔), 낙(樂, 육적인 즐거움), 애(愛, 사랑), 오(惡, 미움), 욕(欲))을 잊으려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선의 도를 따르는 기본적인 길이지.]

[손자를 향한 노인장의 마음은 애(愛,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천마신교의 교인들을 향한 애(哀, 슬픔)도 남아 있음을 알고 있네. 또한 뛰어난 제자를 얻고자 하는 욕(欲)이 남아 있었고, 첫째 제자의 떨어지는 자질에 노(怒)하였으며, 둘째 제자가 성장하는 것을 보며 희(喜)를 느꼈지. 나는 다 버렸다고 여겼지만, 아직도 많은 것을 품고 있음이야.]

호충은 연만호가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가리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억지로 잊으려 하면 잊히지 않습니다. 사랑이 남았다면 그 마음을 모두 쏟아 사랑하시고, 슬픔이 남았다면 그 슬픔을 남김없이 토해내십시오. 그래야 비울 수 있습니다.]

[······.]

[오욕(五慾)은 멀리하면 잊혀지나, 칠정(七情)은 멀리할수록 더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태자의 말이 옳다. 칠정(七情)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어.]

[부디 대성하시어 선계에 오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한 가지 부탁함세. 태자가 칠정을 모두 쏟아내라고 했으니 하는 말일세.]

연만호는 이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잠시간의 대화로 작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말씀하시지요.]

[태자가 가진 영단을 더 내어주게.]

못 내줄 것도 없었다. 현경을 넘어서는 깨달음을 전해주지 않았겠는가.

[몇 개나 필요하십니까.]

[아무리 가르쳐도 부족한 첫째 제자를 위해 하나, 재능은 출중하나 내공이 부족한 둘째 제자를 위해 하나, 그리고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하나. 모두 셋 일세.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네. 내가 내어줄 수 있는 것은 내어줄 것이니 부탁함세.]

[노인장께서 제게 베푸신 비술의 값어치가 영단의 가치를 훌쩍 상회하오니, 값어치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호충은 손을 뻗어 흑림방 호위대의 품에 분산시켜둔 영단을 끌어당겼다.

파박.

그들의 품에 고이 감춰둔 상자들이 호충의 손위에 착착 쌓였다.

[여기 있습니다.]

호충은 높은 깨달음을 전해준 연만호에게 앞으로 할 일을 알렸다.

[중원을 벗어나 본래 연씨 가문이 있던 곳으로 가십시오. 이곳은 황군이 위치를 아는 터라 손자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고, 신선의 도를 닦는 노인장을 귀찮게만 할 것입니다. 금원보를 가져가시면 앞으로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으실 것입니다.]

호충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소야 앞으로 갔다.

“소야. 내가 너의 형이다. 나를 따라 황궁으로 가자.”

“진 공자께서···.”

호충이 진가장의 막내 도련님으로 생각된 탓이었다.

“이젠 진 공자가 아니라 태자다. 그리고 넌 폐위된 진패를 대신해 이 황자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

“네 본래 위치는 황태자의 자리였을 것이나, 네가 어려서 뒤바뀐 바람에 목숨을 부지했다 여기는 것이 좋겠다.”

“······.”

만약 소야가 황태자의 자리를 유지했어도 진휘평이 살아 있는 이상 언제고 황위 찬탈이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폐위되는 것은 진패가 아니라 소야였을 것이다.

소야의 시선이 사제 마한로와 스승 연만호를 향했다.

“저들이 갈 길은 너와 다르다. 너는 나를 따라 갈 것이고, 저들은 그들의 길을 갈 것이다.”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헤어짐은 짧을수록 좋다고 하지.”

“···어려서부터 저와 함께한 마한로와 저를 자식처럼 대해주신 스승님입니다.”

어차피 황군이 마차를 끌고 오기까지 시간이 있었다.

호충은 나중에 소야에게 주려던 세 번째 영단을 챙겨 연만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노인장. 그럼 소야와 며칠 머물며 정을 털어내십시오. 황군이 도착하면 다시 이곳으로 올라오겠습니다.”

“···태자는 그리하시게.”

호충은 왕호를 비롯한 호위대와 함께 노야산을 내려갔고, 소야와 마한로 그리고 연만호가 남았다.

“···스승님.”

“제자야. 결국은 네 핏줄을 찾아가는 구나.”

“저는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순리일 것이다. 역리가 순리를 찾아가는 것이니 너는 황실의 종친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크흥.”

연만호는 눈물을 보이는 소야에게 고개를 돌려 굳은 얼굴의 마한로를 향해 물었다.

“둘째 제자야. 식사 준비를 한다 하지 않았더냐. 우리 함께 식사를 들자.”

“아. 예. 스승님. 곧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

그 뒤로 며칠을 평소와 같이 보낸 연만호는 그날의 천기를 읽고 두 제자를 앞에 앉혔다.

연만호가 품에서 꺼낸 것은 호충이 준 영단이었다.

“태자가 준 영단을 취하여라. 내가 진기 도인을 도울 것이다.”

“저는 괜찮으니 사형을···.”

“그래. 둘째 제자는 진기 도인이 필요 없지.”

“그것이 아니오라, 영단은 저 대신 스승님께서 취하시는 편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으니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승님께서 영단을 하나 더 취하시면 신선의 도에 한걸음 더 다가가실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

‘둘째 제자는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 또한 깊구나.’

“내 누누이 선심후수라 하였다. 공력으로 신선의 도에 이를 수 있었다면 나 또한 영약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내겐 도움이 되지 않으니, 네가 영단을 취해 나를 돕거라.”

“스승님의 명에 따르옵니다.”

소야와 마한로는 영단을 입에 가져갔고, 연만호는 소야의 장심에 손을 가져갔다.

‘너는 내게 아픈 손가락이로구나.’

자질이 떨어져 연씨 가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소야에게 많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

‘이것으로 너를 잊겠노라.’

연만호의 몸에서 일어난 서기(瑞氣)가 소야와 연만호를 둘러쌌다.

마한로는 그 곁에서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영단을 소화하려 애쓰고 있었는데, 소야와 연만호를 둘러싼 서기의 일부가 마한로를 향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연만호는 서기가 흐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는 주지 않아도 스스로 가져가고 하나는 주려해도 반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나.’

연만호는 소야에게 더욱 집중했다. 중단전에서 상단전으로 향하는 길을 조금이라도 뚫어주어야 소야가 제 몫을 할 것 같았다.

세 사람이 눈을 뜬 것은 한참이나 지난 다음이었는데, 마한로는 눈을 뜨고 보인 스승의 모습에 대경해서 다가왔다.

“스승님!”

“···괜찮다. 그저 미련을 버렸을 뿐이다.”

연만호는 한참 나이를 먹었지만, 윤기 나는 백발에 홍조를 띄는 얼굴로 상당히 건강한 용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연만호는 볼이 홀쭉해졌고, 백발은 푸석해보였다.

“아직도 버릴 것이 많이 남았느니라.”

“······.”

마한로 다음에 눈을 뜬 소야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흐흑.”

“제자야. 달라진 것이 있느냐?”

“허흥. 세상이 명료하게 보입니다. 또한 제가 미련했음을 깨달았나이다.”

“다행이로다. 앞으론 조금 달라지겠구나.”

“어허엉.”

소야는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 때문에 스승이 몸을 상했다 여긴 것이다.

“난 괜찮다.”

연만호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면서 몸을 비틀하자 마한로가 번개처럼 일어나 스승을 부축했다. 방금 공력을 얻었지만, 마치 평생 사용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공력을 운용하는 마한로였다.

“제가 스승님 곁에 있겠습니다.”

“그래. 둘째 제자가 있었지.”

연만호는 바닥에 엎드려 우는 소야를 향해 온화한 말투로 작별을 고했다.

“대제자 연소야에게 하산을 명하노라. 너를 위해 황제의 군사들이 올라오고 있노라.”

소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끄윽. 제자 연소야. 스승님의 명을 받드옵니다.”

지금 스승을 붙들고 하소연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일이었지, 스승을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신선의 도를 향해 정진하는 스승님께 마지막까지 못난 제자가 될 수 없었다.

“그래···. 이제 너도 네 몫을 하겠다. 미련이 없도다. 너는 앞으로 연소야가 아닌 진소야로 살아갈 것이다.”

“스승님. 부디 강녕하시고···. 꼭 선계에···. 끄윽. 허으으응.”

지극한 슬픔을 보이는 소야였지만, 이미 미련을 내려놓은 연만호는 평정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둘째야. 우리도 움직여야 할 것이다.”

“미리 짐을 챙겨두었습니다. 소문 도련님은 제가 업고 내려갈 것입니다.”

영단으로 높은 내공을 쌓은 마한로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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