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그런데 자운은 지금 그것을 무시하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 무림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요.”
자운이 이죽이는 말투로 그의 말을 받아쳤다.
“너네가 나가지 않으면 너넨 평생 무림에 받아들여지지 못할 거야. 그렇다면 차라리 이번 기회에 무림에서 빼도 박도 못할 발판을 만들어둬야 할 거 아냐?”
자운은 세외무림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다.
또한, 당장에 그들을 무림에 들여 놓을 방법 역시 있었다.
“어떻게 방법이 있겠습니까?”
남상천이 자운을 바라보며 진지한 눈길로 말한다. 그의 눈길에 자운 역시 진지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림맹의 무상으로서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정파무림 은 지금까지 없었던 초유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독곡에 원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제7장 혹시나가 역시나구나.
자운의 말에 남상천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무림맹의 무상으로서 하는 공식적인 요청, 지금 이 말을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가 머릿속에서 일어난 혼란을 정리하고 있을 때, 자운이 품속에서 패 하나를 꺼내었다.
무림맹의 무상임을 중명하는 옥패가 자운의 손에 있었다.
남상천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무림맹의 무상이 사용한다는 패를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만, 이렇게 잘 음각된 패를 사용하는 곳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내는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는 절대고수, 무림맹의 무상 직을 맡고 있다고 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을 정도의 고수였다.
‘정말일까?’
머릿속에서 온갖 상념이 교차한다.
이번 일이 잘 된다면, 중원무림은 독곡에 은혜를 입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독곡은 이백 년 전의 전장에서도 황룡문의 요청을 받아 무림에 나선 적이 있었다.
그때에 많은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림의 공식적인 요청이 아닌 황룡문의 요청이었기 때문에 이후 무림으로 당당히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자운은 당시의 황룡검존과는 다르게 지금의 자운에게는 무림맹의 무상이라는 직위가 있었다.
또한, 지금의 무림은 무림맹의 힘만으로 구제하기가 힘들었다.
독곡의 힘을 더하고, 천산설곡의 힘을 더한다면 아마도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엄밀하게 말하면 설곡도 세외 문파잖아?’
이미 설곡이라는 세외 문파가 가담을 한 시점에서 독곡 하나가 더해진다고 해서 뭐라고 할 문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정신이 박힌 문파라면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 분명했다.
자운에게서 받아든 옥패를 들고 그는 한참을 생각에 잠기었다.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일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자운에게 옥패를 돌려준다.
탁-
자운이 그 옥패를 다시 받아 들며 남상천에게 물었다.
“어때. 결정이 좀 되었나?”
“이 일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남상천의 방을 나오며 함께 갔던 우산과 우천 중 우천이 자운을 향해 물었다.
“어떨까요? 과연 독곡이 수락을 할까요?”
자운이 코끝을 매만지더니 우천의 물음에 답을 한다.
“글쎄 그건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독곡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는 거야.”
북해빙궁은 그나마 무림과의 교류가 있었던 문파다. 그 전통이 천산설곡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독곡은 무림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문파. 독곡의 몇몇 무사들에게는 무림으로 나가보는 것이 일생의 소원인 이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군요. 무림맹의 무상 직을 받아낼 때, 설마 이것까지 염두하고 받으신 겁니까?”
이번에 물은 것은 운산이었다. 자운이 운산의 말 하고 웃었다.
“내가 그런 걸 할 줄 알면 칼질을 왜 하냐. 자리 깔고 살지.”
그 말에 운산과 우천이 웃었다.
“푸하하핫. 그렇군요. 역시 대사형이십니다.”
“그렇지. 가진 건 적당히 이용하면서 잘 쓰면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지위는 이럴 때 써야지, 안 그래?”
그간 무림에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독곡이 비축해 둔 힘은 결코 적지 않았다.
독곡의 힘이 더해지면 적성을 상대하는 일이 한결 쉬워진다.
‘일이 좀 잘 풀리면 좋겠는데 말이야.’
다리 아래를 스치던 바람이 웬일로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그 코끝을 타고, 그리운 향기가 지나간다.
‘남우.’
녀석이 자주 쓰던 독가루에서 나던 냄새다. 공기 중에 극히 미량 섞여 있었기 때문에 들이쉰다고 해도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썩 좋은 냄새는 아니었지만 그리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냄새이기도 했다.
‘녀석 닮은 어느 독쟁이가 또 독을 뿌렸나.’
자운이 코를 킁킁 거렸다.
이틀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남상천이 자운을 만나러 왔다.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가 결정 된 듯한 표정이었다.
자운이 그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그래. 결정은 좀 했나?”
그 말에 남상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함께 가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말에 자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말야? 나보고 지금 어디 가자고?”
고개를 끄덕이는 남상천, 자운이 남상천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를 가자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쯤 따라 간다고 해서 손해되는 것은 기껏해야 신발 닳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그런 신발쯤이야 하나 달라고 하면 되지.’
남상천의 손에 이끌려서 간 곳은 독곡에서도 굉장히 심처에 위치하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나를 데려와도 되는 건가?”
자운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딱 봐도 문파에서 중요한 곳이라고 자랑하는 듯한 장식에 석벽들까지, 외인이 함부로 발을 들일 곳이 아니다.
자운이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자 남상천이 몇 걸음을 더 걸어가다가 자운에게 답을 했다.
“이곳에 계시는 분이 난신을 뵙고 싶어 합니다.”
“날? 뭐하러?”
사실 그것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자운이 주목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독곡의 주인이자 최고 권위자인 남상천이 이곳에 있을 누군가를 이곳에 계시는 분이라고 극존칭을 붙여 불렀다.
그 말이 가지는 파급력은 절대로 작은 것이 아니어서 자 운으로서는 그 말을 그냥 듣고 넘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분은 누구야?”
하지만 남상천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어갈 뿐, 그가 답을 하지 않자 자운 역시 되묻지 않는다. 어차피 이 길을 따라간다면 결국에는 알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더 걸어갔을까, 자운의 앞에서 걸어가던 남상천의 걸음이 뚝 하고 멈추었다.
그런 그의 앞에 우뚝 자리한 화려한 제단, 그 위에 솟아 있는 것은 거대한 석벽 이었다.
“올라가시지요.”
남상천이 길을 비켜주며 자운에게 말한다.
“넌?”
남상천은 더 이상 같이 가지 않는 것인가? 자운의 의문에 남상천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저는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독곡의 곡주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에 기거하는 자, 그런 자가 자운을 왜 불렀을까.
의문은 더욱 거세어져 갔다.
그리고 저 석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엄청난 괴물이 있나 보군.’
자운이 눈을 반짝하고 빛내었다. 지금 상황에서 괴물 같은 능력을 갖춘 조력자가 늘어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운이 곧 그 생각을 털어내었다. 저곳에 있는 이가 꼭 조력자라는 법도 없지 않던가.
확실하지 않으니 무어라 단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몸으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나?’
자운이 천천히 제단의 계단을 올랐다. 의식적으로 세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헤아리게 된 계단의 수는 총 칠십 두개.
칠십두 개의 모든 계단을 밟아 자운이 석벽의 앞에 섰다.
그그그긍-
힘을 주어 석문을 열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석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자운이 그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어둠이 내려 깔렸으나 자운에게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열리었던 석문이 다시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자운이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공격을 느끼고 몸을 펄쩍 뛰었다.
‘독기!’
자운이 허리춤에서 황룡신검을 뽑았다. 이곳에서 황룡무상십이강을 사용했다가는 그대로 건물이 모두 무너질 것이다.
‘그건 쓸 수 없겠군.’
이 제단은 독곡에서 꽤나 중히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제단을 함부로 무너뜨릴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자운이 검을 뽑는 것으로 만족했다.
화르륵-
검에서 화기가 일며 선명한 금광이 휘감기고, 자운을 공격하던 독기가 강력한 열양지기에 모두 타서 사라진다.
“뭐하자는 미친놈이냐!”
자운의 목소리가 제전에 쩌렁쩌렁 울리고, 어둠 속에서 자운의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이 같아서 혹시나 했더니 혹시나가 역시나구나.”
자운이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자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눈앞에 보이는 청년의 모습이, 자운이 기억하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과 똑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의 세수는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의 나이가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