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봐, 없잖아. 증거도 없으면서 애먼 사람보고 상처를 입힌대. 그리고 말이야, 너, 내가 널 죽이면 나도 죽일 거냐? 꼭 죽여야 한다? 물론 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이야.”
“이, 이놈이!”
자운이 자신을 농락했다는 생각에 이공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동시에 쾅 하는 굉음이 울리며 이공의 신형이 모두의 눈에서 사라진다.
그 움직임을 똑똑히 읽은 이는 자운밖에 없었다.
흐릿하게나마 궤적을 쫓은 이도 남우뿐이었다.
그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장내에서 이공의 움직임을 읽어내지 못했다.
‘뒤.’
자운이 빙글 돌며 검을 사선으로 세웠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멸공지력이 신검을 강하게 두드린다.
신검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하지만 괜히 신검이 아니다.
자운이 기운을 불어 넣자 신검이 잘게 떨었다.
우우우우웅-
동시에 휘어졌던 검신이 펴지며 멸공지력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누가 맞아줄쏘냐!”
자운이 소리치며 다른 손을 움직였다.
용구절천수가 펼쳐지며 용 울음소리가 연달아 아홉 번 울려 퍼진다.
공간이 아홉 갈래로 갈라졌다.
그 각각의 공간마다 자운의 경력이 깃들었고, 다음 순간 이공을 향해 쏘아졌다.
쐐애애액-
이공이 멸공지력을 팔에 둘렀다.
쾅- 쾅쾅콰-
연달아 폭음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 수가 무려 아홉 번.
한 번에 반보씩 이공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밀려난 거리가 사보 반.
그 틈을 이용해 자운이 몸을 뒤로 뺐다.
이공이 사 보 반의 차이는 차이도 아니라는 듯 단번에 좁히고 들어온다.
이공과 자운은 한 걸음에 십 장이 넘는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고수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사 보 반의 차이는 거의 없는 것과 같았다.
이공이 자운을 쫓으며 양팔에 멸공지력을 둘렀다.
뭉실뭉실 피어오른 멸공지력이 두 팔을 벗어나 길게 이어진다.
그 모습이 마치 채찍과 같다.
길게 늘어진 이공의 채찍이 마구잡이로 휘둘러졌다.
멸공지력으로 이루어진 채찍이다.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공간을 무너뜨리며 자운의 운신을 압박했다.
또한 채찍의 움직임은 자운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온다.
빠르게 무너지는 공간속에 자운의 몸이 갇히다시피 했다.
이대로 간다면 곧 이공의 채찍에 적중당할 것이 분명했다.
자운이 공룡을 불러내었다.
공룡은 공간을 통제하는 용.
그렇다면 멸공지력이 무너뜨리는 공간을 충분히 복원해 낼 수 있었다.
물론 전문적으로 공간에 개입하는 힘인 멸공지력만큼 빠르게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몸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은 확보할 수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우-
공룡이 울며 멸공지력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자신의 멸공지력이 가로막히자 이공이 눈을 부릅뜨며 공룡을 노려본다.
그사이에 공룡이 긴 수염을 꿈틀거리며 무너진 공간을 복구했다.
몸을 뺄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는 순간, 자운은 미련이 없다는 듯 몸을 날린다.
쾅!
그런 자운을 쫓은 멸공지력의 채찍이 공룡을 넘어서 휘둘러진다.
“어딜 도망가느냐!”
하지만 자운은 이미 멸공지력이 닫지 않는 곳으로 몸을 뺀 후였다.
그가 자운을 바라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요리조리 쥐새끼처럼 피해내는 것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공룡이 스르륵 하고 자운의 몸 주변으로 돌아와 단전 속으로 들어간다.
자운이 자신의 몸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냈다.
멸공지력을 피하기 위해 바닥을 구르다시피 했기 때문에 몸에 먼지가 묻었던 것이다.
“이거 사람 시켜서 세탁할 생각인데 세탁비는 네가 주는 거지?”
자운이 더러워진 옷을 탁탁 털어내며 그를 놀린다.
이공이 이를 뿌득 갈았다.
“이놈! 끝까지 나를 놀리려 드는구나!”
그의 몸에서 수십 줄기의 흑선이 발출되었다.
하나하나가 멸공지력의 정수, 응축된 멸공지력의 결정체였다.
공간마저 무너뜨리는 힘인 멸공지력이 선으로 보일 정도로 압축되어 날아드는 것이다.
그 수가 수십 다발.
스치기만 하더라도 살이 조각조각 분해 될 것이다.
심하면 뼈가 그 자리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질 수도 있었다.
‘맞아줄 수는 없지.’
자운이 용린벽을 양옆에 두르고 흑선 속을 파고들었다.
수십 다발에 이르는 흑선이 요리조리 움직이며 자운을 압박했다.
자운은 양손으로 형성한 용린벽을 방패마냥 움켜쥐고 사방팔방으로 움직였다.
쾅쾅쾅-
흑선의 다발이 달려들며 부술 듯 용린벽을 후려쳤다.
하지만 자운의 내공을 가득 머금은 용린벽은 그 강도가 가히 호룡에 맞먹을 정도로 쉬이 부서지지 않는다.
쾅쾅-
자운의 신형이 단번에 이공의 가슴팍까지 파고들고, 자운의 눈이 반짝인 순간 이공의 눈 역시 반짝였다.
“파고들 줄 알았다, 이놈!”
자운이 대경실색하며 물러나려 했다.
자신이 파고든 것이기는 하지만 이공이 판 함정일 줄이야.
‘어쩐지 너무 쉽더라니.’
말아 쥐는 이공의 주먹이 대포처럼 거대하게 보인다.
뻗어나오던 흑선이 모조리 주먹으로 빨려들어 가는 순간, 거대한 멸공지력이 쏘아졌다.
쾅-
자운을 뒤덮은 검은 포탄이 그대로 밀고 나갔다.
“미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멸공지력의 덩어리를 보며 남우가 경호성을 터뜨렸다.
온몸의 멸공지력을 뭉친다.
“모두 내 뒤에서 물러나라!”
저걸 막으면서 자신의 뒤로 향하는 충격파까지 방어할 자신이 없었던 남우가 자신의 뒤쪽을 비웠다.
독정기의 방패가 형성되는 순간,
쾅!
멸공지력이 남우의 독정기를 후려쳤다.
남우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크으으으으으윽!”
지금 막아낸 자신이 이렇게 힘든데 저 속에 들어가 있는 자운의 고통이 얼마일지는 감히 상상도 가지 않는다.
‘이 정도에서 쓰러지는 거냐!’
“이 미친 녀석아!”
남우가 마음으로, 입으로 자운을 불렀다.
그 순간, 황룡 한 마리가 흑색 대포의 궤적 속에서 치솟았다.
호룡!
“넌 조금 있다가 뒈지게 맞자.”
자운이 호룡으로 멸공지력을 모조리 소멸시켜 버린다.
멸공지력 속에서 호룡의 보호를 받은 자운은 옷이 좀 너덜너덜하기는 하지만 괜찮았다.
자운의 좌수가 잘게 떨린다.
“후우! 죽는 줄 알았네.”
간발의 차로 호룡을 불러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미리 만들어두었던 용린벽의 방패를 두 개나 겹쳐서 전면을 보호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저 속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자운이 이공을 노려본다.
“멍청하게 공격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함정도 팔 줄 알고, 제법 대단한데?”
“그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나오다니, 너는 정말 정파 무림의 구성이구나, 구성이야!”
이공이 자운을 향해 순수한 감탄을 했다.
이것은 적으로서 보내는 찬사가 아니라 무인으로서 보내는 감탄이었다.
자신이라도 저 속에 들어가면 온전히 목숨을 보전할 자신이 없는데 그것을 막아내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자운이라는 놈이 괴물인지 그렇지 않으면 황룡문 놈들이 괴물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찌 이리 황룡문에는 괴물이 많다는 말이냐.’
그는 이를 뿌득 갈며 이백 년 전을 상기했다.
이백 년 전, 황룡검존이라는 자도 자신들을 막아섰다.
당시 무림을 수호하는 최고의 구성을 꼽으라면 단연 황룡검존을 꼽아야한다.
그런 구성의 자리를 이번에는 그 후예가 꿰찬 것이다.
이공의 칭찬에 자운이 씩 웃었다.
“과찬의 말씀. 그런다고 누가 봐줄 줄 알아?”
“놈, 황룡문의 무공이 과연 대단하기는 한가 보구나.”
“황룡문의 무공? 물론 대단하지. 그걸 이렇게 멋지게 펼쳐내는 나는 정말 세상에 다시없을 불세출의 천재이고 말이야.”
제 얼굴에 금칠도 저 정도면 병이다.
하지만 이공은 아무런 소리도 하지 못했다.
저 정도 경지에 오른 이를 천재가 아니라고 부인해 버린다면 같은 경지에 올라 있는 자신 역시 천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부정하는 대신 자운의 뒤로 늘어선 황룡문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너로 인해 황룡문은 사라질 것이다. 황룡문의 무공은 지독히 위험하구나. 너와 같은 고수가 또 하나 배출된다면 우리는 천하를 정복한 후에도 두 발을 뻗고 잘 수 없을 터. 황룡문은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다.”
자운이 피식 웃었다.
“어,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네. 나는 적성을 지워 버릴 생각을 했는데 넌 황룡문을 지워 버릴 생각을 했구나.”
자운이 황룡신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래서 넌 죽어야 해!”
“네놈 역시 마찬가지다!”
자운이 휘두른 검에서 반월 형태의 기운이 뿜어졌다.
이공의 몸에서 역시 수십 다발의 흑선이 뿜어지며 반월 형태의 강기와 충돌했다.
쾅쾅-
천지가 진동할 정도의 굉음이 울리고, 둘이 서로를 향해 빙글빙글 돌았다.
이공의 주위에는 흑선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운이 그런 이공을 향해 물었다.
“혹시 그거 문어 다리 보고 창안한 무공이면 나한테 이길 생각을 버려라. 황룡문의 무공은 전설상의 영수인 황룡을 보고 창안한 무공이니까.”
패도적이며 강맹한 이공의 흑선이 한순간에 문어다리가 되어버렸다.
이공은 격노하는 대신 마음을 침착하게 했다.
저 말재간에 이성을 잃고 휘둘려서는 안 된다.
놈은 상대를 농락하고 기만하는 데 있어서는 무공보다 더 고수였다.
그런 술수에 말려들어 가 침착함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뼈아픈 패인이 될 수 있다.
그가 동요하지 않자 자운이 속으로 혀를 찼다.
‘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