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
한천은 친우를 생각하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가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물건일 진데···.”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 중요한 물건이라고요? 그것도 무엇보다 중요한 물건?”
‘대체 뭐지? 가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물건이?’
소선은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 상황을 다시 입에 올렸다.
“그러니까 가문에 상당히 중요한 물건인데 상대는 그걸 알고도 가치를 올리지 않는다는 말씀이세요? 상당한 이익을 챙길 수 있는데 도요?”
“정확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가문엔 나쁘지 않을 일이잖아요.”
“물건을 가져온 이는 더 받지 않으려 용을 쓰고 있다. 더 받기 싫다는 거야.”
소선은 간단하게 결론 내릴 수 있었다.
“그럼 달라는 대로 주면 되는 끝나는 일이 아닌가요?”
“문제는 우리 가문이다. 아버지와 총관은 어림도 없다는 생각이시거든. 가문의 중요한 물건이니 그에 걸 맞는 값을 치러야 옳다고 생각하신다.”
그제야 소선은 일의 앞뒤를 파악했다.
“뭔가 뒤바뀐 모습이네요. 물건을 파는 사람은 더 받고 싶어 해야 옳고, 사는 이는 더 싸게 사고 싶어 하는 법인데···. 괴이해요.”
“그래. 상당히 괴이한 상황이지. 사는 이는 더 주겠다며 난리고, 파는 이는 그렇게 비싸게 팔 수 없다고 강짜를 놓고 있지.”
“대체 그 중요한 물건이 뭔데 그래요?”
“······미안하지만 이 부분은 알려줄 수 없구나. 나중엔 너도 알게 될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휴우. 협상이 필요하겠네요. 가주이신 아버지가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그 고집을 어떻게 꺾어요.”
“그래서 내가 나섰다. 내 벗이 가져온 물건이라 내가 협상에 임했고···.”
소선은 벗이라는 말에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오라버니의 벗이 누구신데요! 저도 아는 가문인가요?”
그것이 궁금해서 늦은 시각 오라버니의 방까지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너는 모르는 이다. 오래 사귄 벗은 아니나, 마음이 가는 이다. 무림의 후지기수는 아니지만, 무공 또한 뛰어나지.”
“오오.”
소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지금 그 벗은 중소상단에서 상단의 후계자로서 일을 배우는 중이다. 벗은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이름도 멋있더군. 옥비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벗이다.”
“어머, 어머.”
‘그의 이름이 비연이었어. 옥비연.’
“어쨌든 그래서 내가 벗과 따로 만나 얘길 나눴는데,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금액에서 한참이나 모자라서 어찌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오늘 자신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그 사람이 관련되어 있어서 일까? 소선은 짧고 확실하게 답을 내렸다.
“더 주셔야죠. 절대로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에요.”
방금까지 뱉었던 말과 반대되는 주장이었다. 한천은 이를 이상타 여기지 않았다. 자신도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아는데, 벗의 고집이 만만치 않아.”
소선은 오라버니가 왜 그에게 고개를 숙였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는 그에게 자신의 사정을 봐달라고 하셨던 거야. 하지만 그는 결국 사양했어. 우리 가문을 위해서!’
“그 분의 상단은 어떤 상단이죠? 제가 아는 상단인가요?”
“음. 아직 그리 큰 상단이 아니라 너는 모를 것이다. 삼도상단이라 하더구나.”
“저 알아요! 여인에게 필요한 물품이 상당히 많은 곳이거든요.”
“그래?”
삼도상단은 호충이 마음먹고 키우는 상단이었고, 하오문 산하의 방을 중심으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차를 유통하기도 하지만 중원 전역에 퍼져있는 하오문 루방 지부에도 물품을 공급하기에 여인에게 필요한 물품들의 판매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 과정에서 기루에만 물품을 공급하지 않고 외부에 추가로 판매했기에 여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삼도상단이 제법 이름을 알렸던 모양이군. 하하.”
“그 상단의 품질은 알아주거든요. 다른 곳은 낮은 품질의 물건을 비싸게 받으려고 하는데, 거긴 좋은 품질을 제값에 팔아요. 질 나쁜 분이 없더라고요. 종류도 얼마나 다양한지 몰라요. 매달 새로운 물건이 나와서 용돈이 부족할 지경이에요.”
“그랬겠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상단이라 했으니 응당 그랬을 것이야.”
소선은 어떻게 해야 그에게 더 많은 이익을 돌려줄 수 있을지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삼도상단과 계약을 맺으세요.”
“계약?”
“당장 받지 않겠다면 천천히 주면 되는 거잖아요. 가문에 필요한 물품을 삼도상단을 통해서 구입하면 조금씩 이익을 몰아줄 수 있어요. 어차피 우리 가문에 호의를 가졌다고 하니 상단도 거절하지 않겠지요.”
“그에게 가문과 거래할 수 있도록 건의는 해보겠다고 했었지···.”
“건의가 아니라 확정하세요. 아버지도 결국은 자신의 뜻대로 된다 생각하실 터이니 허락하실 테니까요. 게다가 그들이 공급하는 물건은 믿을 수 있어요. 가문에도 나쁠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옳다. 네 생각대로 해보마. 이번 물건의 가격을 낮춘 대신에 앞으로 꾸준히 가문과 거래해서 이익을 넘겨주는 방향으로 말씀드리겠다.”
소선은 삼도상단과 거래하면 그를 더 자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마음에 번졌다. 하지만 곧 다른 가정이 떠올랐다.
‘···그가 여기 안 오면 아무 소용도 없잖아?’
소선은 얼른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단! 조건이 있어요.”
“조건? 네가 왜 조건을 달아?”
조건을 달아도 아버지가 달아야 맞지 않겠는가.
“서, 서로의 신뢰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라고욧!”
“···들어나 보자.”
“물건을 납품 할 때는 상단의 후계자가 직접 가문에 와야 해요.”
“그러면 벗이 많이 바쁠 터인데···.”
‘바빠도 와야지! 내가 보고 싶단 말이야!’
“매번 올 필요는 없지만, 최소 달포에 한 번은 가문에 와서 인사를 해야지요. 그래야 서로 친목을 유지해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라고요.”
“맞는 말이긴 하군. 나도 벗을 자주 보고 싶으니 말이야.”
‘그래야 저도 노려볼 기회를 얻지 않겠어요?’
한천은 비급의 대금을 줄인 대신 삼도상단과 계약을 통해 이익을 몰아준다는 소선의 계획이 실로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도 친우도 서로 고개를 끄덕일 방법이었다. 또한 삼도상단과 계약하면 자신의 친우를 더욱 자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소선이 네 덕분에 내 고민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하하하.”
“별 말씀을요.”
“그나저나···. 내 방엔 왜 온 것이냐?”
“······.”
소선은 이곳에 온 목적을 모두 달성한 다음이었다.
“···그저 별일 없으신가 하고요.”
“내가 아버지께 맞았는지 확인하러 온 것이냐?”
“···겸사겸사?”
“······.”
한천은 검지를 들어 방문을 가리켰다.
“나갓!”
“쳇. 걱정해서 왔더니.”
이들도 보통의 남매와 다를 것 없었다.
“걱정은 무슨 걱정! 저번처럼 날 놀리려고 했겠지.”
예전에 아버지께 된통 혼이 났을 때 퍼렇게 멍이든 눈을 보며 놀렸던 소선이다.
“그러니 밖에 나가서 아무 여인이나 희롱하지 마시라고요! 내가 부끄러워서 밖에 돌아다니질 못하겠어요. 제 또래 벗들이 멀리 오라버니만 보이면 다 도망치는 거 알아요? 혹시 말이라도 거나 싶어서 얼마나 무서워한다고요.”
“이제 그럴 일 없다! 앞으론 그런 망상에 빠지지 않을 테니까.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아.”
남자와 여자의 일은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음을 깨달은 한천이다. 자신이 선택한 여인과 만나 사랑을 나누고 결실을 맺는 것이 허황된 바람이라는 깨달음이다.
“오오. 비연 오라버니가 도와주신 건가요?”
“···그래. 벗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지.”
“역시···.”
소선은 비연이 생긴 것만큼이나 속이 깊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역시는 무슨 역시. 그리고 비연이 왜 네 오라버니야? 네 오라버니는 나잖아!”
“오라버니의 벗을 그럼 뭐라고 불러요? 가가? 잇힝.”
한천은 혼자 가가라고 불러놓고 몸을 뒤트는 자신의 여동생을 보며 못 볼꼴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나가라고!”
“내일 그 분이 언제 오시는지는 알아야 나가죠!”
“그걸 네가 왜 궁금해 해?”
“·········그냥?”
“괜히 이런 일까지 신경 쓰지 말고 무공이나 더 익혀.”
“제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은 다 익혔어요! 나머지는 소가주 전용 무공과 가주님만 익히는 가전무공밖에 없단 말이에욧!”
“···어, 어쨌든 나갓!”
한천은 여동생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냈고, 소선은 결국 그가 언제 가문으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 오시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
다음날 호충은 남궁 가에서 보낸 사람을 따라 가주전으로 들어섰다.
“가주님을 뵈옵니다. 삼도상단의 옥비연입니다.”
“예의는 무슨 예의를 차리고 그러나. 앉게.”
“감사합니다.”
이미 자리한 한천과 총관 앞에 호충이 앉았다.
“아들놈을 통해 옥 공자의 결정을 들었네. 겨우 그걸로 되겠는가?”
“주인에게 물건을 돌려주고 이익을 챙긴 것이 못내 죄송스럽습니다.”
“허허. 내 고집을 꺾은 것은 죄송하지 않고?”
“···그 부분도 사죄드리지요. 가주님.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가주는 사과가 나오자 얼른 하려던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이번 거래에 조건이 생겼네.”
“······.”
‘조건이라니···.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말씀하시지요.”
“앞으로 삼도상단은 남궁 가에 필요한 물품을 납품해야 할 걸세. 안휘성 곳곳에 퍼진 남궁 가의 상회에 납품하는 것도 포함일세.”
“옛?”
“이 녀석이 아예 확정을 해달라지 뭔가. 삼도상단을 통해 물품을 구입하지 않으면 협상을 무르고 비급을 도로 반납해야 한다고 말이야. 내 명을 거역한 벌일세. 앞으로 삼도상단이 바빠지겠군.”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허. 이건 사양치 않는군.”
삼도상단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대단한 기회였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일개 상인에게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꺼운 마음으로 따르겠습니다.”
“하하하. 멍청한 아들 녀석이 옥 공자의 약점을 알아냈군. 좋아. 아주 좋아. 하하하.”
이후 호충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검보의 대금 육십만 냥을 챙겼고, 향후 남궁 세가에 물품을 공급한다는 계약에 수결까지 끝냈다. 물품의 공급을 위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 부분은 앞으로 사람을 보내 자세히 협의하기로 하였다.
“자주보세. 그대가 달포에 한 번은 얼굴을 비춰야 할 것이야.”
본래 계약 조건에 넣으려던 것이지만, 삭막하게 보일 수 있다며 남궁곤 가주가 직접 얘기하기로 했던 것이다.
“물론입니다. 저희 상단의 최대 고객이신 남궁 세가에 직접 찾아오는 것이 예의지요. 다음엔 상단주이신 외조부와 함께 오겠습니다.”
송 영감과 옥비연을 보내 일을 진행시킬 생각이었다.
‘여기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알려줘야겠구나.’
자신은 다른 곳에서 할 일이 많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상단주님을 뵈는 것도 나쁘지 않지. 헌데···. 혹시 그대의 외조부께서도 옥 공자처럼 무공을 익히셨나?”
“······.”
호충은 송 영감이 익힌 무공을 어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익힌 무공이고, 안 익혔다고 거짓을 말했다가 대면하여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외조부께서는 작은 검문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는 검이 아닌 도를 익혔기에 검문의 후대를 잊지 못했지요.”
“허허허! 역시 남자는 검을 들어야지! 상단주께서 이어오신 검문의 이름은 무엇이던가.”
“월하검문이라 하옵니다. 외조부께서는 월하검문에서 대대로 이어 내려온 검법인 월하답보(月下踏步)를 극성으로 익히셨습니다.”
“월하검문의 월하답보라···.”
대단한 명성을 가진 검문이라고 말하며 상대의 무공을 칭찬해야 했건만, 아는 척을 하고 싶어도 아는 것이 없었다. 남궁 가주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검문과 검법이었다.
‘···전혀 모르겠군.’
“중원 무림에 알려진 적이 없으니, 아마 모르실 것이옵니다. 일인전승 검문이라 더욱 그러하옵니다.”
사실 남궁곤에게 중요한 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명성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었다.
“월하검문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궁금하군.”
“외부에 감춰왔던 터라 말씀드리기 곤란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남궁곤이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