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3/232)

깨달음의 영역

***

현인과 현진은 아까보다 조금 더 예의바른 모습으로 호충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요. 얼른 옆으로 오세요.”

“어휴. 어찌 저희가 명예 장문인 옆에 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저희가 뒤를 따라야지요.”

“으득. 이제 그만하시죠?”

“푸흐흐.”

“크하하.”

둘은 장난이었다는 듯이 웃었지만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연무장까지 가서 그러기만 해봐라. 내가 이대, 삼대제자들 앞에서 대가리 박으라고 시킬 겁니다. 예?”

“큼큼. 그건 좀···.”

“그래도 시키면 해야 하지 않나? 명예 장문인이신데···.”

“캬악!”

“이제 그만하지. 호충이 너도 마음 풀어라. 장문인의 마음이 그만큼 컸다는 뜻이니까.”

“맞아. 명예 장문인이라고 하지만 말로만이야. 다른 부담은 아무것도 없어.”

“···정말이죠?”

“물론!”

“화산의 명예 장문인은 말 그대로 명예일 뿐이야.”

그제야 호충도 얼굴을 풀고 뒤로 한 걸음 다가와 같이 섰다.

“그럼 이렇게 가는 겁니다. 삼대제자들에게 말하지 마시고요.”

“걔들은 나중에나 듣겠지.”

호충은 이대제자들이 삼대제자들의 수련을 봐주고 있는 연무장으로 들어섰고, 현인과 현진의 등장에 이대제자들이 얼른 수련을 멈추고 인사했다.

““각주님을 뵙습니다.””

““당주님을 뵙습니다.””

“수고가 많았다.”

현진은 현인이 앞으로 나서자 호충과 함께 서서 기다렸다.

“너희와 함께 수련했던 진호충 공자가 돌아왔다.”

“······.”

“······.”

“······.”

흠뻑 땀에 젖은 삼대제자들의 시선이 잠깐 호충을 향했다가 다시 현인을 보며 자세를 바로 했다.

호충은 흐트러지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발전을 엿볼 수 있었다.

‘오오. 그 사이 상당히 기합이 들었네?’

장족의 발전이었다. 어리숙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딜 가도 제 몫을 할 한 사람의 무인이 되어 있었다. 이들 삼대제자의 대사형 백준도 그 사이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호충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무척 안타까운 기색이었다.

“진 공자는 월하검문의 제자가 되었기에 너희와 같이 검을 수련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장문인께서 진 공자에게 매화검법을 허락하셨다. 하여···.”

호충은 현인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 얘길 꺼내나 싶었다.

‘또 무슨 수작이야?’

“진호충 공자의 매화검법 시연을 청하고자 한다. 한번 보여주시겠습니까?”

“···거참. 또 하라고요?”

또 시연을 하란다. 연무장에 올 때마다 시연이었다.

‘호충이가 돌아왔다!’

이미 백준은 호충이 매화검법을 익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제 장문인께 매화검법까지 허락 받았구나!’

다른 삼대제자들도 매화검법이라는 말에 눈을 빛냈다. 이들이 개화검법을 완전히 익히면 다음에 배울 검법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 보여줘. 외인인 네가 매화검법을 완벽하게 보이면 삼대제자는 물론 이대제자들에게도 커다란 자극이 될 것이다.”

“···그럼 확실하게 갑니다?”

“당연히 제대로 해야지. 대충하면 다 티가 나는 법이다.”

호충은 현진의 부탁에 마음을 다잡고 나섰다.

“···저 대충이라는 말은 모릅니다만?”

문제는 호충이 빈손이라는 점이었다.

타박.

호충이 한 발 나서니 현진이 얼른 나서서 막아섰다.

“왜 빈손으로 나가는 거야? 검은?”

“괜찮습니다.”

“···그 칼은 꺼낼 생각도 말아라.”

물론 품에 있는 회칼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보시면 압니다.”

호충은 이들에게 충격을 줄 생각이라 일부러 현진에게 검을 청하지 않은 것이다.

호충이 빈손으로 올라오자 현인도 얼른 다가왔다.

“이걸 받아···.”

“괜찮습니다. 잠시 거기서 들고 계십시오.”

호충은 현인이 내미는 검조차 사양하고 연무장 앞에 섰다. 화려한 비단 무복을 갖춰 입은 호충이 나서자 모두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호충은 곧장 시연을 보이지 않고 입부터 열었다.

“세상 만물은···.”

호충이 한쪽 팔이 하늘로 올라갔다.

“서로 다르되···.

그 팔이 다시 향한 곳은 현인이 들고 있는 검이었다.

”또한 다르지 않으며···.”

부르르르. 슈악!

“···무공을 펼치는 사람 또한 세상과 다르지 않음이로다.”

현인의 검집에서 부르르 떨던 검이 뽑혀 나왔고, 하늘을 날아 호충의 손아귀에 잡혔다.

“!!”

“커흡!”

허공섭물의 기예부터 시작이었다. 경악으로 물든 연무장에서 호충은 화려함을 자랑하는 매화검법의 시연을 시작했다.

“눈바람 휘날리는 화산봉에 올라···.”

호충을 중심으로 차가운 바람이 일어나 펴져나갔고, 작고 하얀 알갱이를 흩뿌렸다. 연무장의 이대제자들과 삼대제자들은 자신의 볼을 스치는 눈송이를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눈발이 날려?’

‘미친···.’

“흩날리는 매화 잎을 보노라.”

눈바람 사이로 푸른 잎사귀가 눈을 어지럽혔다. 날카로운 검기로 이루어진 푸른 잎사귀는 곧 연무장 뒤편으로 흘러가 흩어졌다.

“구름이 일어 하늘을 보니···.”

푸른 잎이 사라진 연무장을 뿌연 구름이 덮어갔다.

‘뭐가 보여야···.’

화산의 제자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중이라 광명이 비추는 것을 더욱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찬란한 빛이 땅에 내리는 도다.”

뿌연 구름 사이로 빛살이 나타나 화산의 제자들 사이를 스쳐지나갔다.

“빛은 새 생명을 틔우고 자라나 꽃을 피우니···.”

구름이 흩어지며 붉은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진정한 매화의 발현이었다.

“꽃잎은 범람하여 화산으로 흐르는 도다.”

사방을 가득 채웠던 붉은 꽃잎이 모여들더니 양쪽으로 갈라진 삼대제자들 사이를 강물처럼 흘렀고, 곧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쏴아악!

“······.”

“······.”

“······.”

“세상 만물은 이처럼 흐르고 흘러 돌고 돌지요. 그래서 다르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그 사이의 사람은 세상 만물과 함께 동화하여 흘러야 하는 법입니다.”

“······.”

“······.”

“······.”

“······.”

“······.”

짧은 매화검법의 시연이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대자연의 매화검법. ······대체 난 지금까지 뭘 한 거지?’

이대제자들은 자신들이 익히고 있던 매화검법의 진정한 힘을 깨달았고,

‘개화검결 다음은 저것이구나! 나도 익히고 말 것이다!’

삼대제자들은 자신들이 익힐 예정인 새로운 검법에 눈을 빛냈다.

‘이 미친 놈. 진짜 제대로 익혔어. 이번엔 진정 화산의 검이었다.’

대사형 백준의 눈은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있었다. 회칼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잘 썼습니다. 현인 도장.”

“······.”

현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호충이 내미는 검을 받아들고 있었다.

호충은 현진에게 돌아와 눈을 찡긋했다.

“제가 확실히 보여드린다 했지요?”

“······넌 정말.”

누가 이만큼 매화검법을 완성에 가깝게 보일 수 있었던가. 자신을 비롯해 누구도 이와 같이 화려한 매화검법을 보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세상 만물에 빗대어 매화검법을 설명한 것도 기가 막혔다. 당장이라도 이대제자들의 수련을 맡기고 싶었고, 자신도 그사이에서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저벅.

“넌 누구냐!!!”

문제는 근처에서 기의 운용을 느끼고 연무장으로 들어와 있던 한 사람이었다.

“현검(玄劍) 태사조님.”

현진이 현검을 알아보고 인사하자 연무장의 모두가 그를 향해 예를 보였다.

““태사조님을 뵈옵니다!””

호충은 그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포권지례로 인사했다.

“월하검문의 제자가 화산의 존장을 뵈옵니다.”

“···월하검문? 화산의 제자가 아니라고?”

현검(玄劍)은 성큼성큼 걸어와 호충의 앞에 섰다.

“화산의 제자가 아닌데 매화검법을?”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태사조님.”

현진이 나섰지만, 현검은 단호하게 막았다.

“갈(喝)!! 넌 가만있어라!”

“······.”

“바른대로 말하여라. 넌 누구냐! 네가 뭔데 매화검법을 익히고 사용하는가!”

호충은 상대의 무위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만나는 진짜 현경의 고수로구나.’

호충은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화산파에 매화검법과 개화검결을 돌려준 진호충이라 합니다.”

“!”

현검도 진호충이라는 인물이 화산의 매화검법과 개화검결을 가져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 네가 바로···. 화산의 은인이었구나!”

“그리고 오늘은 다른 선물을 드렸지요.”

그때 현인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진 공자가 말하는 선물은··· 화산의 보물 자하신공입니다.”

“컥!!”

‘매화검법, 개화검결···. 이젠 자하신공까지!’

현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휘몰아치는 감정을 다스렸다.

호충은 그사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검이 이렇게 화산파 경내를 돌아다니고 있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제 보니 전 장문인께도 인사를 올려야했는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현검이 이렇게 활동할 수 있다면 청진 전 장문인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한가. 은인은 잠시 이 늙은이에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는가.”

“물론이지요.”

삼대제자들과 이대제자들에게 경악을 안겨준 호충은 현검과 함께 연무장을 나섰고, 당연히 현인과 현진도 그 뒤를 따랐다.

.

.

.

이대제자들은 다시 삼대제자들의 개화검결을 봐줘야 했지만, 도저히 봐줄 기분이 아니었다. 눈송이가 날리고 푸른 잎사귀가 눈을 어지럽혔으며, 구름 속에서 광명을 보았다. 또한 매화가 흩날리며 퍼트린 진한 매화 향기가 아직도 콧속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

“······.”

“···자율수련 시작.”

“옙!”

당장 자신들이 익힌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펼치고 싶어 몸이 달았기 때문이다.

이대제자들은 호충이 가장 먼저 선 보였던 설풍심총(雪風枔憁)을 펼쳐보았다.

휘리릭. 휘릭. 샤아악.

“······.”

열심히 펼쳤지만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지금은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왜 다르지?”

분명 호충이 펼친 것과 같은 초식이었는데, 반딧불과 태양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눈바람은 고사하고 찬바람도 불지 않았으며, 매화 잎사귀는 몇 개 생기다 말았다.

“이게 뭐야······. 난 왜 이따위로 펼치는 건데?”

절망감과 자괴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들 곁의 이대제자 화정(花靜)도 자신의 매화검법을 펼치며 깨닫고 있었다.

휘릭. 사아악. 사악.

“······아무리 해도 안 되는데?”

“너도?”

화정은 무림 대전에 출전해 화산이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보유했음을 알렸다. 덕분에 정파 무림에서 크게 주목받는 후기지수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설풍심총(雪風枔憁)이 매화검법의 초식 중 가장 자신이 있었기에 무림 대전에서도 활용하지 않았던가. 화정은 매화검법으로 무림 대전 최종 팔(八)인에 들기도 했었다. 이는 현 무림의 맹주와 비등한 수준의 무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성과였다.

“진 공자 쫓아가다가 가랑이 찢어지겠어. 이러다 주화입마가 찾아오지 싶은데?”

그의 절망적인 말에 다른 이대제자들이 물었다.

“그럼 아까 그거 펼칠 수 없는 거지?”

“맞아. 불가능이라고!”

“···사람이 펼친 매화검법을 방금 우리 눈으로 봤다만.”

“아···. 그랬지.”

“우린 힘들까?”

“내 나이가 한 육십 쯤 되면 흉내는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네가 그 정도면 우린 어쩌라고.”

“환장하겠네. 분명 보긴 봤는데 흉내도 낼 수 없다니···. 내공을 키워야 하려나?”

“이건 내공이 올라간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아까 진 공자가 말한 세상 만물에 대한 깨달음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 같아. 진 공자와 우리는 아예 깨달음의 영역이 다르다는 결론이지. 하룻강아지와 용(龍), 시냇물과 바다···. 이정도 차이가 아닐까?”

“······.”

“······.”

삼대제자들의 대사형인 백준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괜히 우쭐해졌다.

‘우리 호충이가 매화검법을 얼마나 잘 쓴다고···.’

이미 몇 년 전 화산에서 하산할 때에도 호충은 매화를 피워냈었다. 지금의 모습이 당연하게 다가온 것이다.

“이것들이 지금 뭐해?”

“누가 놀라고 했어! 엉?”

“자율수련이 무슨 뜻인지 몰라? 몸으로 각인시켜줄까?”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이대제자들의 분노가 삼대제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제길 또 시작이야···.’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