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232)

녹림

***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놈이로다. 적당히 벗겨서 널어놓아 짐승의 밥으로 만들어주마.”

점잔을 떨면서도 흉악스러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녀석이다.

“껍데기를 벗겨 죽이겠다고?”

“너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니 나를 원망치 말아라.”

호충은 녀석의 말로 작은 불편함까지 날려 버렸다.

‘나도 마찬가지다. 오늘 너를 염라대왕 앞으로 보낼 생각이거든.’

“그럼 해봐라.”

“재촉하지 않아도 그리할 것이다. 귀한 손님이 오시면 보여드릴 터이니···.”

“오냐. 나도 네 손님이 누군지 봐야겠다.”

잠시 후에 천산채의 손님으로 보이는 인물과 천산채의 산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호. 한 겨울에 홀로 강산을 주유하는 손님이라···.”

녹림의 사자로 천산채에 들른 이는 녹림왕의 수하 중 하나인 한필산이라는 인물이었다.

‘이리 추운 날에 저렇게 가벼운 차림이라니···.’

호충은 공청석유를 취하며 한서불침에 가깝게 변했기에 지금의 추운 날씨도 선선하다 느끼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놈이로구나.’

물론 무림에 한서불침에 달한 고수는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한필산도 호충이 고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광인이 산에 들어왔다고 여길 뿐이다.

“한 선생. 오늘 천산채의 행사를 보여드릴 터이니 녹림왕께 말씀을 전해주시길 바라옵니다.”

“허허. 장 채주의 무공을 견식할 기회를 주시면 저야 영광이지요.”

“그럼···.”

호충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어떻게 장굉을 요리해야 고수로 보이지 않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화려한 초식을 사용할 순 없고···. 그렇다고 정심한 내공을 보여줄 수도 없고···.’

호충이 고민하는 사이 천산채의 산적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벅.

숫자는 셋. 채주인 장굉은 그 뒤에서 자신의 거도를 꺼내고 있었다.

“훗.”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녀석들에게 보여줬던 기술이 있었다.

호충의 손이 품으로 들어갔다가 느릿하게 빠져나왔고, 손에는 세 자루의 유엽비도가 들려 있었다.

호충은 유엽비도 세 자루를 일 수에 날려 보냈다.

파앗.

“끄악.”

“윽.”

“끕.”

주변에 있던 산적 세 녀석이 사이좋게 오른쪽 허벅다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그들의 허벅다리엔 유엽비도 자루가 자라나 있었다. 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박힌 것이다.

“!!”

장굉은 유엽비도를 보고 떠오른 인물이 있었다. 다시 유심히 보니 그때의 어린 공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 공자!”

“공자는 얼어 죽을 공자야? 곧 껍데기가 벗겨질 미친놈이지.”

호충은 장굉이 전과 같이 수그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셋을 죽이지 않고 상처만 입힌 것이다.

“오늘은 전과 같지 않소. 본산에서 고수가 왔지.”

장굉의 뒤쪽에 서 있는 사람은 호충의 유엽비도 솜씨를 보고도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호충이 아주 천천히 비도를 날렸기 때문이다.

“오늘 내 수하들을 상하게 하였으니 쉬이 돌아가진 못할 것이오.”

한필산은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장굉의 옆으로 가서 섰다.

“같이 어울려 봅시다. 장 채주의 무공은 곁눈질로 살피면 될 터.”

“도움을 청하여 부끄럽습니다.”

전에 호충의 무공을 견식한 다음이었기에 합공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녹림도 아니겠소. 괘념치 마시오.”

“······.”

호충은 앞으로 나온 둘이 아니라 남은 산적들을 살피고 있었다.

“산채에 남은 이들이 있느냐?”

“네가 알아 무엇 하겠느냐. 너는 이 자리에서 죽을 터인데.”

“산채까지 가서 살인멸구를 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 물었다.”

“······.”

“······.”

호충의 광오한 말에 두 사람은 입을 열지 못했다.

“다시 묻겠다. 천산채의 산적은 여기 있는 너희가 끝이냐?”

“천둥벌거숭이가 버릇이 없구나. 장 채주. 저 놈의 눈이 하늘에 달렸나보오.”

“전에도 그랬지요. 겨우 비도술만 익혀놓고 제 놈이 천하제일고수라도 되는 줄 아는 놈이오.”

호충은 산적들을 남겨 하문하는 편이 낫다 여겼다. 그리고 봇짐과 산삼을 내려놓고 품에서 작은 회칼을 만졌다.

‘오늘 누구 껍데기가 벗겨지는지 두고 보자.’

한필산은 장굉이 비도술을 거론하자 크게 웃으며 말했다.

“녀석이 어미 뱃속에서부터 비도술을 익혔다 한들 나보다 오래 익혔겠소.”

한필산 자신이 비도술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한 선생님의 비도술은 무림에서 크게 알아주지 않습니까. 오늘 녀석의 콧대를 시원하게 눌러주시지요.”

“장 채주는 나서지 마시오. 오늘 녀석은 내가 상대할 것이오.”

“······.”

호충은 둘 중에 하나만 나서려고 하자 얼른 먼저 튀어 나갔다.

파앗.

“병신들···.”

호충은 회칼을 만지던 손을 떼고 다시 유엽비도를 잡았다.

휙.

아까와 전혀 다른 속도의 비도 발출이었다.

순식간에 유엽비도 한 자루가 공간을 접으며 날았고, 다시 품으로 들어온 손은 본래의 회칼 자루를 잡아 꺼냈다.

호충이 경공으로 둘 가까이 다가왔을 때 한필산의 이마엔 유엽비도 자루가 돋아나 있었고, 놀라서 입만 벌리고 서 있는 장굉은 호충의 회칼에 목을 들이밀고 있었다.

호충의 회칼은 거리낌 없이 장굉의 목을 따고 지나갔다.

핏.

호충의 유엽비도가 한필산의 이마에 적중하고, 이어서 회칼이 장굉의 목을 긋고 결착을 보기까지 단 한순간이었다. 다른 산적들은 멀뚱하게 서서 상황을 파악하느라 눈을 굴리는 중이다.

“······.”

“······.”

“다시 묻겠다. 너희 산채에 내가 방문해야겠느냐.”

녹림의 사자인 한필산은 비도에 맞아 뒤로 넘어갔고 채주는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순식간에 두 구의 시체를 만들어 놓고 묻는 호충의 말이라 산적들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

“······.”

여기 있는 산적들이 전부라고 하면 다 죽을 것 같고, 남았다고 하면 산채의 산적들까지 모조리 살인멸구를 당할 것 같았다.

“천산채의 부채주는 앞으로 나서라.”

모두의 눈이 한 사람을 향했다. 자신에게 시선이 모인 것을 안 녀석은 욕지거리부터 나왔다.

“···씨펄. 의리 없는 새끼들.”

“너로구나. 네 이름이 무어냐.”

부채주는 고저 없이 물어오는 말에 담긴 진득한 살기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라 합니다.”

“뭐라? 제대로 말해라.”

“오춘석이라 합니다.”

“춘석아.”

“예. 공자님.”

“너도 나를 알지?”

모른다고 하고 싶었지만,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전에 뵈었지요.”

“이젠 모른다 할 수 있겠느냐?”

“?”

“네가 나를 모른다하면 네 수하들과 천산채의 식구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아!”

“또한 네가 천산채의 채주가 될 것이다.”

“그, 그리하겠습니다. 저와 수하들은 공자님의 얼굴도 알지 못하고 본 적도 없습니다.”

호충이 하는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은 것이다.

‘이들을 다 죽여서 입막음 할 수도 있을 것이나···.’

무고한 양민을 잡아 죽이는 놈들이니 호충이 정리하는 편이 세상을 더욱 살기 좋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호충은 자신도 다르지 않은 놈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이놈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나 앞으로 살아갈 삶이나 뒷골목 건달의 삶이었다. 지금은 무공의 고하로 나뉘었어도 녀석들과 자신은 다르지 않았다. 같은 까마귀 종자들이다.

“춘석.”

“예. 공자님.”

“앞으로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마라. 함부로 양민을 살생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내가 못다 한 일을 하러 돌아올 것이다.”

“힉.”

호충은 산적들 다리에 박혀 있는 비도를 수거하고 한필산의 머리에 꼽혀 있는 비도까지 뽑아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장굉의 도를 들어 한필산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또한 한필산의 품에 있던 비도를 꺼내 식어가는 장굉의 몸에 상처를 냈다.

“녹림의 인사가 천산채에 왔다가 죽어버렸으니 변명할 거리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 장굉은 한필산과 다투다가 상잔한 것이다.”

“아!”

“한필산의 시체는 함부로 할 수 없으나, 장굉의 시체는 화장하는 편이 좋겠다. 고수라면 상흔으로 녀석의 수법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으니 말이야.”

“예. 공자님. 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대신 장광의 수급을 잘라서 녹림의 본산으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너는 나를 모른다. 알겠느냐?”

“···누구시옵니까. 저는 공자님을 모르옵니다.”

“처세가 훌륭하구나. 대신 다음에 나를 만난다면 알아서 처신해라. 두 번이나 만났으니 세 번 만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죽다가 살아난 오춘석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장 나무를 모아와라. 장굉의 시체를 화장하고 녹림에 전서를 넣어 한 선생께 변고가 생겼음을 고할 것이다.”

“예. 채주님.”

“흐흐흐.”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 것도 좋지만, 천산채의 채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더 좋았다.

호충은 산적패를 뒤로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른 녀석들의 입이 무겁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녹림이 찾아오면 더 좋지.’

흑패 천하에 녹림을 더하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관과 대적하는 녹림의 특성상 황궁에 자신의 무공이 드러날 일도 없었다. 녹림을 마음껏 휘저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체되었구나.’

호충은 걱정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

“아차. 오늘이 며칠인지 묻는 다는 것을 깜빡했군.”

천수에 다 와서야 오늘이 며칠인지를 묻지 않았음을 기억해 냈다.

진양의를 잠시 내려놓고 오로지 돌아가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괜히 양의를 풀었어.”

진양의를 끌어올리고 있었다면 한 번에 여러 생각을 해서 잊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머리는 비웠으니 다행이지.”

가상의 대련으로 인한 심력 소모가 대단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일부러 진양의를 수련하지 않았고, 덕분에 바닥났던 심력이 온전하게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겨울이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시일의 여유는 있었다.

호충은 천수로 들어서자마자 지나가는 사람에게 오늘이 며칠인지를 물었고 자신이 계획했던 날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일이 잘 풀리네.”

호충은 천천히 걸어 객잔으로 향했다.

“영감은 고뿔이나 안 걸렸나 몰라.”

호충은 상행객잔 별채로 들어서기 전에 자리에 앉아 있는 천수 흑패의 인물을 먼저 마주했다.

“흐음···.”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몰라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했다. 왕호 외에 아는 놈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빤히 보고 있으니 녀석도 호충을 마주보고 눈을 부라렸다.

“뭐요? 객잔에 왔으면 아무 자리나 찾아가 앉을 것이지 왜 눈을 부라려?”

“···너. 나 모르냐?”

“별 거지 같은 게 다 지랄이야. 어린놈에 새끼가 말을 함부로 하네. 한 입 거리도 안 되게 생겨서는.”

거구의 몸을 가진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호충은 올려다보지 않아도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크긴 컸구나.’

예전에 도박장에서 봤을 때는 상당히 큰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서로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가서 왕호 불러와. 괜히 얻어터지고 울면서 가지 말고.”

“뭐?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야. 형이 조금 컸다고 볼라보면 어쩌냐. 눈 안 깔아? 눈깔에 먹물을 쪽 빼버릴라.”

“······.”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 기억날 듯 말 듯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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