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기재(千年奇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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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손은 좀 놓으시고 가시죠. 현인 도장.”
“못 놓는다. 이놈아. 네가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라고?”
“···제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러십니까.”
“그냥 따라 오기나 해.”
현인이 호충을 끌고 간 곳은 아까도 다녀온 곳이었다.
“장문인! 연무각의 현인입니다.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들어가겠습니다!”
“자, 잠시만. 제가 또 여길 들어가야 합니까?”
현인은 다짜고짜 호충을 장문인의 처소로 밀어 넣었다.
“넌 조용히 하고 있어봐.”
청진 장문인은 갑자기 처소로 밀고 들어온 현인을 보며 무슨 일인가 싶은 얼굴이었다.
“연무각주는 갑자기 어쩐 일인가. 진 공자는 또 어째서 데려왔고?”
“장문인! 기재를 찾았습니다.”
“기재?”
“여기 진가장의 진 공자가 바로 기재입니다. 잡으셔야 합니다!”
“장문인의 처소에 그리 무례하게 들어온 것만으로 문제를 삼을 수 있으나, 연무각주의 체면을 생각해 이번은 참겠네. 그러니 알아듣게 천천히 얘길 하시게.”
“죄송합니다. 장문인. 제가 너무 마음이 급하여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가장의 진 공자는 천하에 찾기 힘든 기재였습니다. 꼭 화산파에 들여야 합니다.”
“진 공자가 기재라···.”
예전 정무맹과 협의맹 회합에서 만난 진 가주는 자신의 막내아들이 아무것도 모른다하지 않았던가. 청진은 현인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호충은 괜히 입을 열어 분란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현인은 장문인을 설득하기 위해 처음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공을 익혔는지 알기 위해 호충의 손을 잡은 때부터가 시작이다.
“진 공자는 오늘 처음 검을 잡았다고 합니다. 검법이라고는 익혀본 적도 없는 손입니다. 아까 내공을 파악하기 위해 완맥을 잡으며 살펴봤지요.”
그 말을 들은 청진이 호충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효.’
호충이 손을 내밀자 청진은 손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각주의 말이 맞군. 무인의 손이 어찌 이리 부드럽단 말인가. 굳은살이라곤 하나도 보이지도 않는군. 그러고 보니 진 가주에게 듣긴 했지. 무공을 익히지 않고 성현의 지혜를 공부했다하니 그럴 수도 있음이야.”
환골탈태를 이룬 무인의 손에 어찌 굳은살이 생길 수 있겠는가. 호충이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굳은살은 생길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공도 없습니다. 내공 심법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단 한번 개화검을 보여주었더니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이보게. 각주. 개화검은 화산의 기본인 입문 검법이 아닌가. 익히기 쉬우니 얼마든지 따라 할 수 있는 일이야.”
고작 개화검을 따라했다고 기재라고 한다면 세상에 기재 아닌 사람이 없을 터였다.
“진 공자는 검식을 따라하며 깊은 깨달음에 빠져 연달아 여섯 번을 펼쳤습니다.”
“···그건 좀 생각해 볼만 하군.”
단번에 검식에 깊이 빠질 정도로 집중력이 좋다면 앞으로의 수련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재라고 말하기엔 부족했다.
“그리고···. 제가 펼친 개화검보다 완벽했습니다.”
“!”
이건 전혀 다른 얘기였다. 화산파에서 수십 년을 수련한 현인은 현자 배에서도 상당한 무위를 자랑하는 무인이었다. 현인이 스스로를 폄하하면서까지 남을 칭찬하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기에 거짓이라 치부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어디서도 보지 못한 개화검이었습니다. 정녕 아름답고 화려했습니다. 마치 검 끝에서 매화가 피어나는···.”
“매화! 매화가 피었는가!!”
매화는 화산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였다. 지금은 잃었지만, 소문은 무성하였기 때문이다. 검에서 매화를 피워내는 무공을 창안하는 것이 작금의 화산파가 목표로 삼은 일이었다. 그래서 매화라는 말에 장문인이 발작하듯이 반응하는 것이다.
“···제 심상에서만 그랬다는 말씀이지요.”
“흠흠. 매화는 아니라는 말이군.”
“하지만 진 공자가 화산의 직전 제자가 된다면 그리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장문인.”
“!”
“제 모든 것을 걸 수도 있습니다.”
“허허. 연무각주가 이리 확신하다니···.”
“장문인. 진 공자를 본산의 제자로 삼으셔야 합니다.”
‘미쳤어? 내가 왜 화산의 제자가 될 거라 생각하는 거야?’
호충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진 공자가 진가장에선 그리 주목받지 못한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어허. 당사자가 여기서 듣고 있네.”
‘그래. 내가 듣고 있잖아! 난 안 한다고!’
앞으로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화산의 제자가 되겠는가.
“지금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누가 채가기 전에 얼른 잡으셔야 합니다.”
청진은 손을 들어 현인의 입을 막고 호충을 보며 물었다.
“진 공자의 생각은 어떠한가. 연무각주의 말에 동의하는가?”
“현인 도장께서 저를 높이 평가해주시니 실로 감격이옵니다. 허나···.”
절대로 화산의 제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저는 진씨 세가의 직계이며 앞으로 진씨 세가를 위해 일해야 할 몸입니다. 화산에 온 것도 세가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었지, 화산의 제자가 되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청진은 현인을 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개화검을 바로 따라하고 깊이 집중했다하지만, 말 그대로 이는 개화검일 뿐이네. 그리고 심상에 떠올랐다는 매화는 연무 각주 개인의 심상이지 다른 이들의 심상이 아니질 않은가. 우리가 항상 매화를 그리워하니 그런 심상을 그릴 수도 있음이야.”
“아···.”
“연무각주. 진가장은 화산과의 친분을 생각해 아들을 보내주었네. 진 공자는 어디까지나 화산의 손님일 뿐, 함부로 제자로 삼는 것은 반대하는 바이네.”
“자, 장문인.”
청진은 현인의 부름을 무시하고 호충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진 공자의 잠재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상심하지 말게.”
“아닙니다. 장문인. 현명하신 장문인의 말씀을 들으며 배우는 바가 있으니 즐거울 따름입니다.”
현인은 쫓겨나듯이 장문인의 처소에서 나와야 했다.
“···정녕 안 된단 말인가.”
장문인의 처소를 보고 미련을 보이는 현인에게 호충이 입을 열었다.
“현인 도장. 안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오늘 이 진 모가 크게 감격하였습니다.”
“···후우.”
“아까 도장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진가장의 천덕꾸러기입니다.”
“······.”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으니, 무공은 익힐 생각은 하지 못했고 배울 수 있는 것은 글월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 호충의 이야기였다.
‘이 몸은 어려서 어미를 잃고···.’
지하철에서 껌을 팔며 풀어낸 썰이었지만, 지금은 진실에 가까웠다.
또한 상심한 현인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니다. 노림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집안에 기댈 사람은 노복이 전부였습니다. 아무도 제게 따스한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고, 사람대접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복형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어린데다가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니 재미난 장난감 대하듯 하였지요. 매번 형제들에게 맞고 들어오니 노복은 고약이 떨어지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저런···.”
이후 피를 두려워하여 검은 만지지도 못했던 과거의 얘기와 시전에서 칼을 맞은 일까지 이어졌다.
“···하여 항상 피를 두려워했는데, 시전에서 흉수의 칼을 맞고 말았지요.”
“헉! 그래서 어찌 되었나!”
현인은 이미 호충의 인생역경에 푹 빠져있었다.
“배에 칼이 꼽혔으니 피가 철철 흘러나왔지요. 당시엔 죽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고, 한참 자리를 보전한 다음 회복하여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피와 날카로운 물건을 두려워했던 과거를 이겨냈지요. 전화위복이 바로 이런 상황에서 쓰는 말인가 했습니다.”
“대체 어떤 놈이! 놈은 잡았는가? 잡았겠지?”
“진가장에선 흉수를 잡지 않았습니다. 못 잡지는 않았을 터이니···. 그저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맞겠지요.”
“···흉수를 잡지 않아? 자식이 칼에 맞았는데?”
“진가장에서의 제 위치가 그 정도였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제 치부까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화산의 제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다시 장문인께 말씀드려서-”
이번에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도 흘러나왔다.
“그런 진가장에서 처음으로 제게 중요한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화산파로 가서 화산과 진가장의 친분을 유지하라는 명령이지요.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
“이번 화산 행은 제가 처음으로 맡은 일입니다. 현인 도장. 저는 세가에서 맡긴 이번 일을 통해 제가 쓸모 있는 자식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진 공자···.”
호충은 현인 도장을 완전하게 포기시키기 위해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왔다.
“도장께서 이런 저를 높게 평가해주시니 얼마나 제가 감격했겠습니까. 남에게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저의 생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허어.”
또한 앞으로 화산에서 수련할 자신에게 깊은 호의를 갖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내가 진 공자를 너무 몰아세웠구나.’
“현인 도장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도장께서는 저를 있는 그대로 봐주시고 높이 인정해주셨습니다.”
호충은 포권하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아닐세. 어서 당당하게 허리를 펴게. 자네는 누가 뭐래도 대단한 남아일세. 누가 자네를 인정하지 않겠는가. 이제부터 자네가 검을 배우기만 하면 대적할 사람이 없을 것이네. 그러니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말게.”
“아아. 도장···.”
“장문인은 보지 못했지만, 나는 분명히 봤네. 자네의 개화검은 정말 대단했네. 오히려 내가 배우고 싶을 지경이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도장.”
‘거 인간아. 적당히 좀 하자.’
계속 감사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화산에 오르지 않았는가? 내가 쉬어야 할 사람을 데리고 검술까지 시켰군.”
‘그걸 이제야 깨닫는단 말이냐!’
“사정을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먼저 하산하겠습니다.”
“···하산?”
“장문인께서 허락해주셨습니다. 앞으로 수련이 있는 날에만 화산에 올라 삼대 제자들과 함께 수련을 이어갈 것이옵니다.”
“미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화산이 동네 뒷산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이미 자네는 화산을 올라오며 충분히 알았을 것이 아닌가!”
“···저를 지극 정성으로 길러준 노복이 화산 입구의 가옥에서 저를 기다립니다. 저는 아무리 화산에 오르는 것이 힘들어도 노복과 떨어져 지내지 않을 것입니다.”
“······.”
무시 받고 살던 진가장에서 유일하게 기대고 살았던 노복이라지 않았던가.
현인은 자신이 또 몰아세웠나 싶어 더 강요할 수 없었다.
“정말 힘들 것인데···.”
“오늘 올라와 보니 할만 했습니다. 부족한 체력도 기를 겸 나쁘지 않지요.”
“할만 해? 화산을 오르는 것이?”
화산의 제자들도 항상 힘겨워하는 화산 등반이다.
자신도 할만 한 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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