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골탈태(换骨脱胎)
***
“진가장은 산서(山西)로 가야 합니다.”
“내 생각과 같구나. 산서는 무주공산이지.”
밑으로는 소림이 차지한 하남이 있기에 분쟁을 피할 길이 없었지만, 산서는 이렇다 할 무림 방파가 없었다. 물론 군소 방파가 어디에나 있었지만, 작은 무림 방파 정도야 진가장에서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또한 진가장의 세력 확장은 조금 서둘러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음? 이유는?”
“정무맹에서 이를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무당의 송호 장문인이 크게 낭패를 당했지만, 그도 무림에서 닳고 닳은 강호인이고 한 문파의 장입니다. 게다가 정무맹의 장문인들 사이에서 뽑힌 맹주이니 오늘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다른 계책을 내놓겠지요.”
“계책이라···.”
“제가 정무맹의 맹주라면 세가 연합이 세력을 확장하기 전에 마교(魔教)의 발호에 관한 문제의 파악이 끝났다고 공표할 것입니다.”
“!!”
진원우는 호현의 말에 아찔한 심정이었다.
‘맞아. 정무맹이 이대로 호락호락하게 물러설 리가 없다. 어떻게든 협의맹의 행사를 막아내려 할 것이야. 게다가 마인을 본 것도 아니고 그저 흔적만 드러났을 뿐이지 않은가.’
진원우와 진호현은 마인의 등장이 정파 무림의 세력 판도에 비하여 보잘 것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마교의 마인이야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빈대를 잡는다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습니다. 아무나 잡아들여 마인이라 하고 죽여 놓으면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세가의 확장을 저지하고 이후에 다시 마교에 대해 조사해도 될 것이옵니다.”
“세가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자금을 뿌렸다간 낭패를 당할 수도 있겠어.”
“그래서 서둘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세가가 느긋하게 확장을 준비하는 동안 진가장은 산서(山西)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안정을 도모해야 합니다.”
“큭. 협의맹에서 한 소리 듣겠군.”
연회가 끝나고 잠시 모인 협의맹은 정무맹의 무림 방파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확장을 진행하자고 결론을 낸 참이었다. 진가장만 급박하게 확장을 진행한다면 나중에 협의맹에서 문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가의 연합인 협의맹은 정무맹보다 구성원에 대한 압박이 덜했다.
“불만이야 들어주면 그만이지. 저들이 늦어서 못 먹은 것을 누굴 탓하겠는가.”
“······.”
호현은 자신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결정에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
진원우는 진가장이 차지할 지역을 거론했다.
“산서(山西)의 중심인 태원(太原)부터 시작한다. 또한 하남과 태원을 잊는 길목인 장치(長治), 섬서와 태원의 길목인 분양(汾陽)과 홍동(哄洞), 하북과 태원의 길목인 양천(陽泉)을 단숨에 차지할 것이다.”
“아.”
산서의 교통에 따른 요지가 모두 거론되었다.
‘산서 각 지역에 진가장의 분파가 들어가겠구나.’
“사마충 총관에게 전서하여 당장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진가의 이름을 내세우지 말고 시작하라.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화를 불러오는 것은 삼가야지.”
“실로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진가장은 다른 세가보다 더 이르게 확장을 서둘렀다. 각 세가가 아직 확장의 단꿈에 젖어 움직이지 않는 시기였다.
***
공청석유의 방에서 삼일을 보낸 호충은 그간 적응 단계를 거치며 매일 한 방울의 공청석유를 취했다. 동혈의 바위틈으로 흘러내린 것으로 보이는 공청석유가 옥으로 만들어진 그릇에 고여 있었기에 어제까지 손가락 끝에 조금만 묻혀 입으로 가져간 것이다.
‘그것만으로 벌써 절정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공동의 기운과 내실의 기운으로 절정을 넘어섰고, 이후 공청석유를 취하며 화경(化境)으로 넘어갈 준비를 마쳤다.
‘화경으로 넘어가면···.’
화경(化境)은 신화경(神化境)을 줄인 말이었는데, 과장이 심한 중원 무림다운 작명이었다.
이 경지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신과 같은 경지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신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대단한 경지임은 틀림없지.’
절정에 오른 지금 무림에 출사하여도 자신을 상대할 무인이 있을까 싶은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화경에 도달한다면 허약한 작금의 무림에서 누가 자신을 상대할 것인가.
‘무림은 언제나 삼 푼의 힘을 감추는 곳. 숨겨진 고수가 있다면 언제고 낭패를 당할 것이다.’
중원 무림의 숨겨진 저력도 염려되지만, 황궁의 비고에 도착한 지금은 현 황실의 숨겨진 힘도 염려스러웠다.
‘아무리 황궁에서 보관하던 비급들이 불타올랐어도 상승 무공 몇 개는 남아있었을 것이야.’
비고엔 상승 무공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과거 금의위 중에 단 한명이라도 상승 무공을 익히려 비급을 소지하고 있었다면 현 황실에서 입수하지 않았겠는가. 비급의 소지자를 금의위에서 황군까지 넓힌다면 가능성은 더욱 올라갔다.
‘상승 무공을 입수해 제대로 익혔다면 절정에 오른 금의위가 있을 수도 있어.’
절정에서 화경으로 올라서는 것은 또 다른 얘기일 것이나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현 황실이 들어서고 멸문한 문파가 없는 것도 아니지.’
상승 무공을 익혔다며 황군이 출동한 사례가 지난 삼백년간 몇 번이나 있었던가.
멸문한 문파의 일부라도 상승 무공이 존재했다면 멸문한 무림 문파의 상승 무공은 당연히 황궁으로 흘러들어갔다고 봐야 했다.
‘현 황실의 상승 무공은 확실히 존재한다.’
황실엔 십 할의 확률로 상승 무공이 존재했고, 중원 무림엔 일부의 문파에 상승 무공이 전해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진가장만 해도 화산파의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입수했으니, 다른 세가도 얼마든지 찾아 놨을 수 있지.’
일부라고 했지만, 진가장부터가 갖고 있는 상승 무공이다. 호충은 무림 방파의 상승 무공 보유 확률도 팔 할 이상이라 점치고 있었다.
정파 무림의 양대 축인 정무맹과 협의맹이 전부가 아니다. 사파와 정사지간의 무림 문파, 새외를 포함하고 마지막으로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마교까지 더해야 했다.
‘전부 따지느니 차라리 모든 무림 세력이 상승 무공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아.’
지금 호충은 그들의 위로 올라서기 위해 공청석유를 취하고 있었다.
“휴우.”
오늘은 한 방울이 아니라 더 많은 공청석유를 취해 절정을 돌파할 계획이다.
호충은 옥그릇에 숟가락을 넣어 퍼 올렸다.
‘선심후수(先心後手)라.’
보통의 무인들은 무공을 익혀 몸을 갖추고 후에 깨달음과 내공을 뒷받침하여 단계를 밟아 오른다. 호충은 그와 반대로 내공과 깨달음을 먼저 구하고 그 위에 무공을 쌓을 예정이었다.
“합.”
공청석유 한 숟가락을 입에 넣은 호충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한 방울의 공청석유가 그리 지독했으니, 이번은 더할 것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공청석유의 기운은 수월하게 흡수하였으나, 한 방울의 공청석유를 취한 날 호충은 속이 뒤집히는 경험을 해야 했다. 진한 공청석유의 기운을 흡수하며 적응하지 않았다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졌을 지도 모를 정도였다. 다만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다시 취한 공청석유는 편안하게 호충의 내공으로 화했다.
‘제발 뒤집히지만 말아다오.’
하늘이 호충의 바람을 들어줬을까. 공청석유의 기운은 제 집에 들어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호충의 몸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좋아. 이제 대주천이다.’
호충은 환체강림천(換體降臨天)의 구결에 따라 흡수되는 공청석유의 기운을 돌리기 시작했다.
[단(丹)은 하늘(天)을 담을 수 없으나, 사람의 소우주(小宇宙)는 하늘보다 더 크고 넓으니 능히 하늘을 담을 수 있다. 하늘의 기운을 품은 몸은 하늘과 같아질지니······.]
꾸둥.
정신을 잃을 정도의 아찔한 고통이 호충의 전신을 움찔하게 했다. 진양의(眞兩意)가 아니었다면 분명 정신을 잃고 실패하였을 것이다.
‘분명 약하게 시도하였거늘.’
괜히 한 번에 성공하겠다고 과도한 내공을 돌리지 않았음에도 벽에 막힌 내공의 역행이 커다란 고통을 안겨줬다.
‘그렇다고 이보다 약하게 할 수는 없을 터···.’
호충은 진양의(眞兩意)를 동원하여 답을 구하기 시작했다.
‘바늘 그리고 회전.’
호충이 구한 답이었다.
막힌 벽을 뚫을 내공의 첨단을 바늘처럼 얇게 뽑아내고 납작하게 누른 다음 천천히 회전을 주었다.
‘···아무리 단단한 벽이라도 꾸준히 회전하는 힘을 이겨낼 수 없다.’
경혼무흔(驚魂無痕)으로 내공을 다스리니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었다.
호충의 내공은 천천히 회전하며 벽에 닿았고, 곧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파사사삭.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호충의 심상엔 단단한 벽을 뚫은 소리로 가득했다.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벽은 작은 구멍을 허용했고, 곧 뒤를 이은 거대한 내공의 해일에 부서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콰과과과.
지금까지 자신을 가로막았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내공은 더욱 거세게 호충의 혈도를 내달렸다.
‘아, 압박이 풀렸어!’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여기서도 통용되었다. 앞이 막혔을 때는 큰 힘을 주어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전부였지만, 막은 둑이 사라지니 지금까지 밀어낸 기운이 한꺼번에 풀려 쏟아져 나아가는 것이다. 벽을 뚫는 순간보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했다.
[나는 하늘일지니 아무리 칼을 휘두른들 무엇을 벨 수 있겠는가.]
호충은 벽이 뚫리자마자 내공을 붙잡았던 의지를 거두었다. 그리고 깊은 깨달음의 상태로 진입했다. 환체강림천에 의한 인위적인 깨달음이었지만, 효과는 동일하였다.
호충의 각 단전에 고여 있던 내공이 천궁을 향해 뭉치고 있었다. 삼화취정(三花聚頂)의 경지였다.
[하늘이 몸에 머무르니 오기조원(五氣朝元)으로 삼화취정(三花聚頂)을 이루리라.]
오색의 기운이 호충의 몸에서 스며 나와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호충의 머리에 후광이 일기 시작하더니 정수리에서 둥근 빛이 하나 올라왔다.
뿌드득.
잠시 뒤에 또 하나의 빛이 더 생겨나며 신체의 변화를 재촉했다.
우드득.
세 번째로 나타난 빛은 금빛이었다.
‘성공······.’
이후의 일은 환체강림천(換體降臨天)과 진양의(眞兩意)에 내맡겨야 했다.
호충의 의지는 무의식으로 침잠해 들어갔고, 환골탈태의 과정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 개의 빛은 호충의 코를 들락거리며 순환했고, 순환을 이어갈수록 호충의 몸은 변화의 힘을 얻었다. 영약의 자연지기와 대기 중의 자연지기가 하늘을 머금은 호충의 몸에서 섞이고 있었다.
***
끔뻑끔뻑.
호충은 바닥에 누워서 눈을 떴다. 어느새 누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럴 때 벌떡 일어나면 저 동굴 천장에 머리를 박겠지?’
무려 환골탈태가 아니던가.
이런 정보 정도는 머리에 들어 있었다. 호충이 오래 전 봤던 무협소설의 주인공은 동혈에서 영약을 먹고 깨어났다가 동굴 천정에 머리를 박으며 자신의 몸이 강력하게 변했음을 깨닫곤 했다.
하지만 호충은 애초에 이후의 일을 짐작하고 있음이다. 누운 채로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호오.”
팔과 다리에 힘이 넘치고 있었다.
또한 뽀얀 피부를 보니 확실히 전과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
심상수련
***
겉모습만 달라진 것은 아니다. 뼈도 상상 이상으로 단단해졌고, 몸은 유연해졌으며, 무엇보다 몸속을 내달리는 기운의 크기와 통로가 넓어져 있었다.
‘이것이 환골탈태. 이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힘이다.’
환골탈태 전에는 내공의 수준만 높으면 어떻게든 윗 단계와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환골탈태를 경험한 지금은 단언할 수 있다.
‘절정은 몇이 모여서 화경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환골탈태를 이룬 화경의 무인은 절정무인이 아무리 모여도 상대할 수 없어. 화경도 같은 화경이 아니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어.’
본래 화경에서 현경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필요한 환골탈태를 화경에서 습득하였기 때문이다.
깨달음과 내공이 받쳐주면 화경에서도 가능할 일이지만, 보통의 경우 화경에서 환골탈태를 이루는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림에서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전설에서도 전해지지 않았던 일이다.
“흐흐흐. 이제 진짜 고수가 되었다.”
아직 스승님들의 무공을 전부 습득한 것이 아님에도 걱정이 없었다. 중원에서 누가 자신을 당할 수 있겠는가.
한참 살피던 팔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뻗어 바닥을 짚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쑤욱.
이제 막 손가락에 힘을 넣은 참이었는데, 상체가 벌떡 올라온다.
“이러니 천장에 머리를 박지.”
영약을 먹는데도 적응이 필요했으니, 몸도 적응이 필요했다.
“킁킁.”
호충은 향기롭던 영약의 방에서 풍기는 이질적인 냄새를 맡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몸에 화기가 남아 있었나?”
몸에서 나는 엄청난 냄새가 호충의 코를 찌르고 있었다. 이미 공청석유를 한 방울씩 마시며 경험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이를 예상하고 얇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노폐물로 또 더러워져 있었다.
“에효. 어쩔 수 없지.”
호충은 더러워진 옷을 벗어 작은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
찰박찰박.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자신의 옷을 세탁하던 호충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환골탈태를 했는데, 어째 나이가 더 먹은 것 같다?”
얼굴을 확인하며 다시 자신의 벗은 몸을 보던 호충은 얼른 일어나 위를 봤다. 그리고 동굴의 공동 천장이 전보다 낮아졌음을 알아봤다. 멀쩡한 공동이 작아지진 않았을 터이니 자신이 커졌다는 뜻이었다.
“성장했어?”
올해 열일곱이 된 몸이라 향후 조금이라도 더 클 수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환골탈태가 신체의 성장까지 촉발할 줄은 몰랐다.
다시 물에 비친 자신을 보니 확실히 이십 대는 되어 보였다. 전에도 신장이 장대해서 얼핏 이십 대로 보이긴 했지만, 이번엔 완숙한 이십 대의 모습이었다.
“반로환동은 고사하고······.”
젊은 몸으로 환골탈태를 이루면 오히려 나이를 먹는 모양이었다.
호충은 작은 불만이 생겼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장 무공을 펼치기에 좋은 몸을 만드는 것인가.’
신체가 완숙한 단계는 이십대를 넘어 삼십대에 이르기 전일 것이다. 환골탈태는 가장 이상적인 신체를 찾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흐흐흐. 화진이가 좀 놀라겠어.”
호충은 강인한 모습으로 변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자장의 화용루에서 자신을 기다릴 화진을 떠올렸다.
“오빠가 곧 간다. 화진아.”
젖은 옷을 걸어두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호충은 자신이 얼마나 시간을 허비했는지 알 수 없어 서둘렀다.
‘환골탈태에 며칠이 걸렸는지를 알 수가 없으니 원.’
공청석유로 환골탈태를 이루는 동안 벽곡단(僻穀丹)을 소비하지 않아 며칠이 흘렀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본래 일주일을 예상했으니 그동안 삼 일이 흘렀어야 계산이 맞지만, 정신을 잃고 일주일이 흘렀을 수도 있었다.
‘경혼무흔(驚魂無痕)과 경신비천(輕身飛天)을 익히며 비고(祕庫)를 탐색하자.’
남은 공청석유도 모조리 취해야 할 것이다.
‘아껴봤자 똥이나 되겠지.’
호충은 여전히 시간에 쫓기며 무공을 익혔고,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비고(祕庫)에 들어가 상승 무공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옥비연 녀석은 앞으로 중원의 모든 도박장을 관리해야 할 것이다.’
도박장에 얼마나 많은 인간 군상들이 출몰할 것인가.
‘진상이란 진상은 다 모여들겠지.’
그런 이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려면 살기가 넘실거리는 강력한 무공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
[황룡살도(黃龍殺刀)]
과거 사파(邪派)를 주름잡던 진한(秦韓)이라는 인물의 독문무공이었는데, 호충이 휙휙 넘기며 무공을 살펴보고 선택했다. 익히는 초반부터 흘러넘치는 살기를 주체하기 힘들 것 같았다.
‘밖으로 터져 나오는 살기는 내공을 감추는 무공으로 보완해야겠군.’
단검이 아닌 도를 사용하는 무공이었지만, 밑에 놈들이 단검을 쓴다고 우두머리까지 단검을 쓰라는 법은 없었다. 거도(巨刀)를 소지한 것만으로 상대에게 쉽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사중환을 위한 무공이었다.
[화가창법(樺家槍法)]
예전 화씨 가문의 가주 전용 독문 무공이었다. 짧은 두 개의 단창을 활용한 창법이었는데, 두 개의 단창만 있으면 능히 모든 방위를 방어하고 공격할 수 있었다. 철필을 사용하는 사중환에게 이보다 어울리는 무공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무공의 원류인 화씨 가문이 사라졌으니 누가 알아볼 일도 없을 것이다.
[대월천룡권(大月天龍拳)]
“이건 좀 과하긴 한데···.”
왕호를 위한 무공이었다. 표지 내부에 대월천룡권의 입수경로가 따로 적혀 있었는데, 실제 사용하던 문파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정사지간의 문파가 비급을 모아둔 곳에서 발견한 것인데, 보통 용(龍)이 들어간 무공서가 상상속의 용으로 무공을 창안한 것에 비하여 이 대월천룡권은 진짜 보름달이 뜬 밤에 승천하는 용을 보고 만들었다고 했다.
“제목은 권(拳)이라고 해놓고 내용은 무공 총람이나 다르지 않아.”
대월천룡권 내에는 권, 각, 지, 퇴가 모두 들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용의 움직임에 따른 것이었다.
“제대로 익히면 현경까지 가능하겠다.”
내공이 충분하다면 화경까지 충분하고 현경에도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무공이었다. 그렇다고 황룡살도(黃龍殺刀)와 화가창법(樺家槍法)이 대월천룡권(大月天龍拳)에 비해 급이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었다. 옥비연과 사중환이 익힐 두 무공 또한 현경에 도전할 수 있는 고절한 무공이었다. 또한 무공은 익히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무공이라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이후에도 기루, 도박장, 흑패의 구성원들이 익힐 무공을 탐색했고, 적당한 수준의 무공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호충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무공은 찾지 못해 난감했다.
“대체 왜 없는 거야.”
내공과 무공 수준을 감추기 위한 독특한 비급이 필요했는데, 정파와 사파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정사 지간의 문파와 새외에도 없었다. 물론 비슷하게 흉내 내는 무공은 있었지만, 본래의 무공에 부수효과로 작용하는 수준이었다.
“···다 드러내고 다녀도 상관이 없었다는 건가?”
과거 무림에서 무공을 감출일이 있었겠는가. 오히려 무공의 고하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상대를 위한 일이었다. 그래야 불필요한 살생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이런 무림에서 무공을 감추는 무공은 쓸모없게 보였을 것이다.
“결국 여기도 들어가야 하나?”
호충은 마(魔)가 양각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휘유. 많기도 하네.”
정파의 경우 여러 무림 문파의 무공이 모였으니 당연하겠으나, 마교(魔教)의 경우 단일 문파였기에 그보다 적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곳엔 정파 무공만큼이나 많은 양의 서책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호충은 마교의 서적들을 살피며 왜 이렇게 많은 서책이 쌓였는지 알 수 있었다.
“중복된 것도 많고···. 교리서도 많고.”
마교(魔教)는 근원적으로 종교라는 허울을 쓰고 있었기에 마신을 추종하는 마교(魔教)의 교리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입수한 무공서 대부분은 마교인들 대부분이 익히는 무공서였다.
“높은 수준의 마공을 전부가 익히니 마교(魔教)가 강할 수밖에.”
마교인들은 마신을 따르는 종교답게 강함이 최우선이었고, 이를 이루기 위해 상급 마공서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했다. 정파의 경우 비인부전을 위해 함부로 무공을 전수하지 않지만 마교는 이를 관여치 않았다는 뜻이다. 황궁의 무사들은 마교인을 잡아 죽였고, 이들에게 입수한 비슷한 무공서들이 모두 비고에 쌓였기에 이렇게 방대한 서책이 완성된 것이다.
“핵심만 추리면······.”
그래도 한 세월이 걸릴 것 같았지만, 호충은 마교의 무공서들을 살피다가 찾고자 하는 것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어······.”
마교의 상급 마공서 대부분에 첨부된 무공은 마공과 달리 따로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다.
[잠룡진(潛龍陣)]
마교는 중원 무림에서 언제나 배척의 대상이 되었기에 마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감춰야 했다. 그렇기에 마공을 감추는 무공이 필수적이었고, 이는 다른 무림 방파보다 진보한 형태의 내가공부(內家功夫)를 완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호충은 대부분의 상급 마공에 붙어 있는 잠룡진을 상세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무흔(無痕)이 여기서 출발했구나.’
무흔의 요결 중에 무공을 감추는 공능이 있는 부분이 잠룡진과 일치했다. 경혼무흔(驚魂無痕)의 저자인 파진후(破陣厚)가 참고한 무공서 중에 하나라는 뜻이었다.
‘잠룡진은 마(魔)와 전혀 관련이 없어. 그저 내공과 무공 수준을 외부에 감추는 것으로 끝이다.’
또한 잠룡진(潛龍陣)에는 내공을 축적하는 이론이 없었다. 앞으로 자신이 건설할 흑패 천하에 없어서는 안 될 무공이었다.
“이것이 딱이다. 내가 있을 줄 알았지.”
마교의 무공 중에서 발견할 줄은 몰랐지만, 출처는 어디든 상관없었다.
“이제 내 무공에 집중할 수 있겠구나.”
호충은 언제나처럼 진양의를 끌어올려 무공을 익힐 준비를 하고 경혼무흔과 경신비천이 담긴 서책을 펼쳤다. 호충은 경혼무흔과 경신비천을 동시에 익히면서도 몸에 내공을 돌리고 있었고, 머리로는 가상의 상대를 세워놓고 대결하는 중이다.
‘오늘 상대는 오현락(吳賢洛) 스승님.’
경신비천의 저자인 오현락은 호충이 세 번째 스승으로 여기는 인물이었다. 첫 번째 스승님은 진양의를 저술한 송재호였고, 둘째는 파진후, 마지막은 편수협이었다.
경신비천이 천상제라는 지고한 신법을 담을 정도로 엄청난 경신법이지만, 호충의 상상에만 존재하는 오현락은 경신법만 익힌 쉬운 상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휘익.
호충은 순식간에 간격을 좁혀오며 펼친 오현락의 조법에 대경해 허리를 숙이고 옆으로 튕기듯 신법을 발휘했다.
‘큽. 단 한 수에 질 뻔했다.’
스승들은 자신들의 무공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마다 각자의 정점에 올라선 스승들이지만, 이들은 무림인이 아니다. 오직 황제의 명을 따르는 금의위 무사인 스승님들은 서로의 무공을 익히는 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야 비고를 지키는 일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멀리 오현락이 주먹을 뒤로 뺐다가 앞으로 밀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
후앙.
주먹 형상의 기가 빠르게 호충의 복부를 향해 날아왔다.
뻐억.
“끄읍. 젠장 할 백보신권(百步神拳)”
또한 스승들은 자신들의 무공 외에도 비고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히고 있었다.
시간이 남아도는 이들이 비고에서 할 일이라곤 비급을 보고 익히는 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호충의 심상에 불과한 스승들이 여러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는 파악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호충은 읽었다.
“괜히 무공서를 다 읽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