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루연합
***
화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말이 통했으면 참 좋았으련만···. 기루의 대표 기녀들을 모아주세요. 또한 앞으로 기루는 제 관할이니 공짜 술은 없습니다. 화대도 제대로 지급하셔야 해요. 기루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제 값을 치르고 가져가세요.”
“···예. 그리합지요.”
화진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옥비연이 얼른 다가갔다.
“예. 형수님.”
“서안 흑패를 대신 맡을 사람을 빨리 찾고, 이동할 준비를 하세요. 들를 곳이 많습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저, 저를 대신할 사람 말입니까?”
방금까지 자신을 그대로 둔다고 해놓고 무슨 말인가 싶었던 것이다.
“무공은 하루아침에 익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자장으로 가는 길에 다른 지역의 흑패주들이 계속 합류할 것입니다. 임 패주는 그들과 함께 무공을 배워야 합니다. 교관은 여기 계신 두 분이죠.”
“아···.”
임강섭은 자신을 패주 자리에서 내친다는 말이 아니라 다행이라 여겼다.
“고생문이 훤하군.”
“우리 걱정이나 하시오. 패주.”
이미 사중환과 옥비연에게 수련을 받기 시작한 둘은 무공 수련이 얼마나 고된지 알고 있었다.
“하하하. 걱정 마시오. 무공은 얼마든지 익힐 자신이 있소.”
“···마보나 제대로 할지 모르겠군.”
“이 각은 버틸지···.”
“못 버틴다에 걸지.”
“저도 못 버틴다에 걸 건데요?”
“야. 그럼 내기가 성립이 안 되잖아.”
“그렇다고 안 되는 걸 된다고 합니까?”
“허. 마보가 뭐가 대수라고···.”
임강섭은 얼마든지 무공을 익힐 수 있다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진이 자리를 비운 이후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임강섭은 동생 임강환과 마보를 하며 왜 이 각을 버틸 수 없는지 뼈저리게 이해했다.
“끄흡.”
“큭. 꺼억.”
둘은 묵직한 나뭇가지를 앞으로 쭉 내밀고 마보를 서고 있었다.
팔은 바람에 흔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다리는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감각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털썩.
털썩.
임씨 형제가 쓰러진 옆에는 정필상과 배소군 단단하게 마보를 서고 있었다.
“이봐요. 못한다니까요.”
“나도 동의했다?”
“조용! 누가 마보를 서며 잡담하랬지?”
“······.”
“······.”
둘은 얼른 입을 다물었고, 사중환은 쓰러진 임씨 형제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고작 이 각도 버티지 못하나? 무공을 익힌다는 너희의 드높은 열정과 굳은 의지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나?”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둘은 다시 일어나 도를 내밀고 마보를 섰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쓰러졌다. 한 번 쓰러졌던 터라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멍청한! 둘 다 일어섯!”
“다, 다리가 말을 듣질 않습니다.”
“저도···.”
“으휴.”
사중환은 다리가 굳어 일어나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몸통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너희 둘은 나와 같이 달린다. 달리면서 굳은 다리를 풀어줄 것이다.”
“그럼 저는 이 둘을 맡겠습니다. 형님.”
“다녀오마. 발을 들어올려! 한 걸음을 떼면 두 걸음은 쉽다. 어서!”
사중환은 절룩거리는 둘을 닦달하며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
임씨 형제가 첫 무공 수련을 시작한 동안 화진은 서안의 대표 기녀들을 만나고 있었다.
“언니들. 처음 뵈어요. 저는 자장에서 온 황화진입니다.”
“······.”
“······.”
“······.”
경계심 가득한 기녀들의 눈은 화진을 빤히 보고 있었다.
“서안의 흑패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서안의 세 흑패가 차지했던 기루도 이번에 모두 한 사람에게 넘어갔지요.”
“누구의 손에 흑패가 넘어가든 우리가 달라질 것은 없어요.”
“괜히 돈이나 더 빼가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지···.”
“저는 이번에 서안 흑패를 차지하신 번권 대협을 모시고 있어요.”
“······.”
“······.”
“······.”
말을 아끼던 기녀들 중에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녀자가 기루에는 어쩐 일인지 모르겠군요. 우리를 보자고 한 이유도 궁금하고요.”
“죄송해요. 제가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
화진은 이들의 경계심을 먼저 지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소개드리지요. 저도 자장에서 기루를 운영하고 있답니다. 자장 화용루의 대표 기녀 황화진입니다.”
그제야 기녀들의 경계심 가득한 눈에 호의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같은 직종에서 종사한다는 것만으로 동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왠지 언니라고 부르는 말이 정감 있게 들리더라.”
“착 달라붙었지.”
“화진이가 서방 하나는 잘 잡았네.”
“호호. 저도 그리 생각한답니다.”
이후 화진은 기녀들과 정담을 이어갔다.
“고수는 그것도 잘 하나?”
“···어휴. 말도 마세요. 매일 죽어납니다.”
“어머. 어머. 나도 맛 좀 보자. 얘.”
“어림도 없답니다. 번권 대협 말고 다른 고수를 찾아보세요.”
“얘 좀 봐. 벌써부터 손톱을 바짝 세웠네.”
“호호호.”
화진은 기녀들의 경계심이 완전히 옅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말을 꺼냈다.
“가가께서 앞으로 흑패의 모든 기루를 제 소관으로 하신다고 하셨어요. 앞으로 언니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해요.”
“도움은 무슨···.”
“그래. 어차피 돈 떼어 가는 건 똑 같을 텐데···.”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네.”
“제가 흑패주와 수익 배분 조정할게요. 얼마가 좋으시겠어요?”
“!”
“!”
“!”
“지금 기루에서 이(二)할을 받는다고 들었어요.”
“지금의 배분이 너무 적긴 하지만···. 가능할까?”
“맞아. 흑패 녀석들이 좀 독한 놈들이어야지.”
“녀석들이 아니면 험한 손님들도 상대할 수 없고···.”
화진은 이미 다 얘기하고 왔으면서도 모른 척 대화를 이어갔다.
“말씀만 하세요. 제가 최대한 반영할게요.”
“나는 사(四)할만 받아도 좋겠다.”
“하!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삼(三)할이 적당하지 않을까? 걔들이 아무리 양보해도 삼(三)할 이상은 절대로 안 내줄걸?”
“이왕 되지도 않을 거 크게 쓰자. 나도 사(四)할! 그래야 삼(三)할이라도 받을 수 있을 거야.”
화진은 이들도 여산의 기루와 다르지 않음에 안도하며 가져온 패를 꺼냈다.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서안의 흑패주와 담판을 짓고 오는 길이에요. 제가 가져온 수익 배분이 성에 차지 않으시면 어쩌나 싶어서 제가 꾀를 부렸어요.”
“하. 요게 꼬리 아홉 달린 여우였구나?”
“그러니 고수를 치마폭에 넣었겠지.”
“피부 고운 것 좀 봐. 피부가 저리 고우면 나라도 넘어가겠다.”
“기대 되시죠?”
“누구 숨넘어가는 꼴 볼래?”
“얼른 풀어놔.”
“맞아. 얼마나 준다든?”
“···육(六)할.”
“호호. 사(四)할이나 남겨준다니. 너 정말 대단하다 얘.”
“이야. 육(六)할을 가져가고 사(四)할을 남겨주면 지금의 두 배잖아?”
“사(四)할이면 우리 애들도 일할 맛이 나겠다.”
기녀들은 화진이 말한 육(六)할이 흑패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니들. 우리가 육(六)입니다.”
“!”
“!”
“!”
“여기서 일(一)할은 기루 연합의 공용 자금으로 보관하고 나머지 오(五)할을 배분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패주에게 육(六)할을 요구했다. 오(五)할을 기녀들에게 나눠주고 일(一)할을 모아 앞으로 기녀들의 연합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기루 연합은 제가 이끌어 갑니다. 이미 번권 대협께서 맡겨주셨지만, 앞으로 언니들이 저를 잘 따라주셔야 기루 연합이 성장할 수 있어요. 기루 연합은 흑패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 계획이거든요.”
“오(五)할은 정말 확실 한 거야?”
“네. 서안의 흑패주 임강섭과 담판을 끝냈어요. 서안에 오기 전엔 여산의 흑패주를 만나 합의한 일이고요. 앞으로도 번권 대협께서 차지하신 흑패의 모든 기루가 같은 배분을 받을 것이에요.”
“후아. 너 생각보다 더 대단하네?”
“서방이 잘나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
“나도 그런 서방을 만나야 할 텐데 말이야.”
화진은 기녀들이 스스로 서기를 바랐다.
‘가가께서는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두셨을까?’
기녀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면 이들도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당당하게 삶을 살아갈 터였다.
“그리고 제가 번권 대협에게 받아온 것이 있어요. 그 전에···.”
화진은 무공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전에 확답이 필요했다.
“저는 언니들을 믿고 싶어요. 하지만 진정으로 언니들이 저를 따른다는 확신이 필요해요.”
“우리가 화진이를 동생처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위아래를 모르진 않아.”
“맞는 말이지. 임 패주는 우리도 벌벌 떤다고···. 하물며 임 패주 윗선은 까마득하다 얘.”
“돈 많이 챙겨주는 사람이 윗선이야. 안 그래?”
화진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렸다.
“제 손을 잘 보셔요. 언니들.”
화진은 찻잔을 손아귀에 쥐고 살포시 힘을 주었다.
명경수(明經手)의 운용이었다.
파사삭.
“!”
“!”
“!”
기녀들은 화진의 손에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찻잔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찻잔을 가루로 만드는 힘도 대단했지만, 손에 아무런 상처도 생기지 않았다. 눈앞의 기녀는 자신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고수였다.
“기녀도 무림인이 될 수 있어요.”
“···우, 우리도?”
“너처럼?”
“될 수 있다고?”
“물론이죠. 저는 번권 대협에게 우리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을 받아왔어요. 기루의 모든 기녀들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죠. 저를 따르신다면···. 무조건 무공을 익히셔야 해요. 물론 비밀은 지켜야겠지요?”
꿀꺽.
기녀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내실을 울렸다. 비밀이 지켜지지 않으면 목이 달아난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언니들. 방중술과 음공을 비롯해 비도술과 경공술까지 가져왔어요. 또한 우리의 무공은 철저하게 감춰질 겁니다. 내공을 감추는 무공도 있으니까요.”
“정말···. 숨길 수 있어?”
“완벽하게 감출 수 있어요. 이미 황궁의 무사들에게도 확인했어요.”
“황궁의 무사가 알아보지 못한다고?”
“우리가 익히는 무공은 최소한의 생명줄이 되어줄 것입니다. 언제까지 흑패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겠어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 해요.”
“여우가 아니라 여협이었네?”
“어디서 약 좀 팔았니? 나 홀랑 너한테 넘어갔어.”
“나는 무조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에 대답한 기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갔다. 그리고 살포시 절을 올렸다.
“다시 인사 올립니다. 루주님. 서안 태평루의 여희이옵니다.”
그 모습을 본 두 기녀도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올렸다.
“서안 천태루의 연소소. 루주께 인사 올립니다.”
“서안 예창루의 홍임. 루주께 인사 올립니다.”
화진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절했다.
“자장 화용루의 루주 황화진. 앞으로 연합 루주의 수장이 되어 중원 기녀들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호충이 지금까지 흑패를 차지하며 걸었던 길을 화진이 되돌아가며 걷고 있었다.
***
“에효.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왕호는 화산의 초입에서 가옥을 찾고 있었다.
“대체 어느 집이야?”
왕호는 여산에서 사중환과 옥비연을 만나 호충이 전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
.
.
“왕호!”
“사중환! 옥비연! 드디어 만났구나!”
“하하하.”
두 사람을 만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호충이 없었다.
“대형은 안 계신다고?”
“화산 초입에 가옥을 마련하신다고 하셨다. 그리로 가야 만날 수 있을 거야.”
“도박장에서 보자고 하시더니···.”
“화음엔 도박장이 없더라고.”
“아. 그럼 어쩔 수 없겠네.”
“안에 형수가 계시는데 인사 해야지?”
“엉? 형수님?”
화진이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마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우아······.”
왕호는 넋이 나간 듯이 화진의 미모를 눈에 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