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계곡물 맛이 끝내준다. 자운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고 다른 황룡문도들 역시 뒤이어 물을 꿀꺽거리며 삼켰다.
다들 지쳐 있던지라 물은 꿀맛 같은 단맛을 선사했다.
충분한 수분을 보충한 후에 이어진 것은 휴식이었다.
그늘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고, 운산이 그 속에서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로 여기서 한가하게 쉬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그의 말에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움직이면 에들 몸만 상하지. 차라리 천천히 체력을 비축하면서 움직이는 게 좋아. 이런 오지에는 체력관리 잘 못하면 병이 걸릴 수도 있으니까.”
자운이 설명을 해주자 운산이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문도들이 탈이라도 나면 곤란하기는 했다.
얼마나 그늘에서 쉬었을까, 날이 조금 선선해지기 시작 할 무렵, 자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십니까?”
자운이 일어나며 코를 킁킁거리자 운산이 자운의 뒤를 쫓아 일어나며 물었다.
운산이 물었으나 자운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해서 주변을 살핀다.
“피 냄새가 나는데?”
자운이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자운의 말에 운산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그 역시 코를 통해 냄새를 맡으려 노력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람이 불어오며 그 속에 미미한 혈향이 섞여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독향?”
자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피 냄새 사이로 독향이 섞여서 나고 있었던 것이다 자운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독향과 혈향이 동시에 난다면 주변 어디선가 전투가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퍼뜩 하고 백정명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운남은 아직 적성이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독곡과 계속 겨루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운이 킁킁거리며 피 냄새를 쫓았다.
“꽤 먼 곳에서 흘러들어온 피 냄새가 분명한데.”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자운의 눈 위로 개울 위에 흐르는 붉은 물이 들어온다.
자운이 개울을 향해서 달려갔다.
그리고는 흘러오는 붉은 물을 확인했다. 분명한 피다. 그것도 적은 양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피의 양으로는 계곡물의 색이 변하지 않는다.
계곡물의 색이 옅은 선홍색을 띠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피 속에 독기도 섞여 있는 것인지 혈향 사이에 독향도 섞여있었다.
“상류 쪽이군.”
자운이 황룡문도들을 불러 일으켜 계곡의 상류로 향했다. 독향이 섞여 있는 것이 분명하니 독곡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 추측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계곡의 위로 올라갔을까.
한 시진 정도를 계곡을 타고 올라서 그는 스무 구에 이르는 시체가 독기에 녹아내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옥. 독기가 제법 강하군.’
화골산도 살짝 뿌린 것인지 뼈 역시 부글부글 끓으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자운은 황룡문도들의 접근을 막은 후 홀로 독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양옆으로 은은한 금광이 피어오른다.
그 기운에 독기들은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타들어갔다.
독기와 화기는 상극이다. 황룡문의 내공심법은 양기를 담아 극대화시켜 화기로 바꾸는 무공 그 힘을 주변에 둘렀으니 어지간한 독들은 침범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자운이 녹아내리고 있는 시체 중의 하나의 팔을 집었다. 그리고는 내력을 천천히 불어넣었다.
이들이 어느 곳의 무사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사파의 무사들이라면 사특한 기운이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무사의 몸속에서 사특한 기운이 느껴지자 자운이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무래도 이들은 독곡의 무사들과 싸움이 난 적성 소속 사파의 무사들인 듯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자운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계곡의 상류, 시체들이 있는 곳 바로 옆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고 주변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둘러져 있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빽빽이 있어 지리를 모르는 사람이 저 사이로 들어갔더라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형이 익숙한 독곡의 무사들이라면 저 속을 얼마든지 움직이고 다닐 수 있었겠지.’
자운이 숲 속으로 다가갔다. 주변을 찾아보자, 혼적을 지우기는 하였으나 미미하게 남아 있는 발자국이 있었다.
‘역시 독곡의 무사들은 이곳에서 사파의 무사들을 공격했구나.’
자운이 씩 하고 웃었다.
격전의 자국이 없다고 했더니 독과 지형의 이점을 활용해 훌륭히 적성을 상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니 적성에서 독곡을 상대하기 어려워했겠군.’
정면승부가 아닐 뿐더러 지형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또한, 독은 잘 사용하면 대량살상 까지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적성이 아무리 규모가 크고 강하다고는 하나 이런 독곡이 가진 이점들 앞에서는 크게 힘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독곡은 무사한 것 같아서 다행이야.’
자운이 문도들 옆으로 돌아가며 자신이 파악한 바를 알려주었다.
독곡과 적성의 싸움이 있었고, 독곡이 이 전투에서는 숭리했다는 사실까지.
자운이 설명해 주자 문도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독곡으로 이동을 해볼까.”
독곡의 위치는 자운이 알고 있었다. 무림 세외 문파이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문파이긴 하지만 이전에 남우의 초대를 받아서 방문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곡으로 향하는 자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독곡의 근처로 다가가자 녹색 안개가 자운의 주변을 두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불안한지 문도들이 자운의 옆으로 더욱 바싹 달라붙었다.
자운이 녹색 안개를 보며 피식 하고 웃었다.
‘이건 여전히 변하지 않았네.’
독곡을 방문하며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침입자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둔 단체, 어지간한 고수는 이 속에서 감각을 잃고 헤매다가 진의 밖으로 자연스럽게 밀려나게 된다.
하지만 자운은 어지간한 수준의 고수가 아니었다.
‘이런 진법쯤이야.’
일직선으로 돌파할 수도 있었다.
이미 어디에 독곡의 무사들이 있고 어느 쪽에 독곡의 건물이 있는지도 파악이 끝난 상황이었다.
자운의 걸음이 거칠 것 없이 움직였다.
그를 따르는 황룡문 무사들도 천천히 걸음에 힘이 실리었다.
그들의 옆에 있는 존재는 당금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무엇이 두렵다는 말인가.
자운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발걸음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녹색 안개가 사라지며 자운의 눈에 독곡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독곡의 문은 아직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그 사이로 천장단애가 가로지르고 있었으며 위태로운 다리 하나가 걸려 있었다.
비상시에는 이 다리를 잘라 적들의 침입을 막는 동시에 천장단애로 떨어지는 나락을 방책처럼 사용하는 독곡이었다.
무사들이 서 있는 것은 정문의 앞이 아니라 그 다리의 앞이다.
자운들이 녹색 안개를 헤치고 걸어나오자 독곡의 정문을 지키던 무사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리었다.
“지금 저 진법 속을 헤집고 나온 것이오?”
독곡 무사의 물옴에 자운이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얼마 만에 보는 독곡의 입구던가. 이백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독곡의 형태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자운의 말에 무사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어, 어디서 오신 분들이요. 호, 혹시……?”
그가 말꼬리를 흐리며 허리춤의 검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적성에서 온 자들이라면 단번에 다리를 끊어 독곡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행동이 빤히 보이자, 자운이 피식 하고 웃으며 검을 빠르게 뽑았다.
쉬리릭-
자운이 검을 뽑자 당황한 것은 독곡의 무사였다.
“어딜!”
그가 단번에 검을 치켜들어 다리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자운의 좌수가 출수되는 것이 빨랐다.
휙휙 하는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무사의 혈이 단번에 점해진다.
“기다려 봐. 적은 아니니까.”
자운이 웃으며 말했지만, 무사는 등골이 축축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엄청난고수다.’
검이 뽑혀지는 것을 보기는커녕, 자신을 점혈하는 손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몸이 멈춰 있었고 자운의 좌수가 뻗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당황하는 무사를 뒤로 하고 자운이 검에 황금색 기운을 불어넣었다.
콰우우우-
하늘을 향해 쏘아지는 황룡검탄!
울부짖음이 하늘로 솟구치고, 황룡이 허공을 선회한 후에 사라졌다.
“우리는 황룡문에서 왔다. 독곡에 가서 전해. 이백 년 전 함께 전장을 거닐었던 전우의 문파가 독곡을 방문했노라고.”
황룡문이 독곡에 당도했다.
* * *
황룡문이 왔다는 말에 독곡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남만이 오지라 무림의 소식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황룡문의 이름이 사해에 떨치고 있어 그 소문이 이런 오지까지도 흘러 들어왔던 것이다.
독곡의 장로로 보이는 이가 자운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다, 당신이 난신이오?”
자운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어디 건물 하나라도 부숴줄까?”
난신이라는 별호에 자운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