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가장 원로원
***
그때 셋째 호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어찌 옥 씨가 진 씨의 숙부가 된단 말입니까!”
“······.”
다른 이들의 반발은 참을 수 있었지만, 호성은 아니었다.
“어허. 누가 함부로 발언하라 했지? 자리에 앉아!”
호충의 살기어린 눈빛에 얼른 고개를 숙인 호성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양쪽 옆구리가 욱신거리고 있었다.
“어련히 설명할 것을···.”
호충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옥 대협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기에 옥(玉)성을 사용했으나, 사실 태상가주이신 진무검 가주님의 자손입니다. 사마 총관 그렇지요?”
“태상가주님께서 밖에서 아이를 보신 여인의 성이 옥(玉)성을 가졌음은 제가 알고 있고···.”
사마충은 더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다.
“···옥 대협은 그 여인의 용모와 너무도 닮으셨소. 확실히 태상가주님의 자손입니다.”
“그렇다는 군. 여기 옥 대협이 진가의 피를 이었음은 이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오.”
옥비연이 나섰다.
“최근 가문이 어렵다하여 나섰습니다. 가문이 진 빚이 상당하다고 하니 어찌 가문의 피를 이은 제가 나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호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숙부님밖에 없습니다. 저처럼 부족한 이가 가문의 수장을 맡을 수는 없지요. 숙부님이 진가장을 맡는데 반대하는 이가 있다면 나서주십시오.”
“······.”
“······.”
“······.”
가주가 자신의 자리를 넘긴다는데 누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반대해도 막을 수 없었고,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호충은 어제 호중에게 떠넘기듯 받았던 진가장의 가주 직인을 두 손으로 넘겨주며 말했다.
“숙부님. 부디 진가장을 부탁드립니다.”
“···그 전에 하오문에 허락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유 단주. 그대가 허락하고 말고 할 일인가?”
“삼도상단의 상단주께서 진가장을 맡아만 주신다면 저희가 반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저희가 상단주께서 진가장의 가주로 올라서주시길 부탁드려야겠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는 군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호충에게서 비연에게로 가주의 직인이 넘어갔고, 호충이 크게 소리쳤다.
“전대가주님의 친 형제이신 옥비연 숙부께서 오늘부로 진가장의 가주가 되셨소이다!!”
““와아아아!!””
어제와 다른 환대였지만, 호충은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
“······.”
회의장에 눈을 굴리는 두 년 놈이 있었지만, 끈 떨어진 연에 불과한 호성과 호란이다.
[알아서 기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네가 숙부님 밑에서 살아남는다.]
“!!”
갑자기 전해진 전음에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호충이 호성을 노려보자 호성은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힉.”
호충은 세가의 인물들과 인사를 나누는 비연 곁에서 친밀함을 드러내며 깊은 호의를 보였다.
“숙부님. 이쪽은 가주 직속 무력대인 진천대를 맡고 있는 황종현 대주입니다.”
“반갑습니다. 황 대주님.”
“옙! 가주님. 금급 무사 황종현입니다.”
“요새도 도박장에 드나드신다고?”
“······.”
“맡은 업무에 집중하시오. 어제 잃은 돈이 눈앞에 어른거리면 어찌 검을 휘두를 수 있겠소?”
“···시, 시정하겠습니다.”
호충은 황종현을 뒤로하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올라 차례를 기다리는 부총관을 소개했다.
“이쪽은 염태중 부총관으로 진가장의 대소사를 맡고 있지요.”
“환영합니다. 가주님.”
“···염 부총관은 산서의 무관을 어디까지 말아먹었는지 보고서부터 작성해 가져오시오. 내가 삼도상단의 상단주로 진가장의 사업 확장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소.”
“······.”
염태중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며 창백해졌다. 산서의 진가장 무관은 오로지 염태중 소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분은 진가장과 역사를 함께한 사마충 총관으로···.”
“···총관 그대는 여전히 맹주에게 충성하고 있지 않소?”
“아, 아닙니다.”
“맹주는 사사로이 내 조카가 되지만, 무림맹과 진가장은 별개요. 총관은 아예 무림맹으로 자리를 옮기시는 편이 좋겠소.”
총관이 비연이 가주가 되는데 도움을 줬어도 상관없었다. 총관과 부총관은 진가장에서 필히 쳐내야할 종기와 같았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
옥비연은 첫날부터 날카로운 안목과 업무 능력을 드러내며 좌중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 새끼는 얼굴부터 먹고 들어간다니까.’
호충은 숙부임을 알고도 여전히 비연의 얼굴에서 눈을 못 떼는 호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저는 필요 없겠습니다. 숙부.”
“뭐가 그리 급하냐. 며칠 머물다 가라. 이곳은 네 집이기도 하다.”
“······.”
애초에 짜인 각본에 따른 말이었지만, 지금까지 진가장에서 들어보지 못한 말이라 생소하면서도 가슴이 푸근해졌다.
‘본래 이것이 가족이거늘···.’
“···하루만 더 머물지요.”
“어허. 급한 일이라도 있느냐?”
“화산파에 가봐야 합니다. 예전에 인연이 닿았던 화산의 옛 스승님들이 저를 보자 하셨습니다.”
진가장의 무사들은 어제 봤던 매화검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파라면 붙잡을 수 없지.”
“이만 물러가있겠습니다.”
“그래. 가보아라.”
호충은 회의장에서 물러나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가주자리는 넘겼고···. 이제 복수를 마무리할 시간이로구나.’
숨 가쁘게 흘러간 일들이 마무리를 앞두고 있었다.
‘남은 것은 한 놈이군.’
***
호충은 몸을 숨기고 원로원을 살폈다.
‘···진가장의 무사가 저길 지키고 있어?’
원로원 앞 나무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 됐군.’
진무검을 말끔하게 처리하는데 증인이 되어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진무검의 사인(死因)은 자연사로 확정이다.’
당장이라도 원로원에 쳐들어갈 것 같았던 호충은 몸을 돌렸다.
오늘 저녁 진가장의 가주가 된 옥비연과 함께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 혼자 갈 일이 아니지···.’
***
늦은 밤.
옥비연과 호충이 검은 무복을 입고 나섰다.
“원로원을 지키는 진가장의 무사는 누군지 알아봤어?”
“황 대주에게 물으니 강여홍이라는 이름의···.”
“강여홍? 그 녀석이 지키고 있었어?”
“아시는 무사입니까?”
“예전에 호성이 새끼 두드려 팰 때 옆에 있던 놈이야. 녀석의 검술을 지도해주던 녀석이거든.”
“끈 떨어진 연이군요. 그러니 저렇게 한직으로 갔겠지요.”
강여홍은 셋째 호성의 지도 무사였고, 첫째 호현에게 허황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둘째 호중의 명을 받아 원로원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젠 셋 모두 진가장을 떠났기에 기댈 곳이 없었다.
“원로원은 폐쇄될 것이니 앞으로 녀석이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겠어.”
“···녀석이 할 일을 찾아보겠습니다.”
“가주의 아들을 지도할 정도이니 무의 재능은 있을 것이야. 오환검(五煥劍)을 내려서 진가장의 무사들이 익히도록 해줘.”
“푸흐흐. 훗날 맹주의 얼굴이 볼만하겠습니다.”
진호현은 오환검(五煥劍)이 절세의 신공이라도 되는 양 귀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강여홍은 늦은 시간에도 원로원 앞에 몸을 숨기고 임무에 충실했다.
“······.”
굳은 그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속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맹주께서는 무슨 생각이시란 말인가.’
그도 귀가 있었기에 어제부터 진가장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막내 공자에게 가주직을 넘겨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
.
.
그는 원로원을 지키며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임무조차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주, 죽어? 이렇게 갑자기?”
원로원에 홀로 지내던 진무검이 갑작스럽게 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
전날 밤. 호충은 원로원 입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전음을 날렸다.
[조용히 진입할 것이다. 이곳을 지키는 녀석은 몰라야 해.]
호충의 전음에 고개를 끄덕인 비연은 호충의 신형을 따라 조용히 원로원 담을 넘었다.
휘익. 휙.
검은 그림자 둘이 원로원 담을 넘어 들어섰고, 곧 진무검이 머물고 있는 작은 전각으로 들어섰다.
호충은 진무검의 처소에 들어와 기운을 은밀하게 몸 밖으로 뿜어냈다. 외부의 누구도 듣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촘촘한 기막이 생겨나고 있었다.
후우웅.
“이제 됐다. 여기서 큰 소란이 일어나도 밖의 녀석은 듣지 못할 것이야.”
“수고하셨습니다.”
스르륵.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보던 진무검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들이 지금 뭐라는 건가.’
사람을 앞에 두고 저들끼리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그보다 너희는 누구냐?”
“······.”
호충은 진무검의 물음에 답할 기회를 옥비연에게 양보했다.
옥비연이 앞으로 나섰다.
“옥가인이라는 여인을 아시오?”
“···그게 누구지?”
“으득.”
비연은 이를 갈며 다시 말했다.
“당신이···. 생각 없이 만나고 미련 없이 버린 여인이오. 삼십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오?”
“흠. 그게 뭐?”
저벅.
진무검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자신의 검을 세워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아들이오.”
“그래?”
“어머니가 나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신 덕분이라 하더군.”
“······.”
진무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신의 검을 들어 허리춤에 꼽았다.
착.
“···네가 내 아들이라고? 난 기억이 없는데?”
“···그렇소? 실로 허무한 일이오.”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옥비연과 모친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말과 같았다.
“날 죽이러 왔더냐?”
“···당신은 그럴 가치도 없어 보이는 군.”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그가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보였다면 오히려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억하지 못했고 미안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래. 무심한 너를 모르고 어미와 나만 너를 원망하며 살았구나.’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사과는 생각도 없으시겠지?”
“훗. 내가 너를 태어나게 해줬다면 네가 감사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
일말의 가책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진무검의 말이었다.
“네 놈에게 전할 소식이 있다.”
“방금 아비라 해 놓고 말버릇이 나쁘구나. 어려서부터 내 손맛을 보지 못하고 자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어.”
우드득.
진무검은 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쓰겠다는 의미였다.
“지금도 늦지 않았지. 애비의 손맛을 보면 다시는 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내가 진가장의 가주가 되었다.”
우뚝.
비연에게 걸음을 옮기던 진무검의 신형이 순간 멈췄다.
“···내 아들인지 확실지도 않은 네 놈이 가주라고? 어째서?”
“당신의 아들이라 밝히니 아무도 반대하지 않더군. 사마 총관이 내 어미를 기억하고 있었다.”
“···병신 같은 총관에 등신 같은 손자 놈들이로군.”
“여기 당신 손자가 하나 있는데 알아보지 못하는가?”
진무검의 고개가 호충에게로 향했다.
“···음. 진원우 녀석과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그럼 넷째인가?”
비연은 뒤로 물러섰고 호충이 나섰다.
“큭. 그래. 너도 알고 있었겠지. 내가 친 손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분명 세가에서 쫓아냈다고 들었거늘···. 왜 네 놈이 진가장에 들어와 있는 것이냐?”
“둘째 놈은 내가 쫓아냈고, 셋째 놈은 진가장에 잡아 두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 버렸지.”
“···맹주가 남았다. 너희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야.”
“아. 무림맹에서 호현이 놈을 뭉개고 오는 길이다. 이제 진가장에 남은 놈이 없어. 그러니 네가 알지도 못했던 아들에게 가주자리가 넘어갈 수 있지 않았겠느냐? 내가 넘겨드렸지.”
“······.”
자신의 무위를 믿고 있는 진무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결국 이 할애비가 나서서 정리해야하는가. 불효로다. 큭큭. 어차피 내가 차지할 생각이긴 했지만, 공교롭군. 하늘은 내 편이었어.”
“감히 네가 효를 입에 올리나? 자식을 죽인 애비가 할 말은 아니지.”
“!”
“네가 어찌 진원우의 과거사를 알 수 있었겠느냐? 다 내가 알려주었기 때문에 네가 안 것이다. 네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들을 죽여 화풀이를 했으니···.”
“헛소리!”
“그럼 이것도 헛소리라고 해봐라. 너는 며느리를 범하려다 실패하고 결국···. 내 어머니를 무참히 살해했지.”
“훗. 거기까지 알았더냐? 크흐흐. 결국 이렇게 후환을 남겨 귀찮게 하는 군.”
진무검은 애초에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