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꺼지지 않으면 죽는다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할아버지와 그 손자 같아 보이는 아이.
“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지상을 내려다보니 인간이 너무 약했단다. 그래서 신께서는 인간들에게 힘을 주셨지. 그게 바로 무공이란다.”
탐스러운 붉은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노인의 말에 아이는 샛별 같은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갸우뚱했다.
“아버지, 그런데 무공의 연원을 보면 각 문파의 대종사들이 만든 무공도 많잖아요. 천마교도 그렇고 무당의 장삼봉 진인이나 소림의 달마대사도요.”
“허허, 그게 의문이구나!”
노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소년을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버지라니? 소년과 노인의 나이 차이는 너무도 커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부자간이었다.
“그래, 소림의 달마대사가 무공을 만든 것도 맞고 무당의 장삼봉 진인이 만든 것도 맞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모든 무술은 신께서 내려 주신 무공에 근본을 두고 있단다. 세상에 퍼진 무예는 모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소년이 알았다는 듯 손뼉을 탁 치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음… 그러면 수백 수천 가지의 무공이 있어도 그 근본은 신의 무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군요?”
“그래, 바로 그것이다!”
노인이 만족한 눈으로 소년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무공이 생긴 후,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단다. 아무리 큰 호랑이나 맹수들도 더는 인간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지. 하지만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단다. 인간은 하나를 가지면 열을 가지고 싶어 하는 존재들. 그들은 힘이 생기자 점차적으로 욕심도 생겼단다. 천 년 전 무공이 가장 강한 인간들은 인간 세상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하기로 결정했지. 같은 인간이면서도 그 인간들을 지배하기 위해서였단다. 하지만 그들이 세상을 혼란 속에 넣자마자 무서운 공격을 받았다. 바로 신이 안배한 집법사자(執法使者)에게 말이다. 피와 눈물이 대륙을 휩쓸 때 나타난 그분은 야망에 들뜬 자들에게 철퇴를 내렸지. 어떤 자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분이 누군지 알겠느냐?”
“예, 그분은 천의무신이에요.”
소년의 대답에 노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천 년 전 대륙에 나타나 악마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영웅, 그가 바로 천의무신이고 우리 가문의 조상이시다. 우리 가문은 바로 그분의 뒤를 이은 집법사자의 가문. 하인아, 너는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그때 살아남은 자들은 인간들 속에 숨어서 호시탐탐 세상을 지배할 음모를 꾸미고 있단다. 우린 그들을 막고 세상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
노인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주먹을 꼭 쥔 소년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아버지. 저 하인, 반드시 그놈들을 징벌하겠어요.”
“아버지! 헉.”
하인은 눈을 번쩍 떴다.
똑똑.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
그제야 하인은 이곳이 어딘지 생각났다. 신안천수를 마시고 운기한 곳.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하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생각대로 가부좌를 하고 앉은 그의 둘레에는 뱀이 허물을 벗은 것처럼 피부가 부서진 각질이 널려 있었다. 그것은 또 한 번의 ‘탈태환골’을 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그리고 맑아진 머리. 하인의 눈에서 은색의 진한 빛이 번쩍 일어났다.
“이제야 모든 것이 생각난다. 내가 누구였는지!”
하인은 번들거리는 눈을 들어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신안천수 덕분에 잃어버렸던 기억이 이제야 모두 살아난 것이다.
70년 전, 혈천신교의 그 참혹했던 홍의겁이…….
1천 년 전, 천의무신에게 당한 천상천은 다시는 세상에 출현하지 못했다. 천의무신의 후예가 무서워서였다.
그들이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1백 년 전. 어둠 속에 숨어 힘을 키운 그들은 그때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하인의 아버지는 놈들을 제거하기 위해 혈마교를 접수했다.
마는 마로 퇴치한다!
그것이 하인의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하여 이름도 마천상이라고 지었고 하인의 이름도 그때부터 마진천이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혈마교를 접수한 후 천마교와 합칠 생각을 했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천마교주의 힘은 아버지와 막상막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하인의 아버지는 은천만상무를 익히지 못했다.
은천만상무는 아무나 익힐 수 없는 무공으로 그것을 익히려면 불사지체가 되어야 했고, 그러자면 불로천과(不老天瓜)라는 황과(黃瓜), 즉 오이가 있어야 했다.
영원의 삶을 준다는 오이, 그리고 그것이 있는 곳은 단 한 곳, 진시황의 무덤이었다.
진시황은 영원히 살기 위해 3천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천하에 파견했었다. 그러나 불로천과는 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시황에게 한 나무꾼이 황금빛 오이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는 천산에서 이 오이를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뭔지 몰라 진시황에게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진시황은 이미 죽었고, 불로천과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진시황의 무덤에 부장품을 넣을 때 불로천과도 함께 넣어버렸다.
하인의 아버지는 진시황의 무덤에서 그것을 가져와 하인에게 먹였다. 그때가 하인의 나이 4살 때.
그러나 얼마 후, 하인의 아버지는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
그 후 장성한 하인은 천마교를 통합하여 혈천신교를 만들었고, 다른 쪽으로는 은천만상신공을 수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인은 아내 설려화가 하독한 혈마진독에 중독되어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천상천의 공격에 하인의 부하들은 차례로 죽어갔다. 하인 역시 혈마진독에 중독되어 주화입마에 빠지며 생사기로에 처했다.
그때 양 장로가 시전한 것이 바로 몽중해독술(夢中解毒術)이었다.
몽중해독술은 잠 속에 빠져 독을 해독하는 방법으로 그 결과를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배교의 술법, 하인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 당시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진시황의 무덤에 있는 관 속에 누워 10년간 잠을 자고 깨어났을 때, 하인은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몸이 어린아이로 변한 데다 기억을 상실했던 것이다.
몽중해독술로 잠을 자는 10년 동안 불로천과가 용해되면서 몸을 탈태환골시켰지만 그만 부작용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양 장로는 하인의 할아버지로 행세하면서 하인을 다시 수련시켰다. 20년이 넘도록…….
“양 장로, 그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어.”
동굴의 천장을 쏘아보는 하인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확 일어났다.
이제 하인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혈천신교의 존주 마진천.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아내 설려화였다. 그녀가 왜 자신에게 혈마진독을 사용했는지, 그것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야 모든 흑막을 알 수 있고, 천상천과의 싸움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다려라, 천상천. 나 하인, 아니 마진천이 너희들을 찾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하인은 벗어놓았던 옷을 입은 뒤 해골에 대고 허리를 굽혔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절이었다.
“유령문주, 그대에게 신세를 졌어. 만약 유령문이 지금도 있다면 내가 그들을 접수하여 더는 누구도 천시하지 못하는 강한 문파로 만들어줄 거야. 그러니 이젠 마음 놓고 편하게 자.”
돌아선 하인은 제완완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녀를 깨우기 위해서였다.
“제완완, 이 신안천수를 먹고 추궁과혈을 받으면 넌 천하의 여고수가 될 거야. 공짜는 아니지만…….”
하인은 아직도 정신을 잃고 있는 제완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탈태환골을 하게 되면 옷이 부서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제완완의 옷을 벗기던 하인은 순간 깜짝 놀랐다. 언제나 검은 얼룩이 묻어 있어 본모습이 어떤지 알 수 없던 제완완의 몸은 한마디로 예술 그 자체였다.
“얘도 한 미모 하네!”
하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얗고 맑은 피부, 적당이 살이 올라 포동포동하면서도 미끈한 몸매, 가슴은 만지면 묻어날 듯 희면서도 빵빵했고, 그 밑으로 급격하게 휘어진 허리는 개미처럼 잘록했다.
“젠장, 가슴이 왜 이렇게 펄떡거려!”
하인은 아까부터 심장이 쿵쿵 뛰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인도 피가 뛰고 열이 있는 남자. 이렇게 어여쁜 미녀를 앞에 놓고 목석이라면 남자도 아닐 것이다.
하인의 눈이 앙증맞은 배꼽을 지나 속곳을 입은 제완완의 금단의 기지를 바라보았다.
팽팽하면서도 둥실하고 탄탄한 엉덩이 가운데에 자리 잡은 도톰한 금단의 기지를 보니 감히 속곳을 벗기기가 힘들어졌다.
“꿀꺽.”
하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고 목이 타는 것처럼 말라들었다. 게다가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초가 불끈거리고 있었다.
“망할. 참아라, 하인아. 얜 지금 정신이 없거든.”
중얼거린 하인은 그녀의 속곳을 잡아 벗겼다. 그러자 눈앞에 나타나는 신비의 영역.
하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짙은 숲 속에 살짝 숨겨진 절대 출입 금지의 기지를 본 하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은천만상신공을 운기했다.
그제야 널뛰듯 쿵쿵거리던 심장이 잠잠해졌다.
“후~ 이거 완전 요물이네!”
잠든 듯 누워 있는 제완완은 정말 아름다운 한 폭의 미인도였다. 왜 그녀를 무림칠봉 중의 한 명인 걸화(乞華)라고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참아, 하인아. 이제부터가 중요하거든.”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하인은 신안천수가 든 옥병을 꺼내들었다.
한데, 정신을 잃은 그녀는 액체를 먹을 수 없었다.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야, 완완. 정말 할 수 없이 하는 거다. 흐흐흐…….”
하인의 입에서 괴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늑대가 웃는 것처럼 음흉한 소리.
그렇게 신안천수 세 방울을 입에 물고 하인은 제완완의 도톰한 입술에 자신의 입을 살며시 포갰다.
‘헉!’
촉촉하면서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입술이 닿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뇌전이 훑고 지나갔다.
‘으음, 참아야 해. 아미타불, 무량수불.’
하인은 눈을 질끈 감고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제완완의 입술을 벌리고 그녀의 입에 신안천수을 밀어 넣었다.
‘컥!’
신안천수를 밀어 넣던 하인은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제완완의 뜨거운 혀가 자신의 혀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을 번쩍 뜬 하인은 정신을 잃고 있는 제완완을 내려다보았다. 제완완은 정신을 차린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신안천수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군. 생존의 본능이야.”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만지며 중얼거리던 하인은 몸속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욕망을 지그시 눌렀다.
“안 돼, 하인아. 사내대장부가 정신을 잃은 여자를 탐하면 안 되지.”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제완완의 혈을 타혈하여 신안천수를 흡수하도록 만들어줘야 했다.
타타타타타.
하인의 손이 허공을 접하고 제완완의 혈들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허공을 격하고 혈을 자극하는 격공타혈(隔空打穴)이 그녀의 온몸을 누볐다. 좀 더 강하게 만들려면 음양천락환체대법(陰陽天樂歡體大法)이 가장 좋지만, 그건 부부만이 할 수 있는 대법. 아쉽게도 할 수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제완완은 초절정 고수의 상위급에 진입할 것이다.
타타타타타.
정신을 집중하여 타혈을 하던 하인의 손이 별안간 멈추었다.
꿈틀.
갑자기 제완완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푸른 기운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가 익힌 개방의 창룡신공(蒼龍神功)이 발동한 것이다.
“이젠 됐다!”
하인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었다.
새파란 기운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짙어졌고, 그에 따라 제완완의 몸이 희미해졌다.
그렇게 2시진. 뚫어지게 그녀의 몸을 보고 있던 하인의 눈이 번쩍 빛을 뿌렸다.
우두둑, 투득.
제완완의 몸이 뒤틀리고 뼈들이 비틀리며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드디어 기다리던 탈태환골이 시작된 것이다.
“됐어. 이렇게 되면 귀걸개에게 뭘 받아야 하지?”
하인은 입맛을 다셨다. 이젠 개방이 무황성에서 탈퇴했다니 돈을 받을 수가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하인이 누군가? 그의 사전에 공짜는 없었다.
그의 눈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제완완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예 노비로 만들고 말아야지. 저만하면 어디 내놔도 인물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이젠 무공도 초고수니. 흐흐흐.”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초절정의 고수가 노비라. 아마 무림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위소옥을 보호하려면 제완완을 무조건 노비로 만들어야 했다. 더구나 신안천수까지 먹이지 않았는가!
“좋았어. 제완완, 넌 이제 노비다.”
무림칠봉 중의 한 명이며 이제는 초고수로 변모한 제완완이 노비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하인이 어떤 생각을 하든 간에 제완완의 몸을 감싼 푸른색의 운무는 점점 짙어져 갔다. 탈태환골이 절정에 오른 것이었다.
* * *
“그럼 내가 노비란 말이야?”
하인의 앞에 버티고 선 한 명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허리에 손을 척 짚고 그를 째려보고 있었다. 정말 눈이 부실 정도의 미녀의 눈이 잔뜩 찌푸려져 있는 모습이었다.
바로 걸화 제완완이었다.
탈태환골한 그녀는 예전의 걸화가 아니었다. 키도 조금 더 컸고 얼굴은 더욱 예뻐졌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머리가 진한 청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창룡신공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지만, 하인도 그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 그래. 넌 돈이 없잖아? 그리고 귀걸개가 나에게 진 오만 냥의 빚도 있고.”
‘젠장, 어디 바로 쳐다볼 수가 있나!’
하인은 지금 제완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어 허둥거리고 있었다. 탈태환골한 후 깨어난 제완완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오빠, 그럼 사부님이 빚진 오만 냥은 이제 무효야. 왠지 알겠지?”
“무, 무효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인은 어이가 없었다. 왜 5만 냥이 무효란 말인가?
제완완이 방실 웃었다.
‘윽, 저 여시!’
그녀가 웃자 마치 수만 개의 꽃잎이 일시에 벌어지는 것 같았다.
하인이 허둥거리는 것을 본 제완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호호, 오빤 이제 내 손에 잡혔어.’
그녀는 지금 온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고, 차고 넘치는 내력은 분출할 곳을 찾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초고수로 변한 것이다.
그녀는 진심으로 하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극강의 고수가 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노비는 절대 사양이었다.
“오빠, 내 눈을 똑바로 봐.”
“왜?”
“오빠가 내 옷을 벗겼지?”
“그야 신안천수를 먹이려면 당연한 거지.”
무슨 소리냐는 듯 제완완을 쳐다보던 하인은 그녀의 반들거리는 눈과 마주치자 움찔했다. 그녀의 눈에서 이상한 열기가 뿜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 허락을 받고 옷을 벗겼어?”
“허락? 야, 정신을 잃었는데 어떻게 허락을 받냐!”
“호, 그러셔? 그럼 시집도 안 간 아가씨의 몸을 모두 봤겠네. 그치?”
“아니, 난 눈 감고 있었다.”
하인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그래? 그럼 내 몸을 만지기는 했겠지?”
“그야 옷을 벗기려면 당연히 만질 수밖에…….”
말을 하던 하인은 도중에 멈췄다. 제완완의 얼굴에 웃음이 넘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또 무슨 수작을 하려고?’
아닐세라 제완완이 하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옷을 벗긴 데다 숫처녀의 몸을 주무르고. 또 있어! 내 거기도 만졌지?”
제완완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자 하인은 다급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만지지는 않았지만 왠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은밀한 금지 구역을 본 것은 사실이 아닌가.
“아냐. 절대로 아냐.”
“그걸 누가 증명해? 어디 증명해봐. 만약 증명하지 못하면 난 오빠가 그거 한 걸로 생각할 거야.”
“하, 하다니? 뭘 했단 말이야?”
하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걸 하다니? 저게 정말 미친 것 같았다.
“내 몸이 아까부터 이상했어. 정신을 잃은 여자를 덮치다니. 그러고도 오빠가 은목전왕이야?”
하인은 머리가 멍해졌다. 이제 제완완이 말하는 그거 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 것이다.
“너, 잘 들어. 내 아내의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난 정말 안 했어.”
하인의 엄숙한 선언에 제완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로 저것이 약점이야. 호호호.’
“그래? 하지만 난 믿을 수 없어! 여기서 나가는 길로 장안에 갈 거야.”
“자, 장안에는 왜?”
“왜라니? 가서 위 언니를 만나 다 말할 거야.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오빠가 날 덮쳤다고.”
하인이 발을 굴렀다.
“너, 너, 미쳤어? 내가 언제 널 덮쳤단 말이야!”
“흥, 그럼 증명해봐. 아마 위 언니에게 말하면 인정할걸.”
“하! 이걸 그냥. 어휴.”
하인의 어깨가 처졌다. 그냥 놔둘 걸 괜히 신안천수를 먹인 것 같았다.
그게 얼마짜린데. 아니, 신안천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물이다. 그런데 그걸 먹이고도 오히려 정신없는 여자를 덮친 파렴치범이 되고 말았다.
“너 나한테 왜 이러니?”
그러자 제완완이 배시시 웃었다.
“두 가지만 들어줘. 그럼 모든 것을 비밀로 할게.”
“내 참.”
하인은 기가 막혔지만 머리를 끄덕였다. 위 매 앞에서 파렴치범이 되는 것은 절대로 사양인 그였다.
“좋아, 말해.”
“음… 첫 번째는 지금부터 사부님이 오빠에게 진 빚을 없애줘.”
“네 목적이 그거였구나. 치사해서……. 알았다. 없어.”
“호호, 두 번째는 이거야.”
제완완이 갑자기 하인의 품에 안겼다.
“날 안아줘.”
뭉클.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자신의 가슴에 부딪치며 부드럽고도 뭉클한 기운이 느껴지자 하인은 그만 머리가 아득해졌다.
“너, 이건… 헙.”
그리고 하인은 미처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제완완이 그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버린 것이다.
하인은 급해졌다. 따뜻하고 말캉한 입술이 덮치자 그만 온몸이 나른해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제완완의 입술이 방긋 벌어지며 부드러운 혀가 밀려 나와 하인의 입술을 두드렸다. 마치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처럼…….
멍해져 정신이 없던 하인은 그때야 퍼뜩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맑고 향기로운 냄새. 그것은 제완완의 몸에서 풍기는 여인 특유의 향기였다.
‘에라, 모르겠다. 주는 것도 먹지 못하면 남자가 아니지.’
하인은 입술을 두드리는 제완완의 따뜻한 혀를 우악스럽게 빨아들였다. 제완완의 혀는 정말 맛있었다.
“하아, 하아.”
한참 동안 하인의 입술을 탐하던 제완완이 숨을 참지 못하고 먼저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두 팔은 하인의 몸을 뱀처럼 휘감고 있었다.
“너, 나에게 부인이 있다는 거 알고 있니?”
하인의 물음에 제완완은 생긋 웃었다.
물론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지금 세상은 능력만 있으면 부인을 10명이 아니라 1백 명도 얻을 수 있었다. 그게 대명천지의 법인 것이다.
만약 하인이 아닌 다른 남자라면 총각이라고 해도 제완완은 절대로 시집가지 않을 터였다.
사실 그녀가 항상 검댕으로 본모습을 감추고 다닌 것은 무공이 약하기도 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미모만 보고 치근거리는 명문가의 자식들 때문이었다.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 부모의 후광을 업고 살면서도 여자만 밝히는 자들은 그녀의 눈에 차지도 않았다.
하지만 하인은 달랐다. 물론 하인도 남자니 여자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자신의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칠 남자라는 점이었다.
여자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맘에 드는 남자에게 죽도록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하인은 사납고 강하지만 자신의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했다. 목숨을 걸고 자기의 여자를 구하려는 남자.
그것을 보면서 제완완은 하인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런 남자라면 평생을 바쳐도 마음이 놓였다. 부인이 있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이제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알아, 오빠. 하지만 난 오빠가 아니면 시집가고 싶지 않아. 이건 내 진심이야.”
그녀가 조금은 부끄러운지 하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똑똑히 말했다.
“난 말이다, 앞으로 피의 바다에서 죽을지도 몰라. 그래도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 나도 너를 사랑하마. 그건 이 자리에서 맹세할 수 있어.”
하인의 대답에 제완완은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꼭 누르고는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하인은 제완완의 입술을 마음껏 탐했다.
조용한 수중 동굴. 물이 흐르는 소리만 나던 동굴에 두 사람의 숨소리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하아… 오, 오빠.”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자 제완완이 하인을 불렀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고 부르는 소리가 아닌, 그저 무의식적인 부름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변하고 가슴이 급하게 오르내렸다.
하인은 바닥에 그녀를 눕히고 하나둘 맛있는 과일 껍질을 벗기듯 옷을 벗겨 갔다.
“오, 오빠… 나, 난…….”
옷이 벗겨지고 하얀 나신이 드러나자 부끄러운지 제완완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으로 가쁜 숨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그때, 하인이 자신의 옷을 벗어 던졌다.
탄탄한 구릿빛 육체. 근육으로 뭉쳐진 그의 몸을 본 제완완은 은근히 숨을 들이마셨다.
“완완, 이건 네가 선택한 길. 지금이라도 후회한다면 없던 일로 하겠다. 어때?”
하인의 질문에 제완완은 와락 그의 몸을 끌어당겨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지금 행복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여자는 어느 때든지 한 번은 시집을 가야 하고, 자신의 몸을 허락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여자가 세상에는 너무도 많았다. 그렇게 따지면 하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 그것이면 족했다.
“헉!”
행복에 겨워 눈을 꼭 감고 있던 제완완은 그만 헛바람을 들이켰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그녀는 거대한 불기둥이 자신의 금지에 무자비하게 침입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윽! 오빠.”
하지만 하인은 이미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흥분한 상태. 마치 진군 명령을 받은 군사처럼 거대한 창을 앞세운 그의 몸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공격해 들어갔다.
“으윽.”
제완완은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처녀라면 언제든 한 번은 겪어야 할 파과의 통증. 하인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몸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아학.”
그런데 이게 웬일? 고통스러워 눈을 꼭 감고 있던 제완완은 어디선가 밀려오는 환희의 노래에 몸을 맡겼다. 그것은 마치 천상에 올라 구름을 탄 듯한 기분이었다.
신선이 된 것처럼 몸이 둥둥 떠가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불꽃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아아아!”
제완완은 저도 모르게 하인의 몸을 으스러져라 꽉 부둥켜안고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지르고 싶어 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온몸이 악기의 줄처럼 하인의 움직임에 따라 어떤 때는 격렬하게, 어떤 때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그녀는 온몸으로 울었다.
그건 평생 처음으로 느끼는 행복의 노래였다.
“아흑! 사, 사랑해, 오빠.”
“나도.”
적막하던 동굴 안이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음향으로 가득 찼다.
* * *
하남성 낙양의 남쪽 교외를 흐르는 이하(伊河)에는 이름난 용문 석굴이 있다.
이곳은 10만 개의 불상이 있는 곳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어떤 이는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어떤 이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비는 곳이기도 했다.
용문 석굴의 중앙에 있는 봉선사동의 지하에는 수만 년 동안 흐르는 지하수가 오늘도 거침없이 흐르고 있었다.
“푸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물속에서 기포가 생겨나더니 사람의 머리가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여기가 끝인 것 같은데?”
“오빠, 일단 올라가봐.”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낭랑하게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
“응, 그러자.”
물 밖으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하인과 제완완이었다.
귀폭협의 수중 동굴에서 한 달간 생활하며 신안천수의 약효를 모두 흡수하고 지하수를 따라 헤엄쳐 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오빠, 여기도 수중 동굴이라면 어떡해?”
“그럼 또 물속으로 가봐야지, 뭘 어떡해.”
하인의 말에 제완완은 몸서리를 쳤다. 지하수를 타고 오는 동안 정말 숨 막혀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캄캄한 어둠 속 지하수가 흐르는 길은 험했다. 어떤 때는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폭포처럼 밑으로 떨어지기를 수십 번. 대체 며칠이 지났는지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만약 하인이 펼친 기막이 아니었다면, 물속에서 빨아들이는 수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다신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제완완이었다.
‘피, 자기도 싫으면서…….’
하인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삐죽이 내밀던 제완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멀리 석벽에 새겨진 조각을 본 것이다.
“오빠, 저것 봐. 불상 같은데?”
“응?”
하인의 눈에도 동굴의 벽에 조각된 불상이 보였다.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는 것은 이곳이 밖이라는 물증. 제완완이 환성을 질렀다.
“하아, 살았다. 오빠, 드디어 밖으로 나왔어!”
“그런 것 같구나.”
하인도 얼굴이 환해졌다. 사실 지하수 속에서의 삶은 지옥의 생활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서 가, 오빠.”
두 사람의 신형이 빛처럼 사라졌다.
하인은 신안천수로 인해 기억을 찾으면서 무형공을 넘어 생사경(生死境)에 도달한 경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자연경에 올라선 것이다.
“여긴 용문 석굴이야, 오빠!”
밖으로 나온 제완완이 기쁨에 찬 소리를 질렀지만 하인은 용문 석굴이 뭔지도 몰랐다.
“용문 석굴?”
“응. 용문 석굴은 십만 개의 불상이 모셔진 곳이야.”
하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10만 개의 불상을 만들자면 대체 돈이 얼마나 들어야 한단 말인가?
“어떤 땡중이 만들었는지, 그놈 무지 돈도 많은 모양이다.”
하인의 말에 제완완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아이고, 웃겨. 오빠, 용문 석굴은 사백 년 동안 만들어진 거야. 낙양이 여러 나라의 수도였… 응? 그럼 여기가 낙양?”
말을 하던 제완완은 기가 막혀 멍해졌다. 삼문협에서 낙양까지는 보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그럼 지하수로 오는 데 보름이나 걸렸단 것이 아닌가!
“세상에, 낙양이라니!”
“여기가 낙양이야?”
제완완이 놀라건 말건 하인은 관심이 없었다.
밖으로 나왔으니 이제부터 할 일이 많았다. 일단은 홍자연의 행방을 알아야 했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제갈만산을 처치해야 했다. 또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천상천 놈들도 찾아 혈천신교 사람들의 복수도 해야 했다.
“응, 오빠. 우리가 물속으로 낙양에 왔어.”
하지만 하인은 무덤덤하게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일단은 자신들이 살았다는 것을 숨겨야 했다.
“가자. 우선은 무림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부터 알아야 해.”
“알았어, 오빠.”
두 사람은 급히 자리를 떴다. 사람들의 눈에 띄어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 * *
“여기 만두입니다. 맛 좋고 값싼 만두가 있습니다.”
“전병입니다. 따끈따끈한 전병입니다.”
노천에 작은 탁자를 놓고 음식들을 파는 장사꾼들이 떠들썩한 낙양 남동로로 죽립을 쓴 남자와 진한 녹색 경장을 입은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검은 가죽옷에 옆구리에는 짧은 검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 같았다.
“오빠, 저기가 향선루야.”
녹색 옷을 입은 여인, 제완완은 너무 기뻐 하인의 팔을 잡고 3층 누각을 가리켰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혀를 찼다.
“벌건 대낮에 여자가. 쯧쯧.”
한 사람이 혀를 차며 말하자 그 옆에 있던 마누라인 듯한 여자가 기겁을 하며 그의 입을 막았다.
“당신, 지금 정신 있어요? 저 사람은 무인이란 말이에요.”
“헉! 무, 무인!”
그에 전병 장사꾼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상관없지만 무인에게 잘못 걸렸다가는 목이 가을날 수숫대처럼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들은 관도, 포졸도 우습게 보는 자들. 전병 장사꾼의 눈에 진한 공포가 어렸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제완완의 날카로운 눈이 홱 돌아갔기 때문이다.
거의 20일 동안을 수중 동굴에 갇혀 살다가 밖으로 나온 제완완은 지금 한껏 기분이 들뜬 상태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자고로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걸으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새 옷을 한 벌 사 입고 향선루로 왔는데, 웬 사내가 그런 기분을 망치는 중이었다.
그녀가 한 발 내짚으려 할 때였다.
-완완, 그만해. 우리 정체를 밝히고 싶어?
하인의 전음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돌아섰다.
사실 제완완을 알아볼 사람은 없었다. 걸화로 있으면서 항상 검댕을 칠하고 살던 그녀와 지금의 모습은 너무도 달라 누구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제완완은 활짝 피어난 백합꽃 같은 모습. 그 때문에 하인만 죽립을 사서 쓰고 있는 것이다.
‘에이, 내가 참는다.’
제완완은 하인의 팔짱을 끼고 향선루를 향해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공자.”
점소이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재빨리 하인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차양이 넓은 죽립, 허리에 걸려 있는 작은 검과 검은 가죽 무복. 분명 무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하인과는 대조적으로 제완완의 모습은 활짝 피어난 한 떨기 꽃과 같았다.
점소이의 눈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멍청한 년, 어느 부잣집 딸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세를 망쳤군.’
그에게 제완완은 무림인에게 유혹당한 부잣집 딸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실제 무림인에게 유혹당해 신세를 망친 아가씨들이 가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점소이. 남이 당하건 말건 음식만 팔면 그만이었다.
“향선루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중원 각 성의 음식이 모두 있지요. 아마 공자님도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이 층에 자리를 줘요.”
이미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제완완의 말에 점소이가 대뜸 허리를 굽혔다.
“예, 소저. 이 층의 전망 좋은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2층은 무인들이 많이 차지하는 곳이었다.
하인과 제완완이 안으로 들어서자 소란스럽게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음식을 집던 젓가락을 든 채 그들의 눈은 모두 제완완에게 꽂혀 있었다.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늘씬한 키에 허리까지 삼단처럼 늘어진 청색의 머리칼.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순식간에 향선루의 남자들을 멍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눈이 제완완을 보고는 급히 옆에 있는 하인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죽립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자 다시 하인의 옆구리에 걸려 있는 짧은 검에 시선이 멈췄다.
‘무인이로군.’
‘젠장, 무인만 아니라면 어떻게 해보는 건데…….’
‘복도 많은 놈. 나도 무공을 배울 수만 있다면…….’
등등, 그들의 마음속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이래서 죽립을 쓰라고 했는데.’
하인은 입맛을 다셨다.
죽립을 살 때 제완완의 미모가 너무 눈부신 탓에 2개를 사려고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반대했다.
자기를 알아볼 사람은 없다는 이유에서였으나 그것은 핑계였다. 하인에게 자신의 미모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도 제완완은 자기를 보며 굳어지는 남자들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울리고 있었다.
‘오빠, 봤지? 이게 내 값이라고.’
하지만 하인을 슬쩍 쳐다본 그녀는 곧 실망했다. 그의 얼굴이 무표정이었기 때문이다.
‘흥, 그래도 속으로는 좋을 거야.’
2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식을 먹던 무인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녀를 보고는 하인을 쏘아보았다. 그들의 눈에서는 은은한 살기까지 뿌려지고 있었다.
‘이것들이 감히 살기를 뿌려?’
하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에게 살기를 뿌리다니. 강아지가 범에게 덤벼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저들은 알고 있을까?
“무엇을 드릴까요?”
점소이의 말에 제완완이 즉시 대답했다.
“청초하인(淸炒蝦仁:새우 살로 볶은 요리), 삼배계(三杯鷄:닭고기를 끓인 요리), 그리고 우탕(牛湯:소고기 국). 음… 술은 황룡주.”
“예이! 바람처럼 만들어오겠습니다, 소저.”
점소이가 신명이 난 소리로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황룡주는 향선루에서 가장 비싼 술로 무려 금자 한 냥이었다. 황궁에 들어가는 술이라서 일반인은 꿈도 못 꾸는 술인 것이다. 누가 금자 한 냥을 내고 그 술을 먹겠는가!
2층의 무인들이 조용해졌다. 모두 질투심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감히 나서지는 못했다. 하인의 옆구리에 걸려 있는 검을 보면 분명 무인.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덤비는 것은 죽음을 자초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나 무분별한 자는 있기 마련인 것 같았다.
“오빠, 이건 새우 속살로 볶아서 맛있어. 자, 아 해봐.”
제완완이 젓가락으로 새우를 집어 하인에게 먹여 주는 것을 보자 살기는 더욱 강해졌다.
“됐어. 난 이게 더 맛있어.”
후루룩, 쩝쩝.
하인이 우탕을 그릇째 들고 마시는 것을 본 무인들은 이마를 찡그렸다. 보아하니 저놈은 분명 낭인 무사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예의 없이 먹을 수는 없었다.
“아잉, 어~ 서.”
그러나 제완완이 몸까지 흔들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자 하인은 할 수 없이 입을 벌렸다.
“쩝쩝.”
하인이 새우 살을 먹자 무인들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때? 오빠, 맛있지?”
“응, 그냥 그래.”
“그래? 그럼 이것도.”
이번에는 닭고기가 입으로 다가왔지만 하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됐어. 난 이 우탕이면 돼.”
“아이, 그래도 맛봐. 으응?”
제완완이 또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하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우탕을 먹고 있었다.
그때였다. 창문가에 앉아 있던 3명의 무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작은 말로 속삭이고 있었지만 하인의 귀에는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곡칠만, 저자… 아무래도 낭인 같지?”
“그런 것 같습니다, 대주.”
얼굴이 말상처럼 길쭉하게 생긴 자가 하인을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좋아. 저 계집, 우리가 먹자.”
대주라는 자의 말에 곡칠만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외진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대주, 하지만 이곳에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대주라는 자의 귀에 곡칠만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미 그는 제완완의 미모에 정신이 나가 있었다.
더구나 그가 흘려보낸 기파에 하인의 내력이 하나도 잡히지 않았다. 그것은 저자가 절정 이상의 고수이거나 아니면 겨우 외공이나 익힌 떠돌이 무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죽립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말소리를 들어보면 20대. 그 나이에 절정 이상의 무인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됐다.
그렇다면 저자를 처리하고 저 양귀비 같은, 아니 양귀비가 와도 울고 갈 것 같은 계집을 마음껏 농락할 수 있었다.
천뢰문 벽력대의 대주 사가청. 그는 벌써 제완완과 벌일 질펀한 정사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으흐흐… 저런 계집이 있었다니, 이건 조상의 돌보심이다.’
색욕으로 눈이 벌게진 그는 하인을 죽이고라도 저 계집을 농락하고 싶었다.
“곡칠만, 우리가 누구냐?”
“그야 천뢰문의 벽력대지요.”
“흐흐, 맞다. 이 낙양에서 누가 감히 천뢰문에 대항한단 말이냐?”
천뢰문(天雷門).
무황성의 소속 문파로, 낙양의 수많은 문파 중에 단연 으뜸이었다.
패도적인 장법을 사용하는 천뢰문은 무황성을 등에 업고 무엇이든 자기들 맘에 들면 닥치는 대로 빼앗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낙양의 중소 문파들은 무황성의 위세에 눌려 감히 대항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자칫했다가는 문파가 몰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당장 일을 진행시킬까요?”
부대주 곡칠만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저 계집을 끌고 가면 대주 혼자서만 재미를 보지는 않을 테고, 당연 자신도 저 아름다운 몸을 품어볼 수 있을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하인이 자기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저 계집과 질펀하게 놀아보자.”
“알겠습니다, 대주. 흐흐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3명이 하인의 식탁으로 거침없이 걸어왔다.
“저들은 천뢰문!”
“벽력장 사가청과 뇌우장 곡칠만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천뢰문의 무뢰배들. 조금 전까지 하인에게 질투 어린 눈길을 보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자들은 최상급의 일류 고수들. 낭인 무사인 저 죽립인이 당할 수가 없는 상대였다. 더구나 낙양에서 가장 큰 위세를 떨치는 천뢰문이 아닌가!
이제 저 죽립인은 처참하게 죽을 것이고, 아름다운 저 여자는 놈들에게 끌려가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저놈들이 반반한 여자들을 끌어다가 실컷 농락하고는 홍루에 팔아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보시게, 누군지 모르지만 빨리 소저를 데리고 도망치게. 저놈들이 자네를 죽이고 소저를 겁탈하려 하고 있네.
누군가 보낸 전음. 하인은 조금 놀란 눈으로 전음을 보낸 점소이를 죽립 사이로 슬쩍 바라보았다.
50대로 보이는 점소이는 향선루에서 빈 음식 그릇을 나르는, 점소이 중에서도 가장 말단에 있는 자였다.
‘혹시?’
하인의 머리에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고맙소, 노인장. 그런데 이것을 아시겠소?
하인의 전음에 점소이의 몸이 굳어졌다. 이 많은 무인들 속에서 전음을 보낸 자신을 정확히 찾아냈다는 것은 저 죽립인이 엄청난 고수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가 하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때, 하인이 손가락을 약간 들어올렸다.
‘헉! 저, 저건!’
점소이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맞는 것 같군. 유령문의 문도라면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터. 사람이 많으니 전음으로 예를 보내라.
하인의 전음에 점소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유령문의 낙양 지부장 귀령(鬼靈)이 장문령부를 뵙습니다.
하인의 입가가 비틀어지며 미소가 걸렸다. 혹시나 해서 전음을 보냈는데 진짜로 유령문도였다.
-좋아. 오늘 저녁 동남산의 신마사 앞으로 오라. 그곳 입구에서 기다리겠다.
신마사는 동남산에 있는 절이다. 낙양의 지리를 잘 모르는 하인이 옷을 사 입고 이곳으로 오면서 제완완에게 들었던 유일한 장소였다.
-알겠습니다.
점소이는 느릿한 걸음으로 그릇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사이 하인의 식탁 앞으로 다가온 사가청 일행이 우뚝 버티고 서서 하인을 내려다보았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향선루.
하지만 하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우탕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후르르, 쩝쩝.
그것을 본 사가청은 피식 웃었다.
역시 놈은 형편없는 낭인에 불과했다. 만약 자기보다 무공이 강하다면 벌써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쳐다보았을 것이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는 판단을 내린 사가청이 부하에게 눈짓하자 사가청의 심복인 파지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제완완에게 포권을 했다.
“소저, 우린 천뢰문의 제자들이오. 여기 이분은 천뢰문 벽력대의 대주인 벽력장(劈力掌) 사가청 대협이시고, 그 옆의 대협은 부대주인 뇌우장(雷雨掌) 곡칠만 대협이시오. 두 대협께서 소저께 잠시 시간을 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파지락은 천뢰문이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주며 말했다. 낙양에서 천뢰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죽립을 쓴 낭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 아름다운 소저조차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아니, 반응이 있긴 했다. 제완완이 살짝 머리를 돌리더니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천뢰문? 그게 뭐하는 곳이죠?”
멍!
순식간에 이상한 기류가 향선루 안에 흘렀다.
세상에, 천뢰문을 모르다니! 사람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도 저 남녀는 낙양에 초행인 것 같았다.
“우리 천뢰문은 무황성 소속으로 낙양에서는 정파 최고의 문파입니다. 에, 그리고 두 대협으로 말하자면 천뢰문의 뒤를 이을 후계자들로…….”
“그만, 됐어요. 천뢰문이 무황성 소속이고 낙양에서 제일 센 문파라 이거죠?”
갑자기 자기의 말을 자르는 바람에 울컥했던 파지락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눈치도 정말 빠른 여자였다. 저런 여자가 지금의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예. 맞습니다, 소저. 여기 두 분 대협께서…….”
말을 하던 파지락은 또 도중에 말이 잘리고 말았다.
“잠깐, 저 두 사람은 입이 없나요? 아님 당신이 항상 저 사람들의 입 노릇을 하나요?”
제완완의 말에 파지락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언제나 사가청은 자기의 위세를 세우기 위해 부하가 먼저 나선 다음에야 거들먹거리며 입을 열었지만, 누구도 감히 저렇게 말을 자르지 못했다. 더구나 대놓고 비웃고 있지 않은가?
“그, 그게…….”
파지락이 말을 더듬거리고 있을 때였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킥킥거리는 소리를 들은 사가청의 얼굴이 벌게졌다.
“소저, 난 천뢰문의 벽력대주 벽력장 사가청이오. 이렇게 아름다운 소저를 만난 것도 하늘이 준 인연인 듯하니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고맙겠소.”
사가청은 말을 하면서 일부러 내력을 죽립인에게 쏘아보냈다. 함부로 나서면 죽는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래서인지 생각대로 죽립인은 우탕 그릇에 숙인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흐흐… 그래, 살려면 그렇게 하고 있어야 한다.’
슬쩍 눈길을 돌린 사가청은 제완완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쿵쿵거렸다. 이건 아무리 봐도 선녀가 하강한 모습이었다.
조금 있으면 저 아름다운 몸을 품는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주체할 수 없게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때 하인은 제완완에게 묻고 있었다.
-완완, 천뢰문은 어떤 자들이야?
-천뢰문은 정파의 탈을 쓴 짐승의 무리야. 저놈들은 이 낙양에서 무황성의 힘을 믿고 약한 문파들을 가차 없이 약탈하는 사파보다 더 악독한 놈들이야, 오빠.
-그럼 죽여도 되는 놈들이로구나.
-응, 죽어 마땅한 놈들이야.
전음을 끝낸 제완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전 이미 임자가 있답니다. 그러니 그만 물러가주세요.”
이게 뭔 소리? 주인이 있다니?
사가청의 눈이 우탕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죽립인을 쏘아보았다.
그때, 상황을 눈치챈 곡칠만이 제꺽 앞으로 나섰다. 이런 일을 여러 번 해본 그들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소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급이 있습니다. 상놈은 상놈에게 맞는 짝이 있고, 귀인은 귀인에게 맞는 상대가 있는 법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뜻하지 않은 불행을 당하기도 한답니다. 안 그런가, 죽립인?”
제완완에게 말하던 곡칠만이 하인을 쏘아보며 위압적으로 내뱉었다. 알아서 꺼지지 않으면 죽는다는 협박.
장내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죽립을 쓰고 있는 하인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힘이 없어서 자신의 여자를 지키지 못한다면 남자로서 얼마나 수치스럽겠는가? 하물며 저렇게 아름다운 애인 앞에서 모욕을 당한다면 죽어도 검을 뽑는 것이 무인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 저 죽립인은 오늘 죽을 수밖에 없었다. 벽력장 사가청이나 뇌우장 곡칠만은 일류 고수 중에서도 최상위급이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담담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귓전에 울렸다.
“꺼져라. 버러지 같은 놈들.”
“헉!”
“저런!”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낙양에서 사가청이나 곡칠만에게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죽었다고 봐야 한다. 한데, 저 죽립인은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사가청과 곡칠만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감히 자신들에게 낭인 따위가 벌레라고 하다니?
“으드득. 방금 그 말, 우리보고 한 말이냐?”
사가청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하인을 쏘아보았다.
“꺼지지 않으면 죽는다.”
또다시 울리는 담담한 목소리.
사가청과 곡칠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건 정말 기가 막히다 못해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 개자식이! 당장 일어나라. 나 곡칠만이 네놈의 대가리를 잘라… 컥!”
하인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하던 곡칠만은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 일며 숨이 턱 막혔다.
‘이, 이게 뭐냐?’
하지만 그때는 이미 곡칠만의 머리가 목에서 분리되어 미끄러지고 있었다.
툭.
콰당탕.
“이기어검이다!”
바늘이 떨어져도 들릴 만큼 조용하던 장내에 탄성이 터졌다. 어느새 검집에서 날아오른 하얀 검이 뇌우장 곡칠만의 목을 자르고 둥둥 떠 있었다.
‘초고수다!’
무인들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들은 죽립인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검집에서 뽑힌 검이 한 사람의 목을 쳐 버리고 지금은 사가청의 얼굴을 겨누고 있었다.
저것은 분명한 이기어검. 저 정도로 이기어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자면 초절정에서도 상급 이상은 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눈이 일시에 죽립인에게로 쏠렸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혹시 구주팔기?’
하지만 구주팔기 중 저렇게 어린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있을 때, 유령문의 낙양 지부장 귀령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허공에 떠서 빛을 뿌리고 있는 검. 저 검은 분명 잠룡검이었다.
조금 전 저 죽립인이 손가락에 끼고 있는 귀면반지를 보았을 때도 속으로는 반신반의하던 귀령이었다.
유령문의 문주가 행방불명된 지 어언 1백 년. 그동안 유령문은 지하로 잠적해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문주가 사라지면서 유령문의 보물고와 많은 무공 비급을 찾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유령문은 어둠 속에 있는 비밀의 문파. 때문에 문파의 보물고와 비급은 오직 문주만이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1백 년이 지나 느닷없이 나타난 문주의 귀면반지. 그것만 가지고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귀령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저 잠룡검. 잠룡검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며 허공에서 둥둥 떠 있지 않은가!
귀령은 유령문의 장로 중 한 명으로 잠룡검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문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저렇게 강한 후인을 보내주셨군요.’
그는 죽립인이 문주의 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강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로 보아 분명 20대인데 이기어검을 사용할 수 있는 강자. 문주의 제자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사가청은 그만 눈이 뒤집혔다. 갑자기 뭔가 번뜩하더니 곡칠만의 머리가 잘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자신의 눈앞에 하얀 검이 나타났다.
‘이, 이런 고수라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천뢰문에 있으면서 세상 무서울 것이 없던 사가청은 지금 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자신이 건드린 자가 이기어검을 구사하는 고수라면 이젠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무림에서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 더구나 시비는 자신들이 먼저 걸었던 것이다.
천뢰문에 들어간 후 탄탄대로를 달려온 사가청으로서는 생사가 오가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무엇도 주저하지 않고 욕심을 채웠고, 설사 주인이 있어도 가리지 않았던 그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지금껏 사가청이 농락했던 자들은 약자였지만 눈앞의 죽립인은 상상할 수 없는 강자였다.
아차 하면 오늘이 내년 자신의 제삿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텅 비고, 그 잘 돌아가던 잔머리도 굴러가지 않았다.
더구나 바로 앞에 죽어 있는 곡칠만의 시신을 보니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무인의 자존심. 그것도 상대에 따라 다르다. 저자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강자. 살 수만 있다면 그깟 자존심 따위는 시궁창에 처박아도 좋았다.
털썩.
그의 무릎이 굽혀졌다.
“대, 대협, 제가 대협을 몰라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천뢰문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면서 머리를 조아렸지만 하인은 앉은자리에서 미동도 없었다.
그것을 본 사가청은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죽는 것만은 면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비웃는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세요, 대협.”
그때,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하인의 입이 열렸다.
“살고 싶나?”
“예? 예. 살려 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진 사가청은 하인의 말에서 희망을 느꼈다.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못하랴.
그가 간절한 눈으로 하인의 죽립을 바라보았다.
“좋아, 내 물음에 솔직히 말하면 살려 주겠다. 단, 거짓을 말하면 네 목은 떨어진다.”
하인이 말을 끝내는 순간, 잠룡검이 한 바퀴 회전하며 사가청의 상투를 스치고 지났다.
으스스.
“헉!”
사가청은 기겁하여 숨을 들이켰다.
상투가 잘리며 머리칼이 흩어져 봉두난발이 되었지만 그는 무조건 빌었다.
“예. 무엇이든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좋아. 삼 년 전 청룡 표국의 딸을 어떻게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