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무림맹과 사파연합의 앞으로 전해진 작은 서신, 그것은 적성이 개최하는 무림대회로 그들을 초대하는 초대장이었다.
“함정이 분명합니다.”
머리 굴리기 좋아하는 제갈세가의 인물답게 제갈운은 적성의 노림수를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놈들이 파놓은 함정이다.
무림대회는 속임수이고, 그들은 분명 그것을 미끼 삼아서 다른 것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사실 가장 정석에 가까웠다.
“그럴 수도 있겠지.”
남궁인이 제갈운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일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이건 정말로 웃기는 일이 아닌가.
“한데 만약 이 초대장의 내용이 진실이라면 저들은 천하무림을 땅따먹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군.”
초대장의 내용은 간단했다.
무림대회라고는 하나 겨루는 이는 자운과 일성 말고는 없었다.
말 그대로 양측 진영을 대표하는 이 두 사람이 나서서 자웅을 가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승자가 천하를 가진다.
간단한 규칙이긴 했지만, 이 처사는 무림 전체를 농락하는 처사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간단히 결판이 날 것이라면 지금까지 적성과 싸워오며 벌였던 전투는, 거기서 피를 홀리며 죽어간 무사들의 넋은 누가 위로해 준다는 말인가.
제갈운과 남궁인 사이에서 분분한 의견이 오갔다.
그들을 사이에 두고 한참을 서찰을 바라보던 자운이 한마디 툭 던졌다.
“하도록하지요.”
그 말에 남궁인과 제갈운이 동시에 자운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갈운의 물음에 자운이 서신을 탁 던졌다.
“어차피 끝을 봐야 하는 거였어. 최대한 피를 덜 흘리고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일이겠지.”
자운의 말에 남궁인과 제갈운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렇다면 그간 피 흘리며 죽어간 정도의 무사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자운이 제갈운의 말을 잘랐다.
“그렇다면 앞으로 죽어갈 무사들은 어떻게 할 거지?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피가 흐른다. 어쩌면 지금까지 흘린 피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르지. 그 후에 승리한다면 뭐가 되는 거지?”
상처뿐인 승리.
자운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정파의 맥이 상할 대로 상할 텐데, 그 후에 정파가 다시 천하위에 우뚝 서봐야 무엇을 할 텐가.
자운의 말에 남궁인과 제갈운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니 하라고 해. 이번의 한 번으로 결판이 난다면 얼마든지 싸워주지.”
그 말에 남궁인이 묻는다.
“혹여나 무상께서 패배하신다면, 그때는 어찌하실 겁니까?”
남궁인의 말에 자운이 씨익 웃어 보인다.
“난 안 져.”
자운이 확신하듯 한 번 더 강하게 말했다.
“절대로 안 져.”
새로운 실마리를 잡았으니까.
“그러니까 무당으로 가보자고.”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아 적성에서 보내온 초대장에 대한 소문은 무림맹 전체에 퍼졌다.
무림맹뿐만이 아니다.
사파연합 전체에도 소문이 퍼졌다.
자운이 지나다니는 걸음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자운의 등 뒤로 향한다.
지금 자운의 두 어깨 위에 무림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이다.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자운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금 그가 향하는 곳은 여산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봉우리 하나.
사람의 인기척이 없는 곳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후우! 아직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사실 자운이 준비하고 있는 비장의 한 수는 이공을 상대할 때 보였던 바로 그것이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무리.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했다. 아니, 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정작 펼쳐야 할 몸으로는 그게 안 된다.
단지이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답답한 걸음으로 자운이 봉우리에 올랐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봉우리에 도착한 자운이 봉우리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름이 넓게 펼쳐져 있는 운해.
자운의 손이 가볍게 허공을 움켜쥔다.
휘익-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자운이 전방의 구름을 주시했다.
만약 성공을 한 것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운해가 두 쪽으로 쪼개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운의 바람은 통하지 않았다.
구름이 두 쪽으로 쪼개지기는커녕 작은 모습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그저 바람을 타고 흘러갈 뿐이다.
무당으로 출발하려면 남은 시간은 사흘.
사흘 안에 반드시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천천히 해보자고.’
자운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을 가져서는 오히려 독이 된다.
이미 꿈결에라도 한번 걸어갔던 길.
지금은 자욱이 안개가 깔려 길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곧 다시 그 길을 기억해 내고 걸어갈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무리는 때가 되면 도달하는 것이다.
만약 하늘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때가 당겨 찾아올 것이다.
자운이 다시 허공을 움켜쥐었다.
꾸욱-
사흘이라는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그사이 무당에서 벌이는 적성과의 마지막 결전에 참여하기 위해 갈 일행이 모두 선발되었다.
자운은 당연히 일성과 한판을 벌여야 하니 논외로 치고, 선발된 이들 중 가장 강한 이는 남우와 설혜였다.
초대장을 보냈다고는 하나 그곳은 사지, 적의 한가운데다.
수를 추려서 간다면 최고의 고수들만이 그곳으로 향해야할 것이 분명했다.
그 뒤를 이은 이들은 무림맹의 남궁인과 괴걸왕이었고 사파연합의 당평청과 벽력도마 사일귀였다.
각기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자운이 일행의 선두에 섰다.
여산에서 무당까지는 넉넉하게 잡아도 오 일.
절대고수의 경공으로 간다면 하루도 걸리지 않겠지만 그 정도로 여유가 없지는 않았다.
남우가 자운을 툭 쳤다.
“자신있냐?”
자운이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건 싸워봐야 알겠지.”
승리를 자신하던 자운도 지금 이 순간에는 확실하게 자신의 승리를 말하지 못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남우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이 녀석, 긴장하고 있구나.’
겉으로는 유들유들하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남우는 알고 있었다.
자운은 초조하거나 긴장할수록 더욱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다.
설혜 역시 자운의 심중을 눈치채고 있었다.
남우와 설혜가 각기 자운의 양옆에 섰다.
“걱정하지 말라고.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한팔 거들고 도와줄 테니까.”
설혜는 말 대신 허리춤의 검을 스르릉 뽑아 보인다.
그들의 말에 자운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제일 먼저 도망이나 가지 마라. 킬킬킬.”
“이게 도와준다고 해도 지랄이야, 지랄은.”
무당에서 벌이는 일전에 대한 소문이 퍼진 것은 비단 무림맹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그 소문으로 천하가 떠들썩했다.
길을 갈 때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들린다.
객잔에 머물기만 해도 자운과 일성의 대결을 점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쉬이 누가 이길 것이라고 장담은 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운이 이겨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적성이 득세한 세상은 정파가 득세한 세상보다 살기 어려웠다.
어느 쪽이든 민초들에게 무림인이라는 존재는 불가해에 닿아 있어 대하기 어려운 이들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적성보다는 정파가 득세한 세상이 살기 좋았다는 점이다.
여기저기서 자운의 승리를 바라는 말들이 들려왔다.
자운은 그 소문을 들으며 천천히 무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중원오악 중 하나이며 남웅주기에 그 모습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향로와 같고 사시사철 안개로 자욱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산, 그 산이 바로 호북(湖北) 균현(均縣)에 위치하고 있는 무당산이다.
먼 곳에서 안개에 둘러싸인 무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상서로운 기운마저 감도는 곳, 거대하게 펼쳐진 일흔두 개의 봉우리가 동공에 가득 맺혀 왔다.
자운은 사실 무당에 처음 오는 것이 아니다.
과거 적성과 무당에서 한바탕 전투를 벌인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이번이 처음이구나.’
적성이 그들을 초대한 곳, 그곳은 바로 무당산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자소봉이었다.
자운 일행의 걸음이 자소봉을 향한다.
여기저기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느껴진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남궁인과 괴걸왕은 시선이 불편한지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해대었다.
누구의 시선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적성 무리의 시선이다.
물론 그들의 주구밖에 되지 않는 하급 잡졸들이었으나 적의 시선을 받는 것이 마음 편안할 리 없다.
그런 반면에 자운은 여유롭기 그지없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자소봉의 꼭대기가 보인다.
자소봉은 무당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은 그 끝에 오르는 것조차 어렵다.
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기라성 같은 무공을 가진 이들.
신형이 한걸음에 꼭대기로 치솟는다.
빛살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빛살이 자소봉의 봉우리에 내려서는 순간, 일성이 자운을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금빛 장삼에 젊어 보이는 외모, 그리고 손에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검이라니, 네가 난신이군.”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네가 천하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미치광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