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역적을 참살하라
“비상이다! 모두 연무장에 집결하라!”
사방에 뛰어다니는 군사들의 발걸음 소리, 무기가 부딪치는 쇳소리. 금의위의 1만 군사들이 연무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창밖으로 연무장을 내다보고 있던 금의위 영반 호연주남은 착잡한 생각에 잠겨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방금 황궁에서 진야동의 사자가 정무 태자의 이름으로 된 명령서를 전달하고 갔다.
<금의위는 대륙 전장에 숨어든 역적 은목전왕을 참살하라.
-정무 태자 주곡창>
“으음!”
호연주남은 바보가 아니다. 은목전왕이 주수연 공주의 연인이며 황궁에 오는 목적이 황제를 구하려는 것이라는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외창보다는 못하지만 금의위도 수많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기에 남보다 한발 먼저 황실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그였다.
하지만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진야동이다. 만약 명을 어긴다면 역적으로 몰려 구족이 멸할 수도 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허리에 걸려 있는 검의 손잡이를 잡고 망설이고 있을 때, 부영반이 뛰어들었다.
“군사들이 모두 집결하였습니다, 영반.”
부영반 난교위.
진야동의 충실한 심복으로, 호연주남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파견된 자였다.
‘이젠 할 수 없다. 명을 집행하는 수밖에.’
호연주남이 돌아섰다.
“좋아, 출전한다. 목표는 대륙 전장.”
그러자 난교위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어났다.
“흐흐흐. 잘 생각하셨습니다, 영반. 진 태감께서도 오늘의 일을 크게 치하하실 것입니다.”
난교위가 싱글거리며 한 걸음 내짚었을 때였다. 여태껏 아무런 말없이 영반의 옆에만 서 있던 진무사 막명대가 한 걸음 내짚으며 검을 잡아 뽑았다.
촤앙!
“뭐, 뭐야?”
깜짝 놀란 난교위가 눈을 치켜떴을 때, 뿌연 검날이 번갯불처럼 쏘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난교위는 자신의 목에서 화끈하게 일어나는 뜨거운 감촉을 느꼈다.
“이게 무슨 짓… 컥!”
촤악.
툭, 데구루루.
미처 어쩔 새도 없이 난교위의 목이 바닥을 굴러갔다.
철컥.
검을 집어넣은 막명대가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진야동의 개! 네놈을 황룡어림위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진무사, 자네가 황룡어림위라고?”
호연주남이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눈으로 막명대를 바라보았다.
막명대, 곰처럼 우직하고 시키는 일밖에 모르는 인간.
때문에 호연주남은 그를 다음 대 영반으로 점찍고 있었고, 가장 믿는 심복이기도 했다. 그런데 황룡어림위라니?
황룡어림위는 황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황제의 비밀 호위대였다.
“영반님, 용서하십시오. 도처에 진야동의 심복들이 있어서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닐세. 자네가 황룡어림위라니,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보았어.”
호연주남이 머리를 끄덕였다. 가장 급할 때 황룡어림위가 옆에 있으니 이제 행동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자넨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았는가?”
“아닙니다, 영반님. 저희 황룡어림위의 위사장은 대륙 전장주님이십니다.”
“대륙 전장주라고?”
호연주남은 입을 딱 벌렸다. 원래 황룡어림위는 황제의 직속 부대다. 만약 어떤 일로 황제가 관할하지 않으면 가장 믿는 친족에게 맡기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대륙 전장주라니?
그의 마음을 안 막명대가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영반님, 대륙 전장주는 황제 폐하의 사촌 형님입니다.”
“그, 그런…….”
그제야 호연주남은 머리를 끄덕였다. 황제의 사촌 형이며 대륙의 돈을 절반이나 가지고 있는 자, 그런 자가 황룡어림위를 가지고 있다면 황제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영반님, 진야동이 반역을 했지만 절대로 승리하지 못합니다. 밖을 보십시오.”
“밖을?”
무슨 영문인가 해서 창밖을 내다본 호연주남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금의위 건물 주변으로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구름, 사방을 꽉 메운 깃발들, 대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그것은 수많은 군사들이 이동하는 소리였다.
‘우도독 순우상신.’
깃발들에 새겨진 글귀는 분명 북경의 장군이며 우도독인 순우상신의 군사들이었다.
물샐틈없이 포위된 금의위.
그제야 호연주남은 막명대를 바라보았다.
“난 그대가 아니었으면 역적이 될 뻔했군.”
“아닙니다, 영반님. 저라고 해도 출로가 없으면 진야동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진야동은 끝장이 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가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렸기 때문이지요.”
“그게 누군가? 혹시?”
호연주남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명호가 떠올랐다. 지금 북경을 뒤흔들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남문에서 진야동의 부하들을 모조리 피떡으로 만들어버린 남자. 앞을 막아서는 적은 가차 없이 쓸어버리며 황궁을 향해 전진하는 자, 바로 은목전왕이었다.
“예. 바로 그분, 은목전왕입니다. 저도 방금 전에 황룡어림위의 위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은목전왕은 이제 황룡어림위까지 손안에 쥐었고, 지금 출동한 저들, 순우상신 장군의 군사들은 물론이고 대장군 위지오민의 군사들까지 지휘합니다. 바로 그분이 천룡어검의 주인이니까요.”
그에 호연주남의 눈이 둥그레졌다.
천룡어검의 주인, 그것은 은목전왕이 지금은 황제나 같다는 뜻이었다.
“영반님, 어서 군사들에게 명을 내리십시오. 역적 진야동을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알겠네.”
그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목청을 높여 외쳤다.
“금의위의 군사들은 들어라! 밖에 있는 군사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은 순우상신 장군의 군사들이고, 역적 진야동을 칠 의군이다. 우리 금의위는 장군가의 군사들과 함께 역적 진야동을 친다.”
“와아아!”
그제야 함성 소리가 들리고 군사들이 환호를 올렸다.
“진야동을 죽여라!”
“역적을 잡아라!”
군사들도 방금까지 불안해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 북경에는 은목전왕이 황제를 구하러 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역적 진야동이 황제 폐하에게 독을 먹여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무혼 태자마저 인질로 협박하고 있다! 그 때문에 주수연 공주가 황궁을 탈출하여 은목전왕에게 도움을 청했고, 진야동의 부하들과 결전이 벌어졌다!
어디서 어떻게 흘러나온 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 풍문 때문에 군사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진야동의 편을 든다면 분명한 역적이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소문은 유령각 북경 지부에서 은밀하게 퍼뜨린 것이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군사들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자신들은 의군이 됐기 때문이다.
“출전하라!”
“출진!”
“가자!”
군사들이 열을 지어 정문 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것을 본 호연주남이 막명대에게 말했다.
“진무사, 우리도 가야지.”
“옛, 영반님!”
“고맙네. 자넨 내가 역적이 되는 것을 막아주었어.”
말에 오르던 호연주남이 정말 고맙다는 표정으로 하는 말에 막명대는 머리를 흔들었다.
“전 금의위의 진무사입니다, 영반님.”
“그래, 자넨 황룡어림위이기 전에 내 부하지. 하하하!”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와 함께 영반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 * *
촹촹촹촹.
사방에 흐르는 피와 시체. 외창의 넓은 부지가 온통 피와 시체로 덮여 있었다.
외창 무사 한 명에게 여러 명의 군사들이 달려들어 기다란 창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사방이 죽어가는 외창 무사들의 비명으로 지옥의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역적을 잡아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군사들이 피 묻은 창을 추켜들고 외창의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바로 북경의 대장군이며 대도독인 위지오민의 군사들이었다.
“여기도 몇 마리 있다!”
군사들의 외침과 함께 창칼이 불꽃을 일으켰다.
촹촹촹.
“컥!”
“큭!”
“뒈져라, 역적 놈들!”
군사들이 외창 무사들의 가슴에 박힌 장창을 사정없이 뽑아냈다.
촤악. 촤악.
뻥 뚫린 외창 무사들의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지만 군사들은 추호도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외창의 무인들은 역적 진야동의 개들!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라!’
이것이 대장군 위지오민의 명이었기 때문이다.
“헉헉. 이렇게 망하다니. 이놈, 위지오민! 내 살아 나가면 네놈의 간을 씹어 먹을 테다!”
여기는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암도(暗途), 외창의 제독 방에서부터 뒷산까지 뚫린 동굴이었다.
언제나 화려한 제독의 옷을 입고 권세를 과시하던 외창 제독의 모습이 지금은 말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암도로 도망치느라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데다 넝마처럼 찢긴 옷을 입은 두추랑을 누가 제독으로 볼 것인가?
그의 뒤로 10여 명의 남녀들과 첩형 사희라가 헐떡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분하다. 그놈이 은목전왕의 부하일 줄이야!”
두추랑이 한탄하는 것을 본 사희라도 이를 악물었다. 그 역시 분하기 짝이 없었다. 은목전왕이 정신을 잃고 대륙 전장에 숨어들었다는 진야동의 통보를 받은 것이 반 시진 전. 그 소식을 들은 사희라는 만세를 불렀었다. 이제 하북팽가에서 당한 수치를 씻을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외창 무사들에게 명을 내리는 순간, 위지오민의 군사들이 공격해 들어왔다.
싸움은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평소에는 위지오민의 군사들을 우습게 보았던 외창 무사들이 그들의 창에 꼬치처럼 꿰여 죽어갔고, 외창 건물마저 함락됐다.
‘위지오민, 놈의 창법은 정말 무서웠어!’
사희라는 놈이 휘두르던 창을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1장(3미터)이나 되는 창이 붉은 구름을 휘감고 몰아치면 외창의 난다 긴다 하던 무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나뒹굴고 목이 사과처럼 떨어져 땅바닥을 굴러갔다.
외창의 고수들은 모두 위지오민의 창에 저승으로 직행하였다. 그때 놈이 외치던 소리가 도망치는 지금도 귀에 쟁쟁했다.
‘이놈들, 내가 바로 은목전왕의 천호단주다! 감히 주군에게 검을 겨눈 네놈들을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는다!’
놈은 창을 든 악귀였다. 만약 이 암도를 미리 만들어놓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의 목도 땅바닥을 구르고 있을 것이었다.
‘반드시 살아서 이 원한을 갚아준다, 위지오민.’
사희라가 이를 악물고 맹세를 하고 또 할 때였다. 앞에서 가던 제독 두추랑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이다! 흐흐흐, 이젠 살았다!”
그것을 본 사희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쓴웃음이 나왔다.
‘미친 색마 같은 놈!’
저놈은 그 다급한 속에서도 제 첩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늙은 마누라와 자식은 팽개치고 말이다. 아마 본처와 자식들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아이고, 살았네.”
“흥! 두 랑, 그 위지오민인지 뭔지 하는 놈, 꼭 잡아서 이 치욕을 돌려줘요.”
3명의 첩이 옹알거리는 소리에 두추랑이 배를 쑥 내밀고 큰소리를 쳤다.
“암! 걱정 마라. 귀여운 것. 내 그놈을 잡아서 돼지 먹이로 주고 말 것이다.”
“호호호, 그거 볼 만하겠네.”
“두 랑, 돼지 먹이로 줄 때 우리 앞에서 줘요.”
“맞아, 놈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싶어.”
역시 두추랑의 계집들다웠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킬킬거리는 비곗덩이들.
쓴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돌리던 사희라는 숨이 컥 막혔다. 불과 3장도 안 되는 거리에 장창을 든 한 명의 남자가 차가운 눈길로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위지오민!”
“위지오민 그놈이 아무리 귀신같아도 이 암도는 몰… 으악!”
이 암도는 누구도 모른다고 흰소리를 치며 몸을 돌리던 두추랑이 비명을 질렀다. 3장 앞에 서 있는 위지오민을 본 것이다.
쉬익!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
위지오민의 신형이 누가 끌어당기듯 눈앞에 불쑥 나타났고, 장창이 번쩍 붉은빛을 뿌렸다.
퍼억!
“이, 이보게, 날 살려만 주면… 캑!”
너무도 다급해서 손을 휘젓던 외창 제독 두추랑의 눈알이 툭 튀어나왔다. 붉은 창이 그의 목을 꿰뚫었던 것이다.
“애고머니!”
“사, 살려 주세요.”
“우린 죄가 없어요.”
두추랑의 첩들이 기겁해서 벌렁 넘어진 탓에 치마가 뒤집히면서 허연 궁둥이가 훤히 드러났다.
촤악!
털썩.
창을 뽑자 두추랑의 몸이 땅바닥에 엎어지면서 첩들을 깔아뭉갰다.
“캑캑.”
두추랑의 육중한 몸에 깔린 첩들이 발버둥을 쳤지만 위지오민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네가 첩형 사희라인가?”
사희라는 이제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위지오민의 두 눈에서 번들거리는 살기. 저것은 절대 타협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인의 기세였다.
“그렇소. 내가 외창 첩형 사희라요.”
“다음에 태어나면 사람답게 살기 바란다.”
촤악!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지지는 것 같다. 사희라는 눈앞이 하얘지고 끝없는 어둠 속으로 자신의 몸이 빠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서서히 쓰러졌다.
사희라의 목을 베어버린 위지오민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역적은 구족을 멸하는 법. 죽여라!”
“명.”
위지오민의 뒤를 따라왔던 호위 무사들이 창을 던졌다.
“아악!”
“사, 살려… 끅!”
퍽퍽퍽.
두추랑의 첩들이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무정한 창은 사정없이 그녀들의 가슴을 뚫고 빠져나왔다.
쓰러진 그녀들의 펄떡거리는 몸뚱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붉은 피. 그러나 무사들의 눈에는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이제 그만 가자. 감히 주군에게 검을 겨눈 진야동을 잡아야 한다.”
“명!”
위지오민의 군사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북경 거리를 내달렸다.
집집의 창문마다에서 북경 시민들이 질풍처럼 달려가는 위지오민의 군사들을 경외의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위지오민의 기수가 쳐든 하나의 깃발 때문이었다.
‘역적 진야동을 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다!’
깃발에 쓰인 빨간 글씨가 핏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 * *
“그, 그럼 음기를 보충하는 방법이?”
설부용의 얼굴에 놀라움과 경악이 물결쳤다.
그녀의 앞에는 주수연과 홍자연, 연자경이 붉어진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하인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처녀인 설부용에게 부탁하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지금 음기를 보충하지 못하면 그이는 죽어요. 아님 바보가 되든가.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왔어요, 설 궁주.”
“하지만, 하지만…….”
설부용이 말을 더듬으며 어찌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절대 하인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맘에 들었다. 그러나 자신은 하인의 사모인 설려화의 조카. 물론 양조카였지만 하인의 품에 안긴다면 천륜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허둥거리는 설부용이었다.
-궁주님,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태상궁주님도 이해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부용의 그림자와 같은 빙살백녀 사천화가 은근한 전음을 보냈다. 그녀는 지금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사천화는 언제나 설부용의 그림자로 있기에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북경까지 오면서 설부용은 이미 하인에게 맘을 뺏긴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는 빙궁의 태상궁주 설대총의 양손녀. 그 때문에 하인을 향한 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이 기회다. 어떻게든 밀어붙여야 해!’
사천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쌀이 익어 밥이 된 다음에는 누구도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궁주님, 나중의 일은 하늘에 맡기고 지금은 그분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빙혈광풍단은 그분에게 목숨의 빚을 졌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우린 정말 염치없는 인간이 될 것입니다.
‘사천화, 그대 마음은 나도 알아!’
설부용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에는 자신이 아니라도 숫처녀가 몇 명 더 있었다. 바로 자신을 따르는 호위 무사인 한설빙녀들. 그녀들은 모두 남자를 겪어보지 못한 처녀들이었고, 빙궁의 무공을 수련했기에 음기가 충만한 여자들이었다. 물론 설부용 자신보다는 못하지만…….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설부용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들이 하인의 품에 안기는 상상만 해도 진땀이 흘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하인의 품에 안기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하~ 내가 그분에게 이 정도였는가!’
자신의 감정에 화들짝 놀란 설부용이 눈을 떴다. 머릿속에서 싸우던 2명의 설부용 중 하인을 마음에 품은 설부용이 이긴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설부용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흔드는 것을 본 세 여인은 마음이 답답했다. 그녀가 거절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언니, 안 되겠어. 다른 여자를 찾아봐야지.
주수연이 전음을 보내자 홍자연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하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서슴없이 내놓을 각오였다.
“설 궁주, 무엇이든 요구하세요. 그분을 살려만 준다면 이 홍자연, 무엇이든 하겠어요.”
“아니, 이러지 마세요. 제가 갈게요.”
당황한 설부용이 홍자연을 잡아 일으키며 하는 말이었다.
홍자연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마워요, 설 궁주. 앞으로 이 홍자연, 궁주의 일이라면 목숨이라도 내놓겠어요.”
그러자 설부용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허공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사실 전 그분을 좋아했어요. 차라리 이번 일이 나에게는 기회지요. 용서하세요, 언니들.”
“……!”
세 여인은 설부용의 고백에 그만 멍해졌다. 부탁하러 왔다가 뜻밖의 일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처녀가 맘에도 없는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렇군요. 우리 형제처럼 지내요.”
주수연이 재빨리 나서서 설부용의 손을 잡았다.
연자경과 홍자연도 설부용의 손 위에 자신들의 손을 올려놓았다.
“설 궁주, 앞으론 설 동생이라고 부를게요.”
“우리 화목하게 지내요.”
그건 설부용을 하인의 여인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호~ 이젠 됐어!’
사천화는 여인들이 서로 손을 잡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물론 태상궁주가 화를 내겠지만 후에는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천지에 저렇게 강한 손서를 얻기가 어디 쉽겠는가?
그러나 사천화도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하인과 태상궁주 설대총은 이미 구면이라는 것이었다.
그 시각, 대륙 전장주 금적산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휴우~ 이를 어쩐단 말이냐?”
정갈한 방 안, 그곳에는 2명의 처녀가 눈이 동그래서 금적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 머리칼을 구름처럼 틀어 올린 여인. 이제 20대 초반인 처녀의 얼굴은 중원의 여인이면서도 어딘가 서양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키도 중원 여인들보다 컸고, 불룩 나온 가슴과 둔부, 몸매 역시 풍만하고 미끈했다.
바로 금적산이 늘그막에 본 금지연이고, 다른 여인은 소월보주 소정남의 딸인 소주민이었다.
“숙부, 무슨 일이 있어요?”
깜찍한 인형처럼 생긴 소주민이 근심스런 눈으로 금적산을 올려다보며 물었지만 그는 연방 한숨만 쉬고 있었다.
“휴우~”
“대체 왜 그러세요, 아빠?”
이번에는 금지연이 답답하다는 듯 금적산을 흔들었다.
그에 슬쩍 눈을 뜬 금적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아, 내가 은목전왕에게 목숨의 빚을 졌다는 것은 알고 있지?”
“예, 그건 이미 들었어요. 그런데 그 일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금지연이 이상하다는 듯 커다란 갈색 눈을 치켜떴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흐흐, 내 딸만 한 여자가 어디 있으려고!’
금적산은 흐뭇해졌다. 그러다 일순 입술을 비틀며 일그러진 인상을 했다.
“사실은 말이다, 그때 내가 은목전왕에게 약속을 했단다.”
“약속이요? 무슨 약속?”
“내 목숨을 살려 준 값으로 무엇이든 요구하라고 했지.”
“그래서요?”
두 처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금적산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부터 잘해야 한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는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은목전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단다. 그런데 그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처녀의 음기를 보충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아니면 죽거나 바보가 된다고. 이건 화병선의 말이니 틀림없어. 한데, 주수연 공주가 나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예전에 한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지. 그 약속을 지키자면 널 은목전왕에게 줘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지연아, 그는 부인이 몇 명이나 있단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한 명도 두 명도 아니고 몇 명이나 아내가 있는 사람에게 주겠느냐? 내 그래서 대답을 못하고 있단다. 아이고, 가슴이야! 차라리 그때 내가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휴!”
금적산이 손수건으로 눈을 꾹꾹 누르며 넋두리를 했다.
“그랬군요. 알겠어요, 아빠. 제가 갈게요.”
“엥?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금지연이 하인을 품지 않겠다고 할까 봐 연극을 꾸몄던 금적산은 어이가 없었다. 딸이 이렇게 쉽게 허락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마치 기다렸던 것 같지 않은가?
“제가 안 가면 아빠는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잖아요. 근데 말이죠 아빠, 나와 주민인 형제나 같고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몸이에요. 그러니 우리 둘이 함께 가겠어요. 주민아, 가자.”
“응? 하지만 언니, 우린 그 사람과 일면식도 없는데…….”
소주민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지만 금지연은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너, 아빠의 원수를 갚고 소월보를 다시 세우겠다고 했지? 그럼 이 길이 가장 빠른 길이야. 뭐해? 일어서지 않고!”
“아, 알았어, 언니.”
두 여인이 휑하니 밖으로 나가자 금적산은 오히려 멍해졌다. 이게 대체 뭔 일이란 말인가?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금지연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빠, 이번만 속아주는 줄 아세요. 아빠는 연극을 할 줄 몰라요. 그래가지고 누가 속겠어요?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이 맘에 들었거든요. 은목전왕 정도면 내 신랑으로 손색이 없지. 호호호.
“컥!”
금적산은 그만 코피를 쏟고 말았다. 세상에, 딸이 어느새 은목전왕을 신랑감으로 점찍고 있을 줄이야. 딸이 말괄량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그였다.
* * *
하인이 누워 있는 곳은 천호 2단의 노고수들이 물샐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선 설부용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가쁜 호흡을 안정시켰다. 3명이 누워도 될 만큼 커다란 침상에 하인이 잠을 자듯 조용히 누워 있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래도!’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인에게 오긴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발 한발 하인에게 다가갔다. 지금까지 하인과 함께 왔지만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었다.
번듯한 이마 아래 붓으로 쿡 찍어놓은 것 같은 짙은 눈썹, 우뚝한 코, 두툼한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하인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당장이라도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인 님, 제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제 마음을 저도 막을 수가 없어요. 오늘만, 딱 오늘 한 번만 당신의 품에 안기겠어요.’
속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허리띠가 풀리며 상의가 떨어져 내리고,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육체가 불빛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아직은 그 누구도 가져 보지 못한 처녀의 싱싱한 육체가 불빛에 아름다움을 한껏 발했다.
아아, 지금 이곳을 보는 남자가 있다면 분명 코피를 쏟으리라.
학처럼 가녀린 목, 터질 듯이 봉긋한 2개의 가슴과 희고 매끈한 배를 지나 울창한 금단의 숲이 떨어지는 옷과 함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
설부용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부끄러운 숲을 두 손으로 가리고 하인의 침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하인은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 이불을 젖히자 하인의 탄탄한 알몸이 그녀의 눈을 찔러왔다. 홍자연이 이미 하인의 옷을 모두 벗겨 놓고 나간 것이었다.
‘맙소사!’
하인의 몸을 쳐다본 설부용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삼켰다. 정신을 잃고 있음에도 하인의 그것은 우람하게 용틀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저렇게 크다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의 분신을 본 설부용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설부용, 정신 차려라. 넌 지금 의원이나 다름없다.’
속으로 결심을 단단히 한 그녀가 하인의 나신을 가로타고 앉았다.
“음양화합대법(陰陽和合大法)을 시전하라고 했지?”
방으로 들어오기 전 화병선에게 음양화합대법의 구결을 전해 들은 설부용은 마음속으로 그 구결들을 속삭이기 시작하였다.
“남녀의 몸은 천지간의 음과 양이라. 양이 성해지면 음이 쇠하고, 음이 성하면 양이 쇠하니 우주의 이치를 따라 두 개의 기운이 화합해야 천지가 태평하고…….”
구결에 따라 몸을 움직이던 설부용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음양화합대법은 본래 도가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남녀의 음양을 조화롭게 하는 부부간의 방사법이기 때문이다.
“내, 내가 왜 이러지?”
평생 북해의 얼음처럼 차갑게 살아온 설부용은 자신의 몸이 뜨거워지자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몸이 저절로 반응하고 들썩거려졌다. 그것이 음양화합대법의 묘용이었다. 일단 시전하고 나면 멈출 수 없는 색공.
설부용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몸의 내부에서 활화산이 터지는 것처럼 뜨거운 것이 척추를 타고 치솟는 것이 아닌가!
“아흐!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설부용은 이제 하인의 어깨를 잡고 거침없이 몸을 흔들었다. 가슴속에 타는 불이 그녀로 하여금 부끄러움도 잊게 하고 욕망에 따라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아! 하아!”
설부용의 몸이 맹렬하게 움직일 때였다. 하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헛!”
설부용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자 하인의 두 손이 그녀의 가슴을 와락 잡았다.
“아앗, 하인 님!”
하지만 하인의 두 손은 사정이 없었다. 잡아당기고 비틀고. 그제야 설부용은 하인이 정신을 차린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인의 눈에서 붉은빛과 은빛이 동시에 휘돌고 있었다.
“어흥!”
하인의 입에서 호랑이 울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벌떡 일어나 그녀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진입해 들어왔다.
“아앗! 아파요.”
설부용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지만 하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무의식 속에서 오직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맑은 물이 흥건하게 흘러내리는 숲 속의 샘을 향해 하인의 분신이 거침없이 돌진해 들어왔다.
“악!”
설부용은 그만 입을 딱 벌렸다. 마치 거대한 흉기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고, 머릿속에서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이 장수의 창에 찔린 것처럼 파르르 떨었다.
“어흥!”
하인의 몸은 멈출 수 없는 말같이 질주했고, 그에 따라 설부용의 몸이 파도치기 시작하였다.
설부용은 너무도 끔찍한 고통에 이를 악물고 두 손은 찢어져라 이불을 힘껏 비틀었다.
얼마 동안 그랬을까? 고통에 몸부림치던 설부용은 자신의 몸을 휩싸는 희열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관통하는 아득하면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쾌락의 기쁨. 그녀의 온몸이 환희로 요동쳤다.
“아아아!”
설부용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질렀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이곳이 어딘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터질 것 같은 이 환희와 기쁨. 머리가 하얗게 폭발하는 기쁨에 흐느껴 울었다.
“아하! 하인… 하인!”
이대로 죽고 싶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다!
지금 이 순간 설부용은 오직 이 생각밖에 없었다.
방 안에 두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가득 차고, 설부용은 하인에게 빈틈없이 매달렸다.
그리고,
“아앗!”
설부용은 눈앞에서 거대한 섬광이 폭발하는 것을 느끼며 사지를 늘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하인의 몸에서 7가지 색깔의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와 두 사람을 휘감았다.
그것은 마치 천상의 빛이 두 사람을 비추는 것 같았다. 바로 하인의 은천만상신공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지만 절정에 올라 흐느끼는 설부용도,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못한 하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팽비연이 마지막인데…….”
하인의 처소 밖에서는 주수연과 홍자연, 연자경이 귀를 막고 서로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하인을 살리기 위해 여자들을 들여보낸 거라지만 마음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인을 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처음 설부용이 나오고 다음은 금지연, 소주민. 이제 마지막인 팽비연이 들어가 있었다. 원래 팽비연은 들여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하인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에 세 여인은 할 수 없이 그녀까지 보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해초처럼 흐느적거리는 팽비연이 나왔다.
“이젠 됐어요. 칠색 빛이 사라지고 은빛이 오빠를 감싸고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팽비연은 스르르 무너졌다.
“어서 방으로 데려가요.”
“예.”
주수연의 말에 천호 1단의 부단주 척발병헌이 입을 헤벌리고 팽비연을 안아갔다. 지금 척발병헌은 마음껏 소리치며 웃고 싶었다. 사실 북경으로 떠나올 때 팽거창의 비밀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팽비연을 주모로 만들라!’
하지만 도저히 방법을 낼 수 없었던 척발병헌이다. 그런데 하늘이 봐주는 바람에 소원을 이루게 된 것이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주님, 이제 비연 소저는 주모님이 되셨습니다. 흐흐흐.’
한편, 방 안을 들여다본 세 여인은 입을 딱 벌렸다. 방 안에 가부좌를 하고 앉은 하인의 몸을 은빛의 안개가 휘감고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된 것 같지?
홍자연의 말에 세 여인이 머리를 끄덕였다. 저 은빛은 분명 은천만상무의 기운이었다.
휘링. 휘링. 휘리링.
문을 꼭 닫고 사방을 경계하는 세 여인의 귀로 은빛의 기운이 회전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무적 고수가 탄생하는 소리였지만 아직은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 * *
대륙 전장의 성벽이 보이는 앞에까지 도착한 진야동은 얼굴을 찡그렸다. 분명 금의위와 외창에 대륙 전장을 지우라고 명을 내렸었다. 때문에 지금쯤은 그들이 먼저 도착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3천의 지옥혈갑군이면 그 누구도 막아설 수가 없다!
“군장.”
진야동의 부름에 거대한 도끼를 어깨에 메고 있던 지옥혈갑군 군장 생사마부(生死魔斧) 기세등이 허리를 굽혔다.
“옛, 계주! 하명하십시오.”
“대륙 전장을 점령하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라. 단, 계집들은 죽이면 안 된다. 알았느냐?”
“명!”
힘차게 대답한 기세등이 1장이나 되는 도끼를 추켜들었다.
그것을 본 진야동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지옥혈갑군은 무적의 부대였다.
‘이제야 끝장을 보는군. 은목전왕, 넌 나와 동시대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크크크.’
진야동은 자신이 무천을 제하고는 제일 강한 고수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착각이지만…….
“저 안에 우리에게 신선한 피를 줄 인간들이 있다. 남자들은 잡아서 마음껏 피를 마셔라. 단, 계집들은 볼 수는 있어도 손댈 수는 없다. 알았느냐?”
“우아아~!”
3천 지옥혈갑군이 도끼를 뽑아들고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들의 얼굴이 피를 먹을 수 있다는 희열과 갈증으로 환해졌다. 지옥혈갑군은 피를 마시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가자.”
우르르.
기세등이 맹렬하게 달려 나가자 3천의 지옥혈갑군이 대지를 울리며 대륙 전장의 성벽을 향해 몰려갔다. 구름처럼 일어나는 먼지, 땅의 흔들림.
대륙 전장의 성벽은 도시나 요새의 성벽처럼 높지는 않다. 약 반 장(1.5미터)의 높이. 그곳에서 밖을 주시하던 황룡어림위들이 흠칫 놀랐다. 저 앞에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자들의 기세를 느낀 것이다.
“십인장님, 적입니다.”
흰 경장에 누런 줄을 팔에 그린 무복은 황룡어림위의 표시였다.
환도를 찬 남자가 동료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적이야. 하지만 걱정 마라. 전장주님의 말대로 우린 여기서 버티고 있으면 된다. 알았나?”
“옛!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하의 말은 약간 떨려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대륙 전장에 있는 황룡어림위들은 단 한 번도 전쟁을 치러보지 못한 사람들. 사람을 죽여 보지 못한 자와 실전을 겪은 자는 그 기세부터가 달랐다. 저 앞에서 달려오는 적에게서 이들은 소름 끼치는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활을 들어라!”
그때 황룡어림위의 백인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척척척척.
성벽에 의지한 황룡어림위들이 일제히 활을 들어올렸다. 대략 3천의 황룡어림위들. 그들의 눈이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건?”
자욱하게 먼지가 일어나는 성 밖을 뚫어지게 보던 황룡어림위의 부위사장 고천두는 눈을 부릅떴다. 먼지구름 속으로 달려오는 적은 땅 위가 아니라 허공을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초고수들이다!”
“어, 어떻게?”
황룡어림위들이 벌떡벌떡 일어섰다. 그들의 눈에 불신의 표정이 우러나고 있었다. 아니, 공포에 질려 있었다.
황룡어림위들은 일류 고수들. 일반 무인들에게는 강력한 무인이지만 지옥혈갑군에게는 애들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계 최고의 고수들이 벌 떼처럼 쏘아져 들어왔다.
“뭣들 하느냐? 화살을 쏴라! 저놈들을 죽이지 못하면 우리가 죽는다. 어서!”
고천두가 정신을 번쩍 차리고 고함을 질렀다.
그제야 황룡어림위들이 허겁지겁 활을 당겼다.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이건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장의 법칙이다.
이를 악문 황룡어림위들이 필사적으로 화살을 날려 보냈다.
핑핑핑핑.
3천 황룡어림위들이 날려 보낸 화살이 하늘을 까맣게 덮었다.
쉭쉭쉭쉭.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빛처럼 쏘아진 화살들이 지옥혈갑군의 몸에 부딪히더니 꽂히는 것이 아니라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크하하! 신선한 핏물이 눈앞에 있다. 앞으로!”
“목을 내밀어라, 사랑스런 내 먹이들아.”
“우~ 아아!”
핏핏핏핏.
어느새 성벽 앞에 다다른 지옥혈갑군이 성벽으로 날아 내렸다. 새카만 갑주와 검은 투구, 손에 쥔 1장이나 되는 거대한 도끼.
그런데 지옥혈갑군의 눈은 흰자위가 없고 온통 시뻘건 핏빛이었다.
“안 돼!”
퍽퍽퍽.
콰직, 우두둑.
휘둘러지는 도끼, 반으로 쪼개지는 머리, 왈칵 쏟아지는 동료의 허연 뇌수와 핏물.
황룡어림위들은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푸들거리며 떨고 있는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는 적들의 모습이었다.
“크크크, 정말 신선하구나!”
“이거야, 바로 이 맛이야!”
쭈욱, 쭉. 쭈욱, 쭉.
쪼개진 머리에 입을 대고 피와 뇌수를 빨아 먹는 자,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씹어 먹는 자, 잘려진 사람의 다리를 들고 피를 먹는 자.
지옥혈갑군의 광기에 황룡어림위들은 무기를 집어 던지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사람이라면 이 지옥의 야수들에게 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누가 공포에 질리지 않을 수 있으랴.
“도망쳐라! 마귀들이다!”
“안 돼! 살려 줘!”
도망치다가 잡혀서 발버둥 치는 사람, 등에 도끼를 맞아 절반으로 갈라져 쓰러지는 사람. 그들에게 달려들어 주둥이에 피를 흠뻑 묻힌 지옥의 악귀들.
대륙 전장의 성벽이 순식간에 죽음과 피의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렸다.
“공격하라! 안으로 들어가라!”
“모조리 죽여라! 축제를 벌여라!”
뒤에서 진야동이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도망치는 몇몇 황룡어림위들의 귀에 들렸다.
* * *
“흐흐흐, 이젠 내가 은목전왕의 장인이란 말이지?”
드디어 소원을 이룬 금적산이 흐뭇해서 별채의 호숫가를 거닐 때, 황룡어림위의 부위사장 고천두가 눈이 반쯤 뒤집어져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자, 장주님! 적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진야동이 보낸 놈들이냐? 얼마나 되느냐?”
금적산이 물었지만 고천두는 대답할 형편이 아니었다. 눈에 흰자위만 남은 채 입으로는 거품을 질질 흘리며 횡설수설했다.
“새카맣게 밀려옵니다. 으허허! 놈들이 피를… 뇌수를… 으으으!”
“이런, 젠장!”
기가 막힌 금적산이 고천두의 수혈을 짚었다.
스르르, 철썩.
그제야 고천두가 늘어졌다.
금적산은 검을 잡으며 사자천극(獅子天戟) 용비강을 불렀다.
“용비강.”
“옛, 전장주님.”
언제나 금적산의 그림자처럼 호위하는 용비강이 뛰어나왔다. 그도 방금 고천두의 정신 나간 모습을 본 상태였다.
평소에는 용비강보다 무공이 더 강한 고천두였다. 한데, 그런 그가 저렇게 넋이 나갔다는 것은 적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고천두가 단 한 번도 실전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탓할 새가 없었다. 벌써 적의 기세가 이곳까지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금지연과 소주민을 보호하라!”
“예? 하지만 장주님!”
용비강이 아연한 눈으로 금적산을 쳐다보았다. 호위대의 임무는 첫째도 둘째도 금적산을 최우선으로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적산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명을 듣지 못했느냐? 지금은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지연과 소주민이 더 중요하다. 그 애들은 이제 은목전왕의 내자란 말이다!”
금적산의 호통에 용비강이 펄쩍 뛰었다. 하인이 자신의 여자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용비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들이 잘못되면 대륙 전장은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하얀 무복과 검은 무복을 입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적이다! 빙혈광풍단은 한빙첨자진을 펼쳐라!”
빙혈마후 설부용의 쨍쨍한 외침이 들리고,
“명!”
착착착착.
빙혈광풍단이 일시에 한빙첨자진을 펼치는 것이 보였다. 역시 혈전을 치러본 무인들답게 빙혈광풍단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이 별채로 가는 길목을 에워쌌을 때, 검은 옷을 입은 천호 2단이 혈천무상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우리 뒤에는 주군이 있다. 천호단원들이여, 목숨으로 적을 막아라.”
천호 2단의 부단주 철호화염창 호범식의 사나운 외침이 들리고, 뒤따라 천호단원들의 우렁찬 대답이 들렸다.
“혈천천하!”
“혈천천하!”
척척척척.
둥그렇게 만들어진 혈천무상진에서 강기가 흐르기 시작하였다. 이제 하인이 있는 별채 쪽으로 가는 모든 길목이 봉쇄되었다.
그것을 본 금적산은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은목전왕의 부하들이야!’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황룡어림위는 전멸하다시피 했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틀어잡은 도에서, 창에서 주군을 지키려는 의지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크크크. 감히 내 앞을 막다니, 내가 누군지 아느냐?”
그때 지옥혈갑군을 이끌고 다가온 진야동이 이죽거리며 외쳤다.
별채 앞의 호숫가가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것은 지옥혈갑군들이 뿌리는 흉흉한 살기 때문이었다. 피부를 따끔거리게 하는 기운. 더구나 저들의 새빨간 눈과 주둥이에 가득 묻은 핏물이 고천두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대체 어떤 무공을 수련했기에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단 말인가!’
호범식은 기가 막혔다. 아무리 마인이라고 해도 익힐 무공과 익히지 말아야 할 무공이 있다. 그것은 세상을 정복한다고 해도 사람들의 규탄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놈들은 이미 인간의 본성을 버린 마귀들이었다.
“항복하라! 항복하면 너희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마.”
진야동이 크게 선심 쓰듯 말했을 때였다. 뒤쪽에서 여자의 맑은 고음이 들려왔다.
“진야동, 이 역적! 누가 누구에게 항복을 하란 말이냐? 네놈은 오늘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한다.”
그것은 공주 주수연의 목소리였다.
걸어 나오는 공주의 주위에 빙혈광풍단을 지휘하는 설부용을 빼고 홍자연과 연자경, 팽비연과 금지연, 소주민이 검과 도를 잡고 있었고, 천호 1단의 노고수들이 살기를 뿌리고 있었다. 또 마르칸과 채국연, 적발개와 차자동, 수라쌍마와 무정철궁 진필성이 진야동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수연과 그 일행이 살기를 뿜으며 다가오는 것을 본 진야동은 피식 웃었다. 저것들은 아직 지옥혈갑군의 힘을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명만 떨어지면 이런 자들은 일격에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옥혈갑군이었다.
“크크크. 주수연, 패자는 역적이고 승자는 왕이다. 이것이 바로 고금 전례의 진리지. 내가 승리했으니 너는 역적의 딸. 하지만 난 너의 항복을 받아줄 용의가 있다. 어떠냐? 항복하면 너는 물론 네 옆에 있는 여인들도 새로운 황제, 나 진야동의 부인으로 만들어주마.”
“저 돼지 코가 정신이 훼까닥한 것 아니오, 비마도룡 님? 지가 젤 센 줄 알고 있네. 나아, 참.”
여인들이 분노해서 검을 잡을 때, 차자동의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말이 모두에게 들렸다. 내공을 실은 말이어서 진야동도 당연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진야동이 분통을 터뜨리려 할 때였다. 이번에는 적발개의 말이 들렸다.
“저런 걸 보고 지랄 옆차기 한다고 하지. 저놈, 아무래도 돼지 코가 돼서 냄새도 못 맡는 모양이다.”
“냄새요? 무슨 냄새 말입니까, 비마도룡 님?”
차자동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고수의 냄새. 여기 있는 분들이 모두 고수라는 것을 저놈은 모르나 봐.”
적발개의 말에 차자동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대체 고수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그로서는 처음 들은 것이다.
“아니, 비마도룡 님! 고수에게서 냄새가 납니까?”
“당연하지. 넌 그걸 모르니 저 돼지 코처럼 평생 가야 고수가 못 되는 거다. 사람이 약하면 눈치라도 빨라야 살 것 아니냐?”
적발개의 말에 차자동이 벌컥 화를 냈다.
“내가 고수가 못 돼요? 난 벌써 심공의 경지인데요?”
그동안 부지런히 수련한 덕에 차자동은 심공의 초입에 들어섰고, 적발개는 심공의 중급 단계였다. 신안천수의 약효가 공력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자식아, 저놈들은 너보다 더 높은 경지야. 그래서 냄새를 맡으란 거다.”
“젠장, 그래도 난 이깁니다.”
적발개의 핀잔에 차자동이 콧김을 불며 도리깨를 단단히 잡았다.
‘저놈들이 심공이라고?’
누구보다 놀란 것은 진야동이었다. 자신의 부하들보다는 낮은 단계지만 심공이 어디 아이들 이름인가? 이 무림에 그런 경지에 든 자는 불과 몇 명밖에 안 된다. 지계와 천계의 고수들을 빼고는.
한데 아무리 봐도 저놈들은 주수연의 호위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적어 보이는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심공이라면 저 중년들은?
진야동은 이제야 왜 지계 10대 고수가 몰살됐는지 알 것 같았다. 내력을 쏘아 보내보니 저 중년들(이전 멸살대)은 최소한 심공의 최상위급들이었다.
사실 지계 10대 고수는 하인 한 명에게 몰살됐지만 진야동은 저들의 공격에 죽은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놈들이 죽는 것은 변함이 없다.’
진야동은 일단 마음을 놓았다. 놈들은 자신의 부하들과 일대일로 상대해도 죽을 운명. 만약 자신까지 가세하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크크크, 기백이 좋구나. 하지만 주수연, 네가 항복하지 않으면 여기 있는 무인들은 모두 죽는다. 항복하라. 그럼 이자들도 살려 주마. 아니, 우리 지계의 무인들로 만들어주지.”
진야동이 마지막으로 주수연을 어르려 들었다. 그로서는 아름다운 주수연과 그녀의 옆에 있는 여자들이 그냥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탓이었다. 하나같이 보기 힘든 절세의 미녀들. 이곳은 마치 세상의 미인들을 모아놓은 장소 같았다. 황제가 되고 저 여인들을 품에 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진야동의 원초적인 신경을 건드렸다.
“계주, 그랬다가 항복하면 저들처럼 생시로 만들려는 속셈이시오?”
그건 수라쌍마의 저주에 찬 말소리였다.
지금 진야동의 옆에 있는 자들은 예전 수라쌍마와 함께 무공을 수련한 자들이었다. 한데, 그들은 자신들을 못 알아보고 있었다. 그래서 몰래 전음을 보내봤지만 감각이 없었다. 그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지계의 최후 무기라는 생시. 생시가 되면 이전의 기억은 하나도 못하고 오직 주인의 명만 따르는 살인 무기가 된다는 것을 수라쌍마는 잘 알고 있었다.
“네놈들은 수라쌍마?”
깜짝 놀란 진야동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수라쌍마가 은목전왕의 편에 있다니?
그때 수라쌍마가 이를 갈며 사람들에게 외쳤다.
“저들은 사람이 아니라 생시요! 모두 조심하시오!”
“생시라고?”
“그랬군. 그래서 피를 먹고 있어!”
“맙소사!”
사람들이 경악한 눈으로 지옥혈갑군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생시들. 그들의 눈에는 오직 피를 갈구하는 감정밖에는 없었다.
“좋아. 이왕 비밀을 알았으니 너희들을 한 명도 살려 줄 수 없지. 어디 생시의 힘을 겪어봐라. 얘들아, 저것들의 목을 자르고 피를 마셔라. 남자든 여자든 살려 둘 필요 없다. 모조리 죽여라!”
“우아아!”
진야동의 명이 떨어지자 지옥혈갑군이 메뚜기처럼 날아들었다.
“저놈들은 하 랑과 철천지원수인 지계의 마인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세요.”
주수연의 외침이 동시에 울리고, 천호 1단의 무인들이 맞받아 쏘아졌다.
“죽어라, 이놈들!”
촹촹촹촹촹.
커다란 도가 도깨비불처럼 사방에 번쩍이고 뿌연 칼날이 달려드는 지옥혈갑군의 목을 후려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까앙. 까앙. 깡깡깡.
도와 검이 부딪친 지옥혈갑군들의 몸과 머리에서 불꽃이 일어나고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금강불괴?”
“이럴 수가!”
튕겨 나오는 도를 쥔 척발병헌이 깜짝 놀란 눈으로 눈앞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생시를 바라보았다. 도가 살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불꽃이 일고 그 충격에 도를 쥔 팔이 어깨까지 저릿했다.
“흐흐흐. 네 피를 줘. 피를 먹고 싶어.”
생시가 빨간 혀로 입술을 빨고는 포탄처럼 쏘아져 들어왔다.
“엇!”
경악한 척발병헌이 잽싸게 보법을 밟으며 놈의 뒤로 돌아섰다.
휘익!
그리고 그의 도가 재차 놈의 허리를 공격했다.
깡.
하지만 도는 또다시 튕겨 나왔다.
“쿼르르. 죽인다!”
도에 맞아 허리를 휘청한 생시가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고는 두 손을 쩍 벌린 채 척발병헌에게 달려들었다. 아마도 광폭한 심성이 폭발하면 괴물의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깡깡깡.
연속 도를 휘둘러 놈의 다리와 머리, 목을 후려치던 척발병헌은 이놈들에게 약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강시가 금강불괴를 이루면 어디든 단 한 곳, 약한 부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놈들은 그런 것이 없는 괴물들이었다.
그러나 몇 번 대적하는 동안 척발병헌은 이놈들이 자신들에 비해 행동이 느리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강시이니 사람처럼 능동적으로 빨리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이들의 약점이었다. 일반 무인들에 비하면 섬전 같은 속도였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심공의 경지에 오른 초고수들. 얼마든지 놈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놈들은 행동이 느리다. 피하면서 공격하라!”
척발병헌의 외침에 사람들이 보법을 밟아 이리저리 피하면서 생시들을 공격했다.
깡깡깡.
하지만 어느 누구도 놈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이런, 젠장. 죽어라, 괴물아!”
차자동은 도리깨를 휘두르며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검은 도리깨가 우박처럼 생시의 머리통과 몸통을 두드렸지만 놈들은 움찔거리면서도 계속 달려들고 있었다. 참으로 징그러운 괴물들이었다.
“젠장, 빌어먹을!”
중얼거리며 전장을 둘러보던 차자동의 눈이 부릅떠졌다. 거대한 철퇴를 휘두르는 마르칸의 포효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래도 네놈들이 부서지지 않는지 어디 보자.”
우르릉. 쒸아아.
마르칸의 철퇴에서 엄청난 소리가 울리며 겁 없이 달려드는 생시의 머리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콰직.
“캐액!”
생시의 머리가 반쯤 부서지고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 대가리가 부서지다니!”
그렇게도 부서지지 않던 생시가 몸부림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르칸의 몸이 허공에 떠서 날아 내리며 그의 철퇴가 생시의 몸통을 두드리는 것도 볼 수 있었다.
퍽퍽퍽퍽.
콰지직.
드디어 그렇게 강하던 생시의 몸이 두부처럼 짓이겨지고 피분수가 뿜어졌다.
“크하하! 어서 덤벼라. 내가 바로 천하제일인 은목전왕 님의 오른팔, 마르칸이다!”
산천이 쩌렁하게 울리도록 고함을 지른 마르칸이 다른 생시에게 쏘아졌다.
그것을 본 차자동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 마르칸 님이시다!’
차자동은 도리깨에 내공을 불어넣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는 떨어지면서 생시를 향해 도리깨를 후려쳤다.
콰앙! 쾅쾅쾅!
“뒈져라, 뒈져.”
콰직.
생시의 머리가 부서지자 차자동이 환호를 질렀다. 드디어 한 놈 잡은 것이다.
“으하하! 나도 한 마리 잡았다!”
그때 옆으로 뭔가 시커먼 것이 달려들었다.
콰앙!
“헉?”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어느새 자신에게 달려드는 생시를 향해 적발개가 도를 휘둘러 막아서고 있었다.
“야, 차자동! 너 뒈지고 싶어? 눈은 어디다 둔 거냐?”
적발개가 눈알을 부라리고는 계속 밀고 들어오는 생시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으아, 정말 징그러운 놈들이네! 야, 제발 좀 죽어라.”
깡깡깡.
별채 앞이 온통 도검과 생시들이 부딪치는 소리로 요란했다. 하지만 3천 생시들의 공격으로 사람들이 점점 뒤로 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