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1화 (211/232)

태자

***

태자는 깊은 밤 환복하고 남경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태자의 곁을 호위하는 황실의 금의위와 내관들도 저마다 관복을 벗고 갓을 눌러쓰고 있었다.

태자의 눈에 곧 작은 장원이 들어왔다.

“······.”

‘날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

아무도 없어보이던 장원 근처엔 이들을 감시하는 눈이 사방에 존재했다.

‘약속대로 태자가 왔군.’

‘태자다! 태자가 움직였다.’

하나는 마교의 것이었고, 나머지는 하오문 정보단이었다.

.

.

.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장원 안으로 들어선 태자는 내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그 안에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한 여인이 있었다.

“···흐흑.”

“···그대는 누구시오.”

“본 녀는···. 허흑. 흐흑.”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을 수습하기 바빴다.

“······.”

태자는 이미 누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지 듣고 있었기에 꿇어앉은 중년 여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곧 다른 인물이 나와 태자 앞에 부복했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천세천세천천세.”

“그대가 신교의 인물인가?”

“예. 부족하지만 신교의 두 번째 지위에 있나이다.”

“······.”

이미 신교에 대해 파악하고 왔기에 상대가 천마신교의 부교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여인은 내보내고 나와 따로 얘기하지.”

“······.”

부교주는 태자가 자신의 친모에 하등 관심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자의 눈빛에 작은 측은지심도 느껴지지 않고 있음이다.

“허흐흑. 허흑.”

‘친모가 저리 곡을 하고 있건만···.’

태자의 친모를 통해 일을 진행하려던 계획은 모조리 파기해야 했다.

‘어르고 달랠 필요 없다. 채찍만이 답이로구나.’

“모시겠나이다.”

“······.”

태자와 부교주가 자리를 떠나고 남은 그녀는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나, 나의 존재 가치가···.’

오직 태자가 된 자신의 아들을 만날 목적으로 버텨온 삶이었다.

‘네가 날 무시하면 내가 어찌 살아남겠느냐!’

얼마 흐르지도 않던 눈물을 닦아낸 여인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자신에게 명령하는 이가 없었다.

“···이제 난 어떻게···.”

그녀의 생사는 태자와 부교주의 만남에 달려 있었다.

***

자리를 옮긴 태자는 상석에 앉아 부교주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

“······.”

‘태자의 독심이 상상 이상이다.’

부교주는 침묵을 통해 태자가 생각보다 까다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텐데도 자신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렇다고 내가 먼저 입을 열일은 없을 것이다. 태자. 지금 곤경에 처한 것은 너이지. 내가 아니야.’

길어진 침묵 끝에 먼저 행동한 것은 태자였다.

스륵.

태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

‘그냥 가겠다고?’

부교주는 여기까지 예상할 수 없었다.

“자, 잠시만···.”

“지금 네가 황태자의 길을 막는가? 목숨이 열 개 쯤 되는 가?”

‘신교의 부교주라는 놈의 인내심이 이렇게 부족해서야···.’

태자는 자신의 승부수가 통했음이 기꺼웠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왜. 내가 너희들에게 비굴하게 엎드릴 것이라 여겼더냐?”

“······.”

‘예상과 다르다. 전혀 달라.’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아 위축되었을 태자를 예상했지만, 태자는 여전히 굳건했다.

“이미 나는 황제 폐하와 다를 것 없는 권력을 누리고 있다. 너희가 아무리 나를 핍박해도···.”

태자는 장원으로 나오기 전 이미 계산을 끝낸 것이다.

‘황위만 차지하면 천마신교 녀석들을 끝까지 추적해 말살할 수도 있음이야. 정파 무림에도 마교의 말살을 도우라 할 수 있겠지. 희의 말대로 정파 무림의 힘을 키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다.”

“···천마신교는 어디에 있고 또 어디에도 없지요.”

‘아무리 네가 태자라고 해도 우리를 잡을 순 없을 것이다.’

“하. 자신 있더냐? 어디 나와 붙어 보겠느냐?”

“······.”

‘이렇게 감정이 격해지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

부교주는 서로 감정이 드러난 상황부터 바꿔야 했다.

‘당장은 내가 수그릴 것이나 다음엔 다를 것이다.’

부교주는 얼른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전하. 부디 자비를 청하나이다.”

“······.”

잠시 자신의 승리를 만끽한 태자가 선심을 쓰듯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너희 계획부터 들어보겠다.”

“······.”

‘얼마든지 네가 우위에 섰다고 생각해라. 네가 신교의 계획에 들어오지 않을 일은 없을 것이니···.’

부교주는 허리를 굽히고 태자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는 오직 태자 전하를 보위에 올리고자 하는 열망으로···.”

“너희가 힘쓰지 않아도 나는 보위에 오를 것인데?”

“···정정하신 황제 폐하께서 언제 태자 전하께 보위를 물려주시겠습니까.”

“정정하시다?”

최근 황제의 용태가 심상치 않았으니 묻는 것이다.

‘···이 놈들이 그걸 모르지 않을 터.’

“오래전부터 조금씩 힘을 써왔나이다.”

“···너희 짓이었더냐?”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는 말이었다.

“그저 태자 전하를 향한 충심으로 행한 일입니다.”

“······.”

태자는 이들의 독심이 자신을 훌쩍 뛰어넘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지가 흐려진 것이···. 너희는 어떻게 폐하를 그리 만들었더냐. 독이더냐?”

“···궁금하십니까?”

부교주이 허리가 스윽 펴졌고, 사이하게 빛나는 안광이 태자를 꿰뚫어 버릴 듯이 직시했다.

“······.”

부교주의 살기 가득한 눈을 본 태자는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찌 답이 없으십니까?

“······.”

태자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그럴수록 부교주는 더욱 여유를 찾아갔고, 또한 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살기가 더해갔다.

“저희는 폐하게 지극한 즐거움을 드리고 있답니다. 짧은 생을 살며 그만한 복을 누리시는 분도 많지 않지요.”

“······.”

“저희는 독과 같은 저급한 물건을 사용하지 않는답니다. 덕분에 폐하를 보호하는 황실의 지독한 경계를 뚫어낼 수 있었지요.”

“······.”

부교주가 풍기는 살기에 잔뜩 위축된 태자는 입술을 깨물어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궁금하시면 맛을 보여드릴 수도 있사온데···.”

“아, 아니다.”

“흐흐흐. 아니면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되었다질 않은가!”

방금까지 풍기던 살기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한번 맛을 보면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그 물건은 오직 폐하께서 찾고 계신답니다.”

“끊을 수 없다? 혹시···.”

지극한 즐거움에 이은 새로운 단서였다. 태자는 지금까지 나온 단서들로 물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고, 이어진 부교주의 말이 이를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예. 아편(阿片)입니다.”

“!”

“폐하께서 안색이 나빠지신 것은 꾸준히 복용하신 아편으로 인함입니다.”

“대체 언제부터···.”

“상당히 오래전 일이지요. 작은 지병에 미량의 아편으로 효과를 보셨고, 계속해서 그 양을 늘리셨습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

“태자 전하께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말하라.”

부교주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二) 왕야의 납치, 살해가 발생하고 벌써 이 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

“또한 이 일을 황제 폐하를 따르는 이들이 행한 것이 분명한 바. 그간 저희는 이들을 추적해 왔고, 최근 태자 전하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二) 왕야를 납치하며 태자 전하의 출신을 파악한 것이지요. 저희가 가장 경계했던 상황입니다.”

“!!”

태자는 천마신교뿐 아니라 다른 황제파의 인물들이 비밀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 그들이 날···.”

“예. 그들은 이지가 흐려져 언제 서거하실지 모를 폐하를 대신할 다른 황족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컥!”

“새로운 황제를 옹립해 나라를 자신들이 직접 좌지우지하기 위함입니다. 황제 폐하께 붙어 있지만, 대신들의 욕심은 여전하니 말입니다.”

정보가 없는 태자는 부교주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움직이기 전에 저희가 먼저 움직여야 했지요. 조급하게 움직여 태자 전하께 무례를 범한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었음입니다.”

“······날 용상에 앉힐 수 있겠는가?”

“명하신다면 석 달 안에 태자 전하께서 용상에 오르시도록 하겠나이다. 물론···. 태자 전하의 비밀을 알고 있는 대신들도 저희 손에 연기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

‘당장 일을 진행하자면 폐하의 명을 단축시켜야 할 것이다. 이는 이들만 할 수 있는 일. 또한 나를 축출하려는 이들의 정체를 이들만 알고 있으니···.’

태자는 천마신교와 함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군.”

“···저희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궁금하시지요?”

“옳다. 나를 옹립하며 얻으려는 대가는 무엇이냐.”

“전하의 즉위에 비하면 아주 작고 가벼운 일입니다.”

부교주가 입에 올린 것은 간간하다면 간단한 일이었다.

“하늘과 땅, 해와 달을 섬기며 신의 높은 뜻을 따르는 저희 천마신교를 나라의 모두가 믿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됩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관직은 필요 없다?”

“나라의 종교이니 국사 하나 정도는 임명하셔야 옳겠지요. 그 외에 나라의 운영이나 의사결정은 오롯이 전하의 권한입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전하의 비밀을 지킬 것입니다. 신교가 바라는 영광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으니 말입니다.”

‘생각보다 소박해. 이들이 고작 종교단체의 하나일 뿐이라 다행···.’

태자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천마신교가 평범한 종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라에서 천마신교를 인정하기만 하면···.’

황제에게 아편을 진상하는 이들이 나라의 백성들에게 못할 짓이 뭐가 있겠는가.

‘···백성들 전부를 교의 신도로 만들 것이다.’

“아까 나와 마주친 여인은 어찌할 생각인가?”

“······.”

태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귀찮음이라는 감정이었다. 친모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불편한 것이다.

“···저는 모르는 여인입니다. 그리고 곧 세상도 모르게 되겠지요.”

부교주는 그녀의 죽음을 의미하며 뱉은 말이었고,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군.”

태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말하며 부교주의 결정에 찬성하고 있었다.

“기억하실만한 중요한 일은 없었나이다.”

이후 부교주와 태자의 긴밀한 대화가 오고갔다. 앞으로 태자를 황위에 앉히기 위한 작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태자는 황궁 내에 부교주가 보낸 사람을 들여보내 대신들의 정보를 파악해 전달하기로 했으며, 부교주는 자신이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낱낱이 설명했다.

“···그 외에 진행하는 일은 때마다 보고하도록.”

“매(昧)를 통해 전하께 상세히 전하겠나이다.”

매(昧)는 태자가 어려서부터 함께하던 궁녀의 이름이었다.

***

태자가 떠나고 부교주는 태자의 친모가 있는 곳으로 갔다.

“······부교주님.”

“걱정 많았느냐?”

그녀의 얼굴엔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그득했다.

“저, 전하께서는 어찌···.”

“염려하지 마라. 일은 다 잘 되었다.”

부교주는 온화한 얼굴로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 일은 오늘로 끝이옵니까?”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천경에 갈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뭐가 그리 급하더냐.”

부교주의 말에 그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전하께서 용상에 오르시고 나라를 운영하시는 것을 지켜보아라. 그것이 네 새로운 임무다.”

“어, 어찌···.”

자신이 어째서 살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작은 과오도 범하지 않기 위함이다.”

부교주는 태자의 독심을 보고 언제든 천마신교가 축출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유가 갖다 붙이기 마련이었지만, 자신의 친모를 죽였다는 죄를 물으면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지운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녀를 살려둬야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너는 다시 죽은 듯이 살아야 할 것이다. 남경을 벗어나 한적한 지역으로 가라.”

“···감사합니다. 부교주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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