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232)

둘이 아니라 셋

***

조저우는 객잔으로 돌아가는 길에 과거를 회상말했다. 곽건을 보고 흑패주로 살아온 자신의 과거가 떠오른 탓이다.

“···저도 곽건 녀석처럼 흑패가 전부라 생각한 때가 있었지요.”

옥비연은 조저우가 하오문에 들기 전의 불리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 무인은 허창흑패에서 정(丁)이라 불렸다고 했지?”

정(丁)은 보통 건축 현장에서 못을 부르는 말이었는데, 조저우의 주먹에 맞은 놈들이 그 자리에 못처럼 우뚝 서서 정신을 잃었기에 붙여진 별호였다. 별호 자체는 멋있다고 할 수 없지만, 무공을 상당한 수준으로 익힌 무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별호였다.

“허명에 불과했지요. 허창흑패는 제 뒤를 이은 놈에게 넘겨주고 저는 하오문으로 넘어왔습니다.”

곽권처럼 한 지역의 패주로 군림한 과거가 있었지만, 미련을 버리고 하오문에 투신한 것이다.

“놈들을 거느리며 제가 왕이라도 된 줄 알았습니다. 거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누구든 문주님을 만나면 세상이 뒤집어지지.”

흑패를 거쳐 하오문에 입문한 이들 중 호충을 만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 흑패를 정리하는 일에 문주인 자이 가장 앞장서야 한다는 고집때문이었다. 덕분에 중원 전역의 흑패들은 문주의 무위를 뼈에 각인하고 있었다.

“예. 흑패로 살며 무림인들도 숱하게 봐왔지만, 문주님과 같은 천외천(天外天)의 무인은 처음이었습니다.”

조저우의 인생에 전환점을 맞이한 날이었다. 또한 많은 흑패의 조직원이 단 한사람을 상대하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날이다. 조저우는 자신의 전부였던 흑패가 한순간에 와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자신보다 대단한 주먹패는 없을 거라는 자신감도 그날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그날 저는 문주님의 끝도 없는 힘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문주님께서 풀어내시는 무공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있더구나.”

“하하. 저도 수련관에서 가끔 문주님의 신위를 목격할 일이 있었는데, 알면 알수록 멀게만 느껴졌지요.”

“그래도 조 무인이 상당히 발전한 것은 사실이야. 이젠 멀게나마 느낄 수 있지 않나? 예전엔 감도 못 잡았지.”

허창의 패주로 있던 당시에 이류 끝자락에 있던 조저우는 이제 절정을 눈앞에 둔 일류무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예. 그래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흑패를 뒤로하고 이렇게 하오문의 무인이 되었지만, 덕분에 무공을 깊이 있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문주님과 방주님들을 보며 뒤따르겠습니다.”

“······.”

비연은 앞선 자신을 뒤따른다는 조저우의 말에 자신이 객잔을 나서며 가졌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상방이면 어떻고 배방이면 어떤가. 하오문도의 모범이 되어야할 방주가 이기심으로 방을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 앞으로 상방의 방주를 기꺼이 맡을 것이다.’

“좋은 생각일세. 나도 문주님 뒤에서 기꺼이 따르지.”

“예. 저도 방주님 곁에 설 그날까지 무공을 연마하겠습니다.”

“어쭈? 날 넘어설 생각이냐?”

“감히 관주님을 어찌 넘어서겠습니까. 저는 한 발짝 뒤에서 따르겠습니다.”

“푸흐하하. 능력만 되면 몇 발짝이든 앞서가 보아라. 그만한 재능이 있다면 문주께서 크게 대우하실 것이야.”

조저우는 조용히 포권으로 답했다.

“······.”

‘이젠 하오문이 제 모든 것입니다.’

***

삼도상단 일행은 황산에서 칠(七)주야(晝夜)를 머무르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들이 떠나는 길을 멀리서 배웅하는 이들 중에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흑···. 옥 공자님···.”

“······.”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소선이었고, 그녀 곁에는 남궁가의 가주가 난감한 얼굴로 서 있었다.

“흑···. 아버지. 왜 옥 공자님을 벌써 보내세요.”

“그럼 언제까지 붙잡아야 네가 만족하겠느냐?”

남궁곤은 떠난다는 삼도상단의 상단주와 비연을 일부러 붙잡아 며칠을 더 머물게 했다. 그런데도 소선은 더 붙잡지 못했다며 원망이었다.

“···달포는 더 있어야지요!”

“그러다 삼도상단 망해.”

“안 망해요! 남궁가와 거래를 시작하는데, 어찌 망하겠어요.”

“다들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그래도! 저건 아니지요!”

소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활짝 웃고 있는 제갈미와 제갈가주가 있었다. 삼도상단의 다음 행선지가 제갈가로 정해진 탓이었다.

“저들을 옥 공자와 같이 보내시면 저보고 어쩌라고요!”

“······.”

“이러다가 옥 공자를 여우에게 빼앗기고 말아요!”

“······.”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남궁곤이 아들을 불렀다.

“한천.”

“예. 아버지.”

“짐 싸라.”

“예?”

“네 여동생과 같이 제갈가로 가서 잠시 머물다 와. 남궁가의 대공자가 언제까지 황산이라는 작은 지역에만 머물 수 있겠느냐? 너도 나이가 있으니 세상 구경을 하며 경험을 쌓아야지. 제갈가의 인물들은 영민하기로 유명하니 부족한 네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한천을 함께 보내는 것은 소선을 위한 핑계였다.

“······.”

한천은 황산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월향 때문에라도 멀리 나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는 아직 가주님 밑에서 배울 것이-”

한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구리로 앙증맞은 주먹이 힘차게 날아들었다.

뻐억.

“컥!”

소선은 온몸을 뒤틀어 힘을 축적한 권(拳)을 한천에게 선사하고 가뿐하게 대답했다.

“아버지. 오라버니도 좋다고 하네요. 저도 얼른 짐을 쌀게요.”

“···오, 오냐.”

소선은 짐을 챙긴다며 후다닥 장원으로 들어갔고,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은 한천이 남았다.

“끄윽. 끅.”

“어디 안 부러졌냐?”

“숨을 쉴 수가···. 허흑.”

남궁가주는 아들의 등을 두드려 숨을 틔워주며 말했다.

“그러게 왜 저 녀석 신경을 자꾸 건드려?”

“이렇게라도 풀어야 녀석의 화가 가라앉지 않겠습니까. 딸은 출가하면 끝이라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는데···.”

남궁곤은 고개를 저으며 아들의 말을 정정했다.

“만약 소선이 옥 공자와 맺어지면, 옥 공자의 황룡살도를 익히게 될 터. 소선이 아쉬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녀석의 무공에 대한 목마름을 비연이 채워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소선에게 밀리지 않으려거든 창궁무애검법을 더욱 연마해야 할 것이야.”

“···뼈를 깎는 수련을 이어가겠습니다. 가주님.”

밖에선 허술한 모습을 보이지만, 무공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나저나 제왕검형에 진전은 있으셨습니까?”

“···아직 멀었다. 상단주의 무위를 보니 더욱 까마득하게 느껴지더구나.”

“저도 일전에 비연의 황룡살도를 보고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녀석의 황룡살도는 지금···.”

송 문주의 무공을 견식하고 다음날 옥비연의 무공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불과 달포 전에 확인했던 무위와 차원이 달랐다.

‘영단의 힘이 그렇게 컸던가.’

남궁곤은 그 차이가 영단으로 인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어쨌든, 얼른 짐 싸서 출발해라. 그리고 돌아와서 다시 수련을 시작하자.”

“예. 가주님.”

***

옥비연과 길을 떠나며 미소를 숨기지 못하던 제갈미는 멀리서 달려오는 두 필의 말을 볼 수 있었다. 제갈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더 이상 미소가 아니었다.

‘저 년이 또!!’

일그러진 제갈미의 표정을 더욱 일그러지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 공자니이이임!!! 저 왔어요오오오!”

“아. 소선 낭자.”

“나도 왔다. 비연.”

“···넌 또 왜?”

“까라면 까야지.”

“······.”

이 상황이 탐탁지 않은 것은 제갈 가주도 마찬가지였다.

“남궁가의 대공자가 어쩐 일로?”

“···잠시 신세 지겠습니다. 가주께서 제갈가에 가보라고 명하셨습니다.”

한천의 기질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대공자께서 제갈가에 올 이유가···.”

“제가 부족함이 많아 가주님의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원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제갈가에 가서 많은 것을 보고 익히라 명하셨습니다. 부디 거절치 말아주십시오.”

아들이 멍청해서 보낸다는 명료한 뜻이었다.

“······.”

제갈미가 아비인 제갈진을 보며 무언의 압박을 주었지만, 방법은 없었다.

“···어쩔 수 없군.”

“가주님!”

“이미 우리가 남궁가에서 신세를 졌으니, 어찌 대공자를 돌려보낼 수 있겠느냐.”

“···하아.”

안 그래도 밉상인 소선이 여기에 한 마디를 보탰다.

“앞으로 잘 부탁해.”

“······.”

미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소선을 노려봤지만, 이미 정해진 일을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옥 공자님 곁은···. 중립지대다. 알았어?”

“당연하지.”

“······.”

‘하아. 하나를 겨우 떼어냈나 싶었더니, 도로 둘이 되다니···.’

비연은 다시 둘이 된 골칫덩이를 보며 속으로만 한숨을 쉬고 있었다.

“비연! 같이 가자. 하하하.”

“······.”

‘둘이 아니라 셋이구나.’

한천까지 더해 셋이라고 해야 맞았다.

***

섬서성 서안의 하오문 본단은 오랜만에 문주를 맞이했다.

“문주님.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감축 드립니다.”

문주가 없는 동안 하오문의 대소사를 맡았던 사중환이 호충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중환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이었다.

“문주님 덕분에 하오문의 이름이 중원 전역에 진동하고 있습니다.”

숨죽이던 하오문이 이제 기지개를 켜고 비상하고 있었다.

“사 방주 혼자서 많이 바빴지? 하오문의 업무도 봐야 하고, 패방 관리하랴, 수련관 살피랴···.”

본래 본단에서 함께하던 송 영감과 옥비연까지 밖으로 내돌렸으니, 사중환이 홀로 모든 업무를 떠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말동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서 수련관 일손을 조금 덜었습니다.”

“큭. 그 작은 놈이 도와봤자 뭘 도와줘?”

“예전의 말동이 아닙니다. 장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컸습니다.”

“아! 녀석이 올해 열여섯이 됐지?”

예전 자장에서 초보 소매치기 일을 할 때의 말동은 충분히 먹지 못해 왜소한 체격을 보였으나, 하오문에서 제공되는 충분한 식사를 통해 고르게 영양을 공급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사중환의 말대로 이젠 성인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크게 성장한 말동이다.

“말똥이가 순한 것 같으면서도 한 성깔 하잖아.”

“큭. 뭣도 모르고 대드는 놈들이 좀 있었지요. 말동이가 가끔식 털어주는 덕분에 고분고분합니다. 특히 말동이는 개방 소속 수련생을 확실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말똥이 녀석도 그렇지만, 나와 함께 온 왕호 녀석도 있으니, 일 좀 나눠서 해. 흑림방 애들도 자기 몫은 하니까 써먹기 편할 거야.”

“예. 문주님.”

호충도 할 일이 많았다. 잠시 하오문을 떠나 아버자기 가신 변방으로 가야했기에 그 전에 하오문의 급한 일을 처리할 각오였다.

호충은 며칠간 하오문 본단에 머무르며 각지에서 올라오는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고, 특히 수련관에 입관하는 많은 문도들의 일을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소는 한정되어 있는데, 입관하는 이들은 한도 끝도 없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서안 근방의 여산에 새로운 수련관을 짓겠다. 이번에 대량의 자금이 수혈되었으니, 어렵지 않을 것이야.”

“새로 들어오는 수련생들을 인부로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마침 개방에 들일 놈들이 많으니, 녀석들에게 삯을 주고 써먹을 수 있겠군. 수 천 명이 먹고 잘 수 있는 숙소와 훈련소까지 건설해야 할 것이야. 거기서 입관한 수련생들을 훈련시키고, 이곳은 하오문의 고수라 부를 문도들이 수련할 장소로 제공하기로 하지.”

“여산 근방에 온천이 많으니, 하오문의 휴양소를 건설해도 좋겠습니다. 하오문도가 사용하기 위함이지만, 평소엔 외지인들을 상대로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오오. 그간 사 방주가 하오문의 행정일을 맡아서 그런가? 좋은 제안인데?”

“······그리고 방금 들어온 나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문주.”

“나쁜 소식?”

“···진가장의 전대 가주께서 운명을 달리하셨다고 합니다.”

사중환은 호충이 큰 슬픔이 보이리라 여겼는데, 호충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진원우가 죽어?”

“···예.”

“호오. 죽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누가 죽였단 말씀입니까? 분명 전대 가주는 원로원에 계셨는데···.”

“전전대 가주가 죽였을 것이다.”

“!”

놀란 사중환에게 호충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내가 루방에서 얻은 정보를 원로원의 진무검에게 보냈거든.”

“무슨 정보를 보내셨기에···.”

자식이 아비를 죽일 정보가 세상에 존재할까 싶었다.

“진원우가 진무검을 관부에 고발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알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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