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232)

황궁(皇宮) 비고(祕庫)

***

줄인다고 줄였음에도 여전히 가득한 짐은 호충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에효. 짐이 무거운 게 아니라 여기가 무겁네.”

송 영감을 두고 왔더니 마음이 무거웠던 탓이다.

“왕호 새끼가 착실하게 잘 하겠지?”

호충은 송 영감과 왕호의 만남을 그리다가 순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썅. 이 흉악한 새끼들이 어르신 모실 줄이나 알려나?”

잠시 천수(天水) 방향을 보던 호충은 다시 평량(平涼)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녀와서 보자. 제대로 못 했으면 다 뒈질 줄 알아!”

호충은 미련을 떨치려는 듯이 경신(輕身)에 집중해 날듯이 천수(天水)에서 멀어져갔다.

관도에서 벗어나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자 지금까지의 경신(輕身)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더욱 속도가 올라갔다.

섬서(陝西)에서 감숙(甘肅)으로 오는 동안 끊임없이 무공을 연마한 탓이다. 이제 양의(兩意)는 칠성(七成)에 도달했고, 무흔(無痕)과 경신(輕身)은 오성(五成)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양의(兩意)는 정신을 수양하는 무공에 가깝기에 상관없지만, 무흔(無痕)과 경신(輕身)의 경우 오성(五成)이 당장 익힐 수 있는 끝이나 다름없었다. 육성(六成)부터는 본신 내공에 더해 외부의 조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청석유(空靑石流)가 아직 남아있을지···.’

외부의 조력이란 공청석유와 같은 영약을 말함이었다. 영약의 도움이 있어야 빠른 내공의 축적이 가능했다. 무흔(無痕)과 경신(輕身)은 거대한 내공이 있어야 육성(六成)을 지나 대성(大成)까지 도달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공청석유가 아니라도 영약의 위치는 찾아뒀을 것이다.’

황궁(皇宮)의 비고(祕庫)가 아니던가. 황실의 인물들에게 먹이기 위해서라도 그 위치를 파악하고 언제든 수급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을 것이라 여겼다. 호충은 양의(兩意)를 깊이 익히며 그들이 준비했을 일까지 예상한 것이다.

***

이틀을 달려 평량(平涼)에 도착했고 하루를 묵은 호충은 다시 관도를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경신(輕身)을 이용해 달리면서도 양의(兩意)를 익히고 있었고, 무흔(無痕)으로 내공을 돌리는 중이다. 덕분에 내공 부족으로 경신(輕身)이 풀릴 일은 없었다.

‘저 언덕을 넘으면 고원(高原)이 시작···.’

언덕을 넘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웅장한 산들의 향연이었다. 하얀 눈으로 덮인 산들은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후아.”

호충도 거대한 산들의 위용에 압도되어 입을 벌렸다.

앞으로 자신이 오를 산이었지만, 경신(輕身)이 있어 걱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순수하게 웅장한 산세를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골랐는지 잘도 골랐네.”

저렇게 많은 산들 사이에 숨겨진 황궁(皇宮)의 비고(祕庫)를 어찌 찾겠는가. 호충은 다시 경신(輕身)을 가득 끌어올리며 달려 나갔다.

‘이 산이 저 산 같고 저 산이 이 산 같고···.’

저마다 비슷한 산의 모습은 지리를 알고 가는 호충도 헷갈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나마 특징이 있는 산이 있어 다행이지.’

비슷한 산들로 가득하지만, 특이한 모양의 산이 있었다. 뾰족한 정상을 자랑하는 저 멀리 산과 더 멀리에 화산 활동을 했었던 흔적이 남은 산이 그것이다. 비고의 위치는 두 개의 산을 기준으로 삼각을 그려야 찾을 수 있었다. 비고는 두 산과 삼각을 이루는 첨단에서 더 옆에 있다고 하였기에 호충은 적당한 언덕에 올라 지도와 대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기이한 산의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간다.

‘···어라?’

호충은 화산 활동의 흔적이 남은 산이 아니라 뾰족한 산을 보고 있었다.

‘뾰족한 정상은 꼭 칼로 자른 것 같은···.’

“!!!!”

호충은 자신의 짐작이 사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부, 분명 오백년 전 황궁의 무사가 일부러 흔적을 만들었을 거야.’

지도상에서 산을 구분하기가 어려우니 아예 산을 잘라 표시한 것이다.

‘젠장. 얼마나 무공이 높았으면······.’

지금의 자신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임이 확실했다. 하지만 지금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만 남아 있었다.

‘저 산을 만들어낸 인물의 무공도 비고(祕庫)에 있을 터.’

황궁의 비고에 얼마나 많은 유산이 남아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만발이다.

‘저 산을 일수(一手)에 자른 초고수의 무공은 내가 익히고 만다!’

호충은 지도에서 확인되는 비고의 위치를 향해 다시 경신(輕身)을 일으켰다. 호충의 발이 조금 더 빨라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초고수의 무공을 찾아 익히고 싶은 마음이다.

***

“이 밑인가?”

이미 반대편 산에 올라 비고가 숨겨진 절벽 아래를 확인하고 넘어온 길이었다.

비고는 동혈이지만 동혈이 아니기도 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숨겨놨으니 지금까지 숨길 수 있었겠지.’

황궁(皇宮)의 비고(祕庫)는 특수한 기관 장치를 통해 바위로 감춰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분명 동혈이지만, 밖에서 봤을 때는 그저 움푹 들어간 절벽에 지나지 않는다. 움푹 들어간 절벽 아래에서 기관장치를 손봐야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기에 천상제(天上梯)를 익힌 절세 고수가 아니라면 맨몸으로 들어갈 수···.

‘이곳을 드나들던 황궁의 무인들은 천상제(天上梯)를 익히고 있었겠구나.’

허공을 맨땅처럼 거닐 수 있는 지고한 경신법(輕身法)이 바로 천상제(天上梯)였다. 고대 무림에도 전설처럼 내려오는 경신법(輕身法)이었다. 황궁의 무사들이 자신처럼 밧줄로 오가진 않았을 터이니 분명 천상제(天上梯)와 유사한 경신법(輕身法)을 연마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후우.”

호충은 커다란 바위와 나무에 이중으로 밧줄을 묶어놓고 밧줄 뭉치를 절벽 아래로 던졌다.

이제 이 밧줄이 자신의 생명줄이었다.

“건량과 물은 충분하고, 보온을 위한 옷도 충분하고···.”

봇짐에 가득 들어 있는 자신의 준비물을 확인하던 호충은 마지막으로 비어있는 책자를 다시 확인했다.

“좋아.”

빈 책자는 황궁의 비고에서 찾은 무공비급을 옮겨 적으려고 마련한 것이었다.

“간다.”

호충은 밧줄을 몸에 한번 둘러 감고 조금씩 풀어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윽.”

눈 때문에 미끄러운 절벽은 살짝만 잘못 디뎌도 위험했다.

턱.

몸을 단련하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의 머리가 뾰족한 절벽의 모서리에 박혀있을 것이다.

“휴우.”

한 손을 빼서 겨우 위기를 모면한 호충은 다시 천천히 줄을 풀어 밑으로 내려갔다.

‘고작 삼십 장이 왜 이리 먼 것이냐.’

가깝다고 생각했던 삼십 장이 멀게만 느껴졌다.

“후욱.”

아래에 불쑥 솟아있는 절벽이 보였다. 저 아래가 비고의 기관장치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조급한 마음이 일었지만, 양의(兩意) 덕분에 다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위험하다. 위험해.’

호충은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솟아있는 절벽의 바위를 먼저 살피고 있었다.

솟아있는 바위의 끝이 너무 날카로워 밧줄을 자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 아래로 내려가 조금만 비벼도 금방 밧줄이 잘려나갈 것이다.

깡. 깡. 깡.

호충은 진가장에서부터 챙겨온 도를 꺼내 절벽의 날카로운 첨단을 쳐내기 시작했다.

깡.

“이따위”

깡.

“바위 때문에”

깡.

“죽을 수야 없지!”

도(刀)날이 다 나갈 정도로 바위를 쳐낸 호충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날카로운 바위는 뭉뚝하게 변해있었고, 아무리 밧줄이 비벼져도 잘려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호충은 조심스럽게 지붕처럼 비고를 덮고 있는 바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위 밑에서 위를 보니 바위가 상당히 인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이···.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어?’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왔을 때 밧줄이 잘릴 수 있도록 바위를 날카롭게 다듬어 놨음이다.

비고의 입구에서부터 암담한 심정이었다. 이 부분은 비고를 출입할 수 있는 방법에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에도 기관장치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고···.’

기관장치가 아닌 위험도 존재할 수 있었다.

방금 바위를 보고 든 생각이다. 허락된 존재가 아니면 감히 접근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난 허락된 존재다.”

호충은 밧줄에 몸을 단단하게 묶고 몸의 반동을 이용해 움푹 들어간 바위 밑으로 몸을 날렸다.

잡고 있던 줄에서 손을 떼고 단단해 보이는 돌출된 바위를 붙잡았다.

타닥.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서 발을 디딜 곳이 있는지 살폈다.

‘저 바위는 디디면 기관장치가 발동하고···.’

왼쪽 구석에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저 작은 바위를 밟으면 바로 쇠뇌가 날아오는 구조였다.

‘저건 함정.’

밟으면 그냥 밑으로 사라져 버리는 힘없는 바위도 있었다.

여기서 밟을 수 있는 바위는 오직 하나였다. 상당히 작았는데, 가장 안전한 발판을 찾는 사람의 본능을 이용했다.

지금 호충이 두 손으로 붙잡고 있는 돌출된 바위도 사실 기관장치였다.

‘이 작은 바위를 밟고 이 두 개의 바위를 위로 올리면···.’

작은 바위를 한 발로 밟고 두 개의 바위를 위로 올리자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두 개의 바위가 위로 조금 올라가며 딸깍 소리를 냈다.

스르르릉.

그리고 절벽 깊은 구석에서 작은 구멍이 생겨났다.

사람 하나가 겨우 몸을 비집고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었다.

‘다행히 아직 작동하는 구나!’

호충은 작은 바위를 디딘 발에 힘을 주고 위로 뛰어 올랐다. 다른 바위는 아무것도 만질 수 없었다.

턱. 턱.

호충이 잡은 부분은 작은 구멍의 양쪽 입구였다.

구멍의 아래에는 녹이 슨 칼날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밑에서 아무 생각 없이 뛰어올라 아래턱을 잡았다면 손가락이 잘려나가며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소설 속에 나왔던 기연은 다 거짓말이야.’

어쩌다가 실수로 동혈을 발견해 기연을 얻는 일은 호충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미리 알고 오지 않으면 죽을 위험만 가득했다.

호충은 칼날을 조심하며 비좁은 구멍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극독이 발라졌다고 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오백년 전에 발라놓은 극독이라 이미 독은 다 빠졌겠지만, 지금은 녹이 슨 것이 더 위험했다. 파상풍이라도 걸리면 항생제가 없는 이곳에서 죽으라는 말이었다.

털썩.

좁은 입구를 통과해 조금 넓은 공간으로 들어온 호충은 자리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허억. 진이 다 빠지네.”

호충은 다시 입구로 돌아가 밖에 돌출된 바위에 자신이 타고 내려온 밧줄을 묶었다. 비고의 입구를 바로 닫아야 했기 때문이다.

비고의 구멍 옆에 네모난 바위를 위로 밀자 입구는 아까처럼 스르릉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다.

쿵.

“휴. 이제 다시 시작이네.”

아직 난관은 끝나지 않았다. 비고(祕庫)까지 가려면 몇 가지 함정을 더 돌파해야 했다.

“함평천지(咸平天地), 태평성대(太平聖代)”

바닥에 갈라져 새겨진 한자들 중에 이 글자만을 순서대로 밟아야 기관장치가 발동하지 않는다.

천장에 박아둔 야명주가 작은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바닥을 식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거 방사능 나오는 거 아닌가?’

이 시대에서 야명주는 값비싸기로 유명했지만, 현대의 지식을 갖고 있는 호충은 감히 야명주에 손을 가져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보통 녹색 빛을 발하는 돌은 방사능 또한 뿜어내기 때문이다.

‘빨리 넘어가자.’

탁. 탁. 탁. 탁.

한 글자 한 글자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기에 껑충껑충 뛰어야 계속해서 다음 돌을 밟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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