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봉오리
***
호충이 개화검결의 기수식을 취하고부터는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저것이 개화검결.’
‘삼대 제자와 같이 수련한다하지 않았던가?’
‘어찌 저리 단단한 기수식을 보일 수 있는가.’
현(玄)자 배의 도인들이 호충을 알아봤는데, 무(武)자 배의 원로들이 못 알아 볼 수 있겠는가.
휘이익. 타닥.
경쾌한 보법에 화려한 검광이 더해졌다. 화산의 자랑인 쾌검이었다.
“허어!”
“대단하구나!”
조용히 보려했지만,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스각.
‘매화는’
쉬익.
‘가장 먼저 꽃을 피워내기 위해.’
타닥.
‘추운 겨울을 견뎌낸다.’
휘이익.
‘생명이 가득한 꽃봉오리가’
샤각.
‘눈밭을 뚫고 모습을 드러낼 지니.’
후우웅.
“하앗!”
샤각. 샥. 샤앗.
호충의 검 끝이 살아 움직이듯이 춤을 추었고, 그 끝에는 매화 봉오리가 나타났다.
“저, 저!!”
“매화!”
또한 하나씩 둘씩 봉오리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화산의 쾌검과 환검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마지막 검식은 정녕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허윽. 하나가 아니야!”
‘화산의 봄은 매화 향으로 가득할 것이다.’
총 열두 개의 매화 봉오리를 피워낸 호충은 창백한 안색으로 검을 수납했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며 포권했다.
“화산의 매화는······,”
쿨럭.
입으로는 벌컥 피를 쏟아내며 마지막까지 입을 열었다.
“영원하리···.”
털썩.
‘완벽한 마무리로다.’
호충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
“!!”
“!!”
“!!”
“호충!!!!”
백준이 호충을 부르며 중앙으로 뛰어들었고, 의약당의 현민도 후다닥 뛰쳐나갔다.
“아이고! 호충아!”
연무각의 현인도 빠지지 않았다.
‘내가 이리 정성을 보였는데, 가만 계실 것이오?’
호충을 진맥한 현민이 입을 열었다.
“기식이 엄엄합니다. 심각한 내상입니다!”
“저, 저런!”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우리가 괜한 욕심을 부려서···.”
청진 장문인도 다급하게 지시했다.
“의약 당주는 당장 진 공자를 의약당으로 옮기고 최고급 요상단을 사용하라!”
“예. 장문인.”
호충은 다시 현인의 등을 타고 의약당으로 향했다. 의약 당주 현민과 백준이 그 뒤를 따랐다.
“······.”
“······.”
“······.”
호충이 의약당으로 사라지고 남은 이들은 중앙에 고인 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청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쩌자고 내상을 입은 아이에게 또 검을 보이라 했던가. 욕심을 버리지 못했음이로다.’
“장문인.”
“······.”
청진의 답이 없었지만, 원로는 말을 이어갔다.
“저 아이가 화산의 객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진가장은 화산의 어려운 재정에 큰 도움을 준 협의맹의 세가다. 진 공자는 진씨 세가의 막내아들이며···. 그저 화산과 진가장의 친목을 위해 화산에 왔을 뿐이다.”
“···마지막 검식도 대단했지만, 개화검결 전체에서 보여준 그 아이의 검은 단 한 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와 같은 검식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정말 그러했습니다.”
“나는 처음 기수식부터 온 몸에 소름이 돋았소.”
처음 장문인을 불렀던 원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접객당의 현인을 비롯한 현(玄)자 배의 아이들이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천년기재(千年奇才)에 속한다 하였지요. 저와 원로들은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 아이의 검을 보니 제가 얼마나 안일한 판단을 내렸는지 깨달았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기본 검법인 개화검과 설화검을 잘 따라한다고 생각하였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면 됩니다. 저 아이를 화산에 붙잡아야···.”
호충이 쓰러졌을 때부터 눈을 붉게 물들이고 있던 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가합니다!”
“불가? 집법 당주는 어이하여 반대하는가. 화산의 동량이 될 아이가 아닌가.”
“이미 현자 배의 동기들과 제가 여러 차례 시도한 바입니다. 진 공자는 오로지 가문에 인정을 받고자 이곳에서 수련하고 있습니다. 화산에 뜻을 두지 않고 있음을 몇 번이고 확인하였습니다.”
“···벌써 해봤는가?”
“진 공자는 굳은 신념을 가졌습니다. 화산에 오르는 것이 힘겨울 것인데도 노복이 혼자 남겨져 있다며 매일 화산에 오르고 있습니다. 독종 중에 독종입니다.”
“날마다 화산에 오른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오늘 연무각의 현인 각주가 정문에서 번을 선 이유도 진 공자를 제일 먼저 만나기 위함이었으며, 다른 현자 배의 동기들도 모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진 공자의 빼어난 검식에 모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회유해도 진 공자는 오로지 가문이 중요하다 하였습니다. 그런 그 아이가···. 오늘 화산의 비급을 구했고 또한 비급을 돌려주었습니다.”
원로들은 먹먹한 심정으로 현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문에 가져갔다면 크게 상을 받았을 일이나 이젠 죽을 위협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허어.”
“그렇겠지.”
“누구라도 욕심을 낼 비급이니···.”
원로들도 세가의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기에 현진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이십사수매화검법과 같은 상승 무공을 가져간다면 가문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을 것인가.
“진 공자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 한 것처럼, 우리가 진 공자에게 해줄 것도 그와 같습니다. 진 공자에게 비급의 값을 제대로 치르고 화산의 은인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호충을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로 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진 공자는 가문의 명에 따라 화산에 해악을 끼칠 수도 있는 인물입니다.”
현진은 이를 악물고 호충을 비방했다. 호충 스스로가 화산의 제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문에 가진 충성이 그 정도란 말인가.”
“피붙이가 아닙니까. 오늘의 일은 그간 우리가 진 공자를 인정하며 생긴 작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일이 알려지면 가문에서 목숨을 위협 받을 것이니 함부로 가문에 알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청진은 대화를 듣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남은 것은 하나로구나.”
바로 비급의 가치를 산정하는 일이다.
“우리가 화산의 매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비급의 값을 지불해야 할 것이야. 게다가 녀석은···. 무리하여 우리의 부탁까지 들어주었어.”
중앙에 남겨진 핏덩이가 여전히 붉은 빛을 보이고 있었다.
“재경각주.”
“예. 장문인.”
“화산의 가용자금이 얼마나 되는가.”
“······.”
재경각의 현무도 현진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간 호충이 보여준 것은 검이 전부가 아니었다. 항상 자신을 비롯한 현자 배의 동기들에게 예를 다하고 마음을 다하였다.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 착한 녀석이 또 착한 일을 했어. 자기 몸은 돌보지도 않고···.’
“속가 제자들의 무관 건설을 조금 뒤로 미루고 화산의 재정을 쥐어짜면 이십오만 냥까지 뺄 수 있습니다.”
현무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전장에서 융통하면 삼십만 까지도 가능하겠군.”
청진은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깊이 존경하옵니다. 장문인.”
“흠흠. 그래봐야 아까 원로들이 얘기한 금액의 중간일 뿐이네.”
무(武)자 배의 원로 하나가 아찔한 규모의 금액에 반대 의견을 냈다.
“하, 하지만 장문인. 앞으로 비급을 익히자면 들어갈 자금이 만만치 않을 것이옵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따로 깊은 산에 연무장을 지어야 할 것이고, 상승 무공에 걸 맞는 내공을 충당하기 위하여 영약도 사야 합니다. 그렇게 많은 대금을 지불하면···. 화산의 비급은 대체 어떻게 익힌단 말입니까.”
“그래서. 얼마를 제안하고 싶으신가? 우리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매화를 보여준 진 공자에게 말이네.”
“······.”
진 공자를 떠올리면 줄이자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대신 다른 원로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삼십만 냥이면 딱 적당하지요. 저희가 허리를 졸라매어서라도 다른 방법을 궁리해보겠습니다.”
“그것이 화산이네. 우리는 화산파란 말이네!”
‘예. 장문인. 이래야 화산입니다.’
현무는 호충이 받을 금액이 크게 마음에 들었지만, 곧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젠장. 화산의 재정이 마르면 또 나만 죽어나겠군.’
재정이 부족하면 항상 재정 각주가 욕을 먹기 때문이다.
***
의약당에서 도착해서 정신을 차린 호충은 의약 당주 현민이 내미는 향긋한 요상단을 단숨에 씹어 삼켰다.
“으윽.”
갑자기 호충이 배를 붙잡고 신음을 터트리자 현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얘한테 뭘 먹인 거야!”
“아, 아니 분명 최상급 요상단인 현청단이었는데···.”
“가, 각주님.”
“오냐. 호충아 내가 여기 있다.”
“배, 배가···.”
“배가 어찌 아픈 게냐? 쿡쿡 찌르듯 아프더냐? 아니면 뭉근하게 아프더냐?”
“···고픕니다.”
“···뭐?”
“식사를 걸렀더니 배가 고파서···.”
“뭐야?!!”
백준이 나섰다.
“···각주님. 아직 호충은 안정이 필요합니다. 큰 소리 내지 마십시오. 힘을 많이 썼으니 속도 채워줘야 합니다. 그나마 이렇게 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지요.”
“어, 어. 그래.”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았을 터. 두 분은 돌아가시지요. 호충의 식사는 제가 맡겠습니다.”
“······.”
“······.”
현인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다시 회의장으로 갔고, 현민 당주는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몸을 사리라는 당부를 남기고 현인을 따라갔다.
남은 백준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내가 밥을 가져오마. 여기서 기다려라.”
“아냐. 내가 죽을병 걸렸어? 가서 먹어야지. 나 멀쩡해. 방금 당주님이 다 나았다고 했잖아.”
‘멀쩡하긴 뭐가···.’
“···그럼 가자 호충아. 내가 부축할게. 식당까지 멀지 않아.”
백준은 호충을 부축해 식당으로 향했다.
“몸은 어때?”
“속이 뒤집혔지. 보고도 모르냐?”
“멍청이의 검. ······잘 봤다.”
처음 자신이 봤던 개화검결이 아니었다. 호충의 검 끝에서 화려하고 단단한 개화검결이 펼쳐졌다. 잠깐 사이에 깨달음이 깊어지기라도 했는지 검 끝이 신들린 듯이 춤을 추었고, 백준은 호충이 피를 토하고 쓰러지기 전까지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열두 송이의 매화라니···.’
“큭. 괜히 마지막에 힘을 줬더니···. 지랄병이 났어. 네 말대로 그냥 적당히 휘두르고 마는 건데···.”
백준은 지금 호충이 일부러 자신을 낮추려 한다고 생각했다.
‘네 놈은 대체 어디까지 화산을 생각해주는 것이냐.’
“네가 그렇게 말해도 난 충분히 고마워 할 거다. 평생. 평생 말이야.”
“······.”
알아서 호구가 된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너도 고생문이 훤하다.”
무정한 중원 무림에서 이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진 무림인은 살아남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화산이라는 울타리가 있어 쉬이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겠으나, 고생길은 훤히 열렸다 할 것이다. 백준만이 아니었다. 현인과 현진을 포함한 현자 배의 화산파 도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쩜 이리 속이기 쉽단 말이오···. 속이는 놈 찔리게 스리···.’
현인은 거짓으로 쓰러진 자신을 업고 가며 절절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댔었다.
[죽지마라 호충아! 정신 차려! 이렇게 가면 안 된다!! 호충아!]
방금도 배가 고파 배를 잡았더니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의약 당주를 닦달하지 않았던가.
‘······썩을. 진짜 찔리네.’
“남 얘기하듯 말하지 마라. 네 고생문이 더 훤해.”
“······.”
아무것도 모르는 백준의 말에 호충은 이십사수매화검법과 개화검결로 인하여 일어날 뒷일을 입에 올렸다.
“큭. 너 앞으로 그것들 익히려면 죽어날걸? 너뿐이 아니라 이대 제자도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 현자 배와 무자 배 도장들도 마찬가지야.”
“억!”
그렇다. 지금까지는 상승 무공이 없어 적당한 수준에 이르면 수련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편해졌다. 하지만 이십사수매화검법과 개화검결이 돌아왔으니, 농땡이는 꿈도 꿀 수 없을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