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옆에서 자고 있던 설혜와 취록을 깨웠다.
“야야. 일어나 봐.”
발끝으로 설혜와 취록을 툭툭 친 자운이 일어나 한쪽으로 걸어간다.
한쪽에는 기관진식을 이용하여 보존이 잘 되도록 해둔 옷이 걸려 있었다.
그는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황룡문을 상징하는 황룡이 옷 전체에 수놓아진 금포였다.
“으음.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설혜와 취록이 연달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신의 옷을 보고는 화들짝 놀란다.
“어머!”
취록이 낡아버린 자신의 옷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곧 자신의 내력을 확인해 보고 역시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력이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람.’
일이 갑자 정도의 내력을 예상하고 누웠던 것인데, 무려 십오 갑자가 넘어가는 내력이 단전 속에 있었다.
취록이 자신의 몸을 확인하는 동안 자운은 취록과 설혜를 향해 옷 한 벌씩을 휙휙 던져 주었다.
“입어. 그리고 말이야, 시간이 또 굉장히 흐른 거 같거든?”
모든 일이 끝난 후 그들은 함께 여생을 보내며 자운에게서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설혜야 단편적이나마 알고 있던 진실이었지만, 취록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백 년간의 폐관수련, 아니, 이백 년간 살아 있는 사람이라니.
한데 그 자운이 이번에 또 시간이 굉장히 흘렀다고 한다.
취록과 설혜는 자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들은 동굴 한쪽에 흐르는 물에서 천천히 얼굴을 씻고 자운의 곁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흐른 거 같아요?”
취록의 물음에 자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옷의 부식상태로 봐서는 한 백 년 정도는 더 흐르지 않았을까? 그럼 올해로 나이가 삼백이 넘어가는 건가.”
자운이 혀끝을 쯧 하고 찼다. 어떻게 되어먹은 심법인지 한 번 누웠다 일어나면 백년 정도는 가볍게 흘러있다.
옷을 다 갈아입은 자운은 동굴의 위에서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야명주를 살폈다.
최상급 야명주였는데 이제는 빛이 희미하다.
‘시간이 더 흘렀을지도 모르겠네.’
최상급 야명주의 수명은 오백 년 정도로 알려져 있다.
자운이 저 야명주를 처음 구했을 때가 백 년 정도 사용되었을 때였다.
그때는 빛이 상당히 밝았는데 이제는 희미해지고 있으니, 어쩌면 이백 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미치겠네. 그럼 내가 올해로 몇 살이야?”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던 자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가락으로 나이를 셀 수가 없다.
야명주까지 뽑아 품으로 챙긴 그는 동굴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가벼운 행동.
하나 그 후에 일어난 일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가볍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르르릉-
동굴 전체가 한 번 잘게 떨렸다.
그 후에, 쩌적 하는 소리가 울리며 바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바위에 새겨진 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진해졌고, 곧 바위 전체가 한번 크게 떨리더니 무너져 내렸다.
와르르르-
조각이 되어 떨어지는 돌들을 자운이 발끝으로 찼다.
툭툭-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바위가 사라지자 환한 햇살이 눈앞을 비추었다.
“흐음. 공기가 탁한데?”
그가 코끝을 찡긋하며 숨을 들이쉰다.
햇살도 예전만큼 따스한 것 같지 않았다.
밖을 살펴보았다. 주변에는 숲이 둘러져 있다.
‘나무가 좀 줄어든 거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수면에 들기 전, 그들은 일부러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울창한 산속을 골랐다.
한데 어쩐지 나무의 수가 그때와는 좀 달라진 것 같았다.
울창했던 숲이, 지금은 울창하다 말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그 정도나 흘렀으니 변하는 게 당연…….”
누군가가 자운의 앞으로 지나가며 인사를 한다.
“어이구 둥산하러 오시면서 특이한 옷을 입고 오셨네.”
말이 조금 특이하기는 했으나 알아듣지 못할 리는 없었다.
‘사투린가? 그리고 등산?’
그의 말을 가볍게 사투리라 치부한 자운이 뒤를 쭉 살폈다.
남녀가 올라오는 곳에는 길이 나 있었다.
그 뒤로도 많은 이들이 특이한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요상한 지팡이를 짚고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뭐지?’
그런 그의 뒤로 설혜와 취록이 와서 섰다.
“누구?”
자운이 고개를 으쓱했다.
“글쎄. 모르겠는데?”
그들이 자운의 앞으로 지나가고, 자운이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세상에 변해도 많이 변한 듯했다.
쿠드드드등-
그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가 구름을 가르며 날아갔다.
“영물인가?”
자운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취록과 설혜가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잡아!”
설혜가 소리치고, 취록이 ‘네, 언니’ 라고 답하며 하늘을 그대로 뻗어나갔다.
자운이 그 모습을 보더니 이마를 탁 하고 짚었다.
‘성급하기는.’
공간격 한 방으로 땅에 떨어뜨리면 되는 일인데,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두 아내가 먼저 움직였으니, 그도 움직여야 할 것이다.
자운이 발끝으로 가볍게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 모습을 늦게서야 올라오던 등산객이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놀라 엉덩방아를 찍었다.
“에구머니나!”
그는 오늘 일을 산신령을 만났다 생각했다.
터엉-
취록과 설혜가 하늘을 나는 괴조의 꽁무니에 내려섰다.
그런 둘을 뒤따라 자운 역시 가볍게 괴조의 위에 날아 선다.
“이거 괴조가 아니라 쇠로 만든 건데?”
자운이 기이한 물건을 때리며 말했다.
금강불괴에 이르면 피부가 강철처럼 단단해진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철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이건 분명 철이다.
“허. 신기한 세상이네. 이렇게 무거운 철로 만든 게 하늘을 날고 말이야.”
취록과 설혜가 부정할 생각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지금 이 안에 사람도 들어있는 걸 보니 이 시대의 마차 같은 건가 본데?”
“우리가 얼마나 자고 일어나면 마차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걸까요?”
“글쎄. 한 오백 년?”
자운이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하고 폈다.
하긴, 그 정도 시간이 흘렀다면 이런 철마가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거 신기한 경험인데? 우리도 타고 날아다녀 볼까?”
자운의 말에 취록과 설혜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운이 들어가는 문을 찾았다.
“여기로 들어가는 건가 본데?”
철마의 옆에 붙어있는 문.
단단하게 봉해져 있지만 자운이 열지 못할 리는 없었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비틀려 열린다.
안으로 무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날아다니는 비행기의 문을 잡아 뜯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인 점은, 무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곳에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설혜와 자운, 그리고 취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철마의 안으로 들어간 후에 문을 다시 제대로 끼워 놓았다.
“어디 보자. 아, 저기 사람들이 타고 있군.”
자운이 사람들이 타고 있는 곳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단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말이 자운을 향해 들려왔다.
“Fuck!”
시커먼 물체가 자운의 앞으로 향한다.
자운이 눈을 꿈벅였다.
“이 새끼는 뭔데 지금 이곳에 있어!”
사내가 자운을 향해 무어라 소리쳤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다.
혀에 콩기름이라도 바른 듯 굴러가는 그의 말에 자운이 물었다.
“주술 외우냐?”
사실 자운 일행이 올라탄 비행기는 지금 공중에서 납치가 된 상황이었다.
무장 테러 단체들이 총을 들고 승객들을 협박하며 요구사항을 아래로 전달하고 있던 중인 것이다.
자운이 주술을 외냐고 물어보자 그가 알아듣지 못하고 무어라 화를 낸다.
그러고는 탕!
자운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Hahahahahahahaha!"
그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거 하나는 잘 알아듣겠다.
총을 쏜 사내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이 곧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 총을 견뎌내는 인간은 없다.
“아, 젠장. 아파라.”
하나 자운은 인간이 아니었다.
우드득-
목뼈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자운의 목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미간사이의 주름에 끼어 있는 탄환을 손가락으로 잡는다.
“뭐야, 이게? 당문의 새로운 암기인가? 잘 만들었네.”
탄피를 손가락으로 우그러뜨린 그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총을 쏜 자를 향해 다가갔다.
“근데 살수의 실력이 영 병신이네. 암습을 하려면 좀 실력이 있는 녀석을 보냈어야지.”
자운이 그의 팔을 잡았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팔이 꺾여 나간다.
“으아아아아아아!”
사내가 괴성을 지르고, 자운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뺏어들었다.
“암기통이면 좀 더 작아야 할 거 같은데.”
꾹 하고 힘을 주자 자운의 손에서 총이 으스러진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승객들도, 다른 테러범들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중에 가장 빠르게 정신을 차린 테러범 사내가 무어라 소리를 치더니 자운을 향해 총을 쏘았다.
연달아 총이 불을 뿜고, 자운이 눈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아썅! 아프다고!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21세기에 깨어난 자운은, 깨어난 첫날 아무것도 모르고 무장 테러 단체를 제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