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王師)
***
여기 무공 수련에 푹 빠진 인물이 또 있었다.
스륵.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흐흡.”
스르륵.
위장성에 높다란 전각 속에 감춰진 작은 마당이었다. 주변이 높은 담과 전각으로 막혀 있었지만, 하늘이 보이고 있었고, 진휘평은 햇살이 비추는 가운데 정해진 호흡을 따르며 목검을 들어 느릿하게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휘익.
진휘평이 펼치는 초식은 월하답보(月下踏步)의 초반부였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이 옳습니다. 월하답보는 강맹하게 펼치는 다른 검법과 다릅니다. 지금 잘 하고 계십니다.”
송 영감은 진휘평 곁에서 월하답보를 하나씩 가르치고 있었다.
스윽. 탁.
지금까지 배운 부분을 모두 시연한 진휘평이 목검을 수납했고, 송 영감은 치하를 멈추지 않았다.
“아주 잘 하셨습니다. 이대로 배우시면 조만간 중반부도 배우실 수 있겠습니다. 검에 재능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공자님께서 여태 보이신 무(武)의 재능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습니다.”
“스승님이 훌륭하셔서 그렇겠지요.”
“어휴. 스승님이라니요. 그저 검을 익혀 조금 봐드리는 것뿐입니다.”
“충이가 입이 닳도록 말했습니다. 검법으로 중원제일검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입니다.”
“허허. 공자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하셨습니다.”
“금칠이라니요. 하오문의 태상방주이시고 월하검문의 문주님이 아니십니까.”
‘노비에 불과했던 내가 왕사(王師)가 될 줄 누가 짐작할 수 있었을까.’
송 영감이 진휘평을 가르치는 것은 호충이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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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충과 함께 위장성에 돌아온 송 영감은 왕야의 깊은 감사 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간 충이를 길러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왕야.”
“아비는 자식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는데, 이리 훌륭히 키워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왕야께 외람된 말씀이오나···. 공자님은 제게도 자식 같은 분입니다. 자식을 길렀는데 누구에게 치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허허. 그리 말씀하시니 제 입이 턱 막혀버립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길렀는데 어찌 은혜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호충이 녀석에게 어르신을 양아버지로 삼아 극진히 모시라 하겠습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거두어주십시오.”
“호충아. 내 말 들었지?”
진휘평의 부름에 호충이 나섰다.
“애초에 어르신을 양아버지가 아니라 부모처럼 믿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염려치 마십시오.”
“허허허.”
“아버지. 아버지께 어울릴 무공을 찾았습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할 때가 아니지 않느냐.”
호충이 이 얘기를 꺼낸 것은 두 사람이 더욱 가까워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공서는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응?”
“홀로 무공서를 읽는다고 무공을 익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예 아버지의 스승님이 되실 분을 모시고 왔지요.”
호충은 송 영감의 등을 밀었다.
“어르신이 바로 아버지의 스승님이 되실 겁니다.”
“공자님.”
“어르신은 하오문의 태상방주이자 월하검문의 문주입니다. 앞으로 월하답보를 아버지께 가르쳐드릴 것입니다.”
“허허허. 그거 좋구나. 앞으로 어르신을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아니 그건···.”
그렇게 호충에게 등이 떠밀린 송 영감은 진휘평의 검술 스승이 되어야 했다.
.
.
.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스승님.”
“······.”
매번 자신을 깍듯하게 스승님으로 부르니 이제 송 영감도 반쯤 포기였다.
“말씀하십시오. 왕야.”
“월하답보를 조금 익혀보니 여인들이 익히기에 알맞은 부드러운 검으로 보이는데, 호충은 어찌 이 검법을 중원제일이라 칭하는지요?”
초기엔 모를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아직 초반부만 익히셨기 때문입니다. 중반부로 넘어가면 열 배 이상 어려워지고 후반부로 가면 절대를 논할 정도로 강맹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만으론 모르겠습니다. 제자의 궁금증을 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연을 보길 바라는 진휘평이다.
“청하시니 보여드려야지요.”
송 영감은 주변을 돌아보고 생각했다.
‘후반부 초식을 검으로 발휘하면 전각과 담이 문제이니···.’
송 영감의 눈이 하늘로 향했다.
“혹여 전각이 무너질까 두려우니, 기운을 하늘로 쏘아 보내겠습니다.”
“허···.”
진휘평은 월하답보의 가벼운 초식만 배운 상태라 전각이 무너진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제가 보일 초식은 월하답보 후반부의 월광난무(月光亂舞)라는 초식입니다.”
일전에 신투 흠양신에게 맛만 보여준 초식이었다.
송 영감은 검을 들지 않고 보법을 밟으며 움직이다가 두 손을 펼쳤다.
“!!”
진휘평은 송 영감의 손에서 시작되는 기운의 응집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어찌 인간의 손이 빛을 머금을 수 있는가.’
마치 작은 달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한 기운은 곧 하늘로 쏘아져 나갔고, 연이어 다른 달이 하늘로 날아갔다.
파바바박.
작은 마당을 빙글빙글 도는 송 영감의 두 손에서 무수히 많은 소월(小月)이 쏘아져나가고 있었다.
소월(小月)은 전각을 훌쩍 넘어 상공에 도달해 서로 맞닿아 폭발음을 냈다.
퍼벙. 펑. 퍼버펑.
“······.”
실로 꿈을 꾸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시연을 마친 송 영감이 진휘평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밤에 보셨다면 더 잘 보셨을 텐데 아쉽습니다.”
“···전각이 무너진다는 말씀을 이제야 이해하겠습니다.”
이정도 파괴력이라면 전각이 무너지고도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허허. 왕야께서도 영단을 취하셨으니 금방 고수가 되실 것입니다.”
“며느리도 그렇고 스승님도 그렇고···. 하오문의 고수들은 전부 이와 같습니까?”
“하오문의 방주들은 모두 공자님께 무공을 배웠습니다. 저희는 공자님에 비하면 태양아래 반딧불에 불과합니다.”
“허허허.”
헛웃음을 흘리던 진휘평은 다른 궁금증을 생겨 물었다.
“그럼 중원 무림의 고수들은 어떻습니까.”
“흠···. 정파 무림의 무림인들은 상승 무공을 입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아직 배움이 부족합니다. 물론 상승 무공을 숨기고 전부터 익힌 무림 방파도 있으나, 외부로 드러낼 수 없었기에 완성도가 떨어지는 편이지요.”
아무리 상승 무공을 익혀도 타 문파의 무림인과 서로 대련하며 초식에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홀로 숨어서 상승 무공을 익히니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작은 변초 하나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상승 무공은 완성된 이류 무공보다 못하다 평할 수 있었다.
“허허. 그럼 하오문이 중원에서 가장 강하겠습니다.”
“···중원 무림에 정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요.”
마교는 상승 무공을 숨기고 익혀왔기에 정파 무림과 하오문이 극도로 경계하는 것이다.
“마교가 있었지요···.”
“지금의 하오문이 전력으로 상대해도 양패구상(兩敗俱傷)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좋게 말해서 양패구상이다. 문도 수는 하오문이 많지만, 실제로는 고수의 질과 숫자에서 확연히 밀리고 있었다.
“마교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존재할지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일전에 마교의 장로 둘을 죽이긴 했으나, 이는 공자님의 전공이지요. 공자님 혼자 마교 전부를 상대할 수 없으니···.”
“그럼 마교를 어찌 상대한단 말입니까?”
“정파 무림에 상승 무공과 영단을 전한 것은 이를 위함입니다. 이미 중원 전역에서 마교와 정파의 충돌이 진행되고 있지요. 하오문은 은밀하게 정파 무림을 지원하며 둘의 싸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 충돌은 정파 무림의 전력 상승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상승 무공을 익히고 실전에 임하는 것은 대련보다 나은 효과를 보인다. 극도로 긴장하여 집중하고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니 대련보다 좋을 수밖에 없다.
“다만 일부 무림인들의 피해는 감수해야겠지요.”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숙련도만 높아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죽고 죽이며 강한 무인이 살아남을 것이고, 살아남은 자가 고수의 반열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후우.”
“대계를 위한 희생입니다. 부디 왕야께서 이들의 희생을 기억해주시길 바랄뿐이지요.”
이제 진휘평도 무림인이었고, 아들 호충은 무림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대계가 성공하면···. 중원 무림은 과거의 성세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꼭 그리 만들겠습니다.”
“허허. 왕야의 뜻이 펼쳐지길 기원하겠습니다.”
송 영감은 먼 미래의 일보다 당장의 일이 걱정이었다. 자신에게 왕야를 맡기고 호충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공자님께서 잘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진휘평도 위장성을 떠난 호충을 떠올렸다.
“어딜 가서든 제 몫을 차고 넘치게 하는 놈이니···. 스승님이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워낙에 풍운(風雲)을 몰고 다니는 분이라 걱정이지요.”
“허허.
***
“왕야 녀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계가 차질 없이 진행되어도 항상 염려해야할 판이었는데, 대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진휘평을 잃어버린 마교였다. 그 와중에 교주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마화평이 죽었고, 장문소까지 잃었다. 이어 마승단이 군부와 얽혀 크게 충돌했으며, 흉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정파 놈들은 도처에서 날뛰고···.”
중원 전역에서 벌어지는 마교와 정파 무림의 충돌로 인해 교주는 골머리가 아파왔다. 서안에서 시작한 충돌이 중원 전역으로 번지는 것이다. 정파 무림의 부족한 정보력으로 어떻게 마교의 지부를 찾아내는지 기이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남경에선 황궁이 지랄이고···.”
왕야를 잃어 난감한 와중에 대계를 위해 이어두었던 남경의 정보단은 황궁의 관인들과 충돌하며 대부분 와해되어 버렸다. 처음 충돌로 관인들이 죽자 황궁의 고수가 출동한 것이다. 황궁의 절정 무사들이 나서고 군부까지 합세해 마교를 적대했다. 거기다 마교도의 위치를 파악한 하오문이 은밀하게 위치를 알리니 어찌 남경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아직 일부의 교도들이 남경에 남아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일부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한참 전에 교의 장로를 살해한 놈은 어디로 튀었는지 찾지도 못하고···.”
마한로를 쫓던 은마단이 서안에서 청해까지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애초에 서안에서 놓친 것부터가 문제였다.
“조부는 교와 연을 끊었다며 나 몰라라···.”
은마단의 마휘는 노야산에서 연만호를 만났다고 보고했기에 흉수를 찾지 못했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부는 연씨 가문을 잇기 위해 제자까지 들였다고 하니, 교에 도움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도무지 되는 일이 없군.”
교주 연소문의 팔이 힘없이 의자에 올라갔다.
턱.
의자 팔걸이엔 예전에 없었던 빛나는 물체가 장식되어 있었다. 양쪽 팔걸이 위에서 교주전을 환히 비추는 구체는 바로 얼마 전에 입수한 야광주였다.
“···흐음.”
교주는 매끄러운 야광주를 쓰다듬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당장이라도 교주직을 버리고 심산유곡에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지만, 점차 마음이 차분해졌다.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도 야광주 덕분이라 생각했지만, 녹색의 빛은 치명적인 위력으로 인간의 몸을 관통하며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