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232)

월하검문

***

호충은 현인과 현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만하면 일차 방어는 됐겠군.’

화산의 제자들을 압박하던 기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훅 사라져버렸다.

“푸헉.”

“허억.”

“다들 앉게. 언제까지 내가 올려다보게 만들 참인가.”

호충은 아예 등을 돌리고 계속 짐을 풀며 말했다.

“나는 차를 준비하겠네.”

“······.”

“······.”

둘은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의 노인이 무림의 고수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신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멀뚱히 서 있을 요량이거든 가서 나뭇가지라도 주워오시게. 손이 이렇게 많은데 늙은이만 고생시킬 생각인가?”

현진은 들었던 검을 내리고 다시 정중하게 물었다.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저희는 노인장의 사문이라도 들어야···.”

현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충의 품에서 회칼이 휘둘러졌다.

후앙. 꽈광.

작은 칼끝에서 뿜어져 나간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두 사람을 지나 멀리 떨어진 커다란 바위를 산산조각 내고서 사라졌다.

송 영감에게 전수한 월하답보(月下踏步)의 검식 중 하나였다.

“!!”

“!!”

‘저 검기가 이대 제자들에게 향했다면 한순간에 몰살당했을 것이다.’

‘빠르고 강력한 검기! 막을 방법이 없다!’

“은인자중한 지가 오래되어 무공을 보일 일이 없었네. 덕분에 힘 조절이 쉽지 않구먼. 월하(月下)검문이라 하네. 정무맹이나 협의맹에 적을 두지도 못한 작은 검문이지.”

꿀꺽.

“허어.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주지 않았는가? 내가 어디까지 해야 믿을 것인가. 나와 검이라도 나눠봐야 알겠는가? 좋네. 모두 오게. 다만 내가 힘 조절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해해줘야 할 것이야. 목숨을 내놓고 덤비라는 뜻이네!”

몸이 굳어버린 현진을 대신해 현인이 얼른 나섰다.

“그, 금방 나뭇가지를 구해오겠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물을 길어오라고 하시게.”

“옙!”

***

주전자에 물이 끓어오르자 호충은 찻잎을 넣어 우려냈다.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한 찻잎이라네. 향이 좋을 것이야.”

“······.”

차가 우러나자 호충이 먼저 차를 호로록 마시며 권했다.

“내가 독이라도 넣었겠는가. 그대들을 적대시했다면 문답이 무용하지 않았겠는가. 보아하니 아직 그대들의 배움이 부족하니 일각이면 충분하겠군.”

현진은 상대에게서 일말의 위화감도 느낄 수 없었다. 노 고수의 말대로 자신들을 상대하는데 한 식경이 아니라 일각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현진이 먼저 주전자에서 차를 따르자 현인과 이대 제자들도 합류하기 시작했다. 따스한 차가 몸에 들어가자 굳었던 몸이 풀렸고, 상대를 향한 경계심도 조금 누그러졌다.

“내 사문을 알렸건만, 그대들의 사문은 듣지 못했군. 도가의 내공을 익힌 것으로 보이는데, 어디서 왔는가?”

‘우리가 도가의 내공을 익힌 것을 알아보다니···.’

현진도 눈앞의 상대가 대적불가의 고수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저희는 화산에서 오는 길입니다. 화산의 일대 제자 현진입니다.”

“저는 현인입니다. 이 아이들은 화산의 이대 제자들입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저마다 포권하며 호충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 화산파라. 화산의 제자들이었군. 나는 월하검문의 삼십칠대 문주 송동석일세. 검문이라는 호칭도 민망하군. 문도는 문주인 나 하나뿐이니 말일세.”

순식간에 송 영감을 문주로 만들어버리는 호충이다.

‘영감. 이제 영감은 월하검문의 문주님이야.’

송 영감의 강제 무림 출두였다.

“내가 괜히 못난 꼴을 보였어.”

송 문주가 자신들 앞에서 엎드려 자비를 빌었던 모습을 떠올린 현인이 얼른 나서서 사과했다.

“저희가 일문의 문주님께 실례가 많았습니다.”

“괘념치 마시게. 항상 이리 살아왔다네. 무림인에게도 감춰야 사문과 무공을 확실히 감출 수 있으니까 말이야. 황궁에 발각되면 사문이 끝장날 것이 아닌가.”

현인은 어째서 월하검문이 무림과 관에 드러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월하검문이 알려지지 않았던 거야.’

사문이라는 말에 현진이 다시 나섰다.

“헌데 월하검문은 어찌된 것입니까. 저는 지금껏 월하검문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습니다.”

방금 펼쳤던 검식은 무림에서 찾기 어려운 고절한 수법이었다.

“허허허.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일인전승이라 세가 약하고 누구도 주시하지 않았지. 황궁의 눈을 피해 무공을 전수하는 것만으로 벅찬 일이었다네.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고 맹에 투신하겠는가.”

“그럼 앞으로도 맹에 입회하실 생각은···.”

“없다네. 그저 내가 죽기 전에 적합한 전승자라도 찾으면 그만일세.”

“꼭 찾으셔야겠습니다. 월하검문의 고강한 무공이 사장되는 것은 너무 아쉽습니다.”

“그럼 그대가 배우겠는가? 현진이라 했지? 그대가 배운다고 한다면 문파의 비전을 전수하겠네.”

“저, 저는 화산의 제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허허허. 그냥 해본 말이네. 자네같이 출중한 인물이 아쉬웠으니 말일세. 자네 나이가 조금만 더 어렸어도 좋았으련만···.”

현진은 출중한 인물이라는 말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아이가 월하검문의 전승자가 된다면···.’

화산이 품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놔줘야 했던 아이였다.

“제가 한 아이를 알고 있습니다. 무림 세가의 손이지만, 무공의 재능이 범상치 않은 아이이지요.”

지금 그 아이가 현진의 눈앞에 앉아 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

호충은 현진이 누굴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왜 또 날 꺼낸단 말입니까. 현진 도장.’

“화산에서 잠시 수련하고 하산했지만, 화산의 제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가에서 주목받지도 않으니, 문주님께서 바라시는 조건에 적합할 것으로 보입니다. 웃어른을 공경하며 주변 모두에게 항상 예의 바른 아이입니다.”

“화산의 제자가 보는 눈은 확실하겠지.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가. 내 꼭 찾아보겠네.”

“진가장의 호충입니다.”

현진의 말에 현인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현진! 어찌 호충을 문주님께 넘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반대일세! 호충은 화산의 제자로 삼아야 해!”

“자네도 알지 않는가. 호충은 화산에서 품을 수 없네. 문주님의 무공이라면 호충도 날개를 달 수 있을 것이야. 게다가 호충은 미래를 약속한 이도 있다 하지 않았던가. 호충을 속가제자로 받아 옭아매고 싶은가?”

초승달 모양의 강력한 검기가 날아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 무공을 호충이 익힌다면 얼마나 대단한 고수가 될 것인가. 호충이 화산의 직전제자가 되지 않는 이상 화산의 매화검법을 가르칠 수도 없었기에 현인은 얼굴만 찌푸렸다.

“끄응.”

“허허. 화산의 일대 제자들이 이리 아끼는 녀석이라니 더욱 탐이 나는구나.”

“부디 호충을 찾아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어차피 송 영감은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이니 나중에 이들을 만나도 할 말이 있을 터였다.

“내 꼭 그리하겠네. 오늘의 작은 인연이 사문의 전승자를 찾게 해주는구먼.”

“부디 호충과 인연이 닿기를 바랍니다.”

“헌데 그 아이는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는가?”

“듣기로 서안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호충이 무성 일행에게 서안으로 향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화산파에 도착한 원로들은 호충과의 만남을 소상히 고했기에 현진도 호충이 서안에 있다고 알고 있었다.

“마침 나도 차 장사를 위해 서안으로 갈 생각이었네. 인연이 이어지려니 이리되는구먼.”

“아! 정녕 그런 모양입니다.”

호충은 입을 삐쭉거리고 있는 현인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차는 입에 맞는가?”

“···향은 좋습니다.”

“유향차라 한다네.”

“부드럽긴 하옵니다.”

“부드러울 유가 아닐세. 유향차는 찻잎을 따는 과정부터 독특하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들이 입술로 따서 가슴에 놓인 작은 바구니에 떨군다네. 그럼 여인의 가슴 향이 찻잎에 배어들지. 그래서 유향차라네.”

“쿨럭.”

사레들려 기침하는 현인을 두고 주변을 향해 말했다.

“차는 마음껏 들게.”

화산의 직전제자들은 성혼하지 않는다. 혼인이 허락되는 것은 오직 속가제자들만이었다.

“여인과 인연이 없을 도인들이지만, 차는 차일 뿐일세. 이런 차에 바람처럼 마음이 흔들리는 도인이라면 도인의 자격도 없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 한 잔 더 부탁드립니다.”

“저도···.”

현진이 차를 더 요구하는 이대 제자들에게 눈을 빛냈지만,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지 않은 이상 그 눈빛을 알아채진 못할 것이다.

“허허허. 얼마든지 들게.”

.

.

.

이후 호충은 현진에게 구박받으며 떠나는 화산의 인물들을 조용히 배웅했다.

‘벌써 익히기 시작했군.’

현진과 현인은 한 번도 검식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들의 몸에서 매화향이 풍기는 기분이었다. 화산에서 개화검결과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현인이 유향차를 챙겨 달라고 했는데, 그건 아는지 모르겠군.”

현진이 이대 제자들의 귀를 잡아끌어 없는 틈에 현인은 호충에게 유향차를 조금 챙겨줄 수 없냐고 물었었다. 화산에서 얻은 재물이 적지 않아 내주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부디 무운을 비오.”

호충은 미련을 떨치고 몸을 돌렸다.

“별 소득은 없겠지만···.”

이들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호충이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들이 얻을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

검게 빛나는 의자는 용과 봉황이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뒤로는 검은 배경에 태양과 달이 그려진 거대한 병풍이 놓여 있었다. 전각의 가장 높은 곳에 홀로 자리한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던 인영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드디어 진휘평이 결론을 내렸어.’

아무리 자식을 두고 협박해도 넘어오지 않았던 진휘평이다. 진휘평은 백성들의 고단함을 듣고서야 대계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넌지시 알렸다고 했다.

“흥. 너도 황가의 인물이라 이거냐? 네가 나선다고 세상이 달라질 성싶으냐?”

교주는 코웃음을 치며 진휘평의 결정을 깎아내렸다.

“모든 것은 내 뜻대로 결정될 것이다. 너는 허수아비일 뿐이야.”

시비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교주님. 마 장로가 뵙기를 청하나이다.”

이미 다녀갔었던 마화평이 주변 성읍을 배회하다가 다시 신강으로 돌아온 것이다.

“들라 하라.”

“예.”

시비가 뒷걸음질로 물러나고 마화평이 들어왔다. 그 곁에는 진휘평도 함께였다.

“재림천마 만마앙복. 만세. 만세. 만만세. 장로 화평이 교주님을 배알하옵니다. 긴 외유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진휘평은 마화평이 교주에게 하는 인사를 듣고 말했다.

“···내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것은 황실을 능멸하기 위함이던가?”

만세는 오직 황제에게만 허락된 인사였다. 그 외의 인사가 만세로 인사를 받는 것은 역모죄에 해당했다.

“하하하.”

진휘평이 자신 앞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음에도 교주는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애초에 황실의 인물인 진휘평을 감금하고 있었으니, 작은 트집에 흔들릴 일은 없었다.

“앞으로 너희에게 만세는 물론이고 천세도 허락지 않겠다.”

“···진 왕야!”

마화평이 얼른 진휘평을 말리려 했지만, 교주가 손을 들어 말렸다.

“왕야가 허튼소리를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 장로는 그대로 두게.”

“···끄응.”

“우선 앉지.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많네.”

“나라의 백성이 황가의 직계인 나를 앞에 두고도 말이 짧군.”

교주는 눈을 얇게 뜨고 진휘평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백성이 있어야 군주가 있는 법. 나와 같은 백성이 없이 어찌 황제가 있고 황가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대는 잊힌 황가의 인물일 뿐이다.”

“내가 잊혀진 것도 그대들 때문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대들은 나라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군.”

“큭. 여전히 언변은 출중하시군. 차를 내오너라.”

“내 친히 걸음 하였으니, 작은 불편함은 감수하겠노라.”

마주한 둘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

“······.”

교주는 급할 필요 없다는 듯이 차를 앞에 두고 눈을 감았고, 진휘평 또한 느긋하게 차를 들이켰다.

이런 침묵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은 마화평 장로였다.

“왕야. 교주님을 뵙고자 하셨으니, 무슨 말씀이라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미 다 아는 모양인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내 입에서 같은 말이 또 나오길 바라는가?”

교주는 감았던 눈을 뜨고 웃음을 보였다.

“큭. 눈치는 빠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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