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룡난신-138화 (138/175)

# 138

곧 호혈방주의 입이 무겁게 열린다.

모든 것을 체념한 목소리, 또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렇소. 그것이 모두 내 죄요. 인정하오.”

‘황검의 힘에 눌려서 별다른 수를 쓰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그것 역시 내 죄겠지.’

그는 정사지간의 인물이기는 했으나 엄밀히 보면 정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비록 황검에게 속아 그에게 부방주의 자리를 내어주고 실질적인 권력을 모두 빼앗겼다고는 하지만,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더러움 속에서도 의로움을 유지하고 있는 이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성정을 물려받은 딸인 진가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운이 곤경에 빠진 줄 알고 반성련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던가.

자운이 입맛을 다셨다.

좀 놀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인정을 해버리니 재미가 없지 않은가.

‘어찌 부녀가 똑같네. 똑같아.’

입맛을 다시고는 허리춤에서 황룡신검을 뽑아 든다. 검신이 금광을 띠며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럼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니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해도 되겠군.”

말을 하며 백정명을 바라본다. 백정명은 침통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으나 당장에 감히 앞으로 튀어나오지는 못했다.

‘어쭈, 지금 당장 튀어나와서 장인어른 될 사람을 살려달라 애걸복걸해야 장인의 마음을 얻을 텐데 그걸 안 하네. 아직 안 급한가 보지?’

아무래도 상황을 좀 더 극적으로 만들어줘야 튀어나올 모양인데, 어떻게 더 극적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가려가 뛰어나와 진노백의 앞에 선 것은 자운이 검을 든 채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안 돼요! 우리 아버지는 황검에게 속아서 이렇게 된 겁니다. 제발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그녀가 자운의 팔을 잡으며 말한다.

자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운의 눈가에는 장난스러움은 사라지고 스산함이 걸려 있었다.

그의 몸에서 쭈욱 하고 살기가 뻗어나온다.

자운이 그녀의 몸을 발로 찼다.

퍼억-

“아악!”

자운의 발길질에 맞은 그녀가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알아서 극적인 상황을 만들라고 도와주네.’

자운이 속으로 웃으며 여전히 겉으로는 살기를 띤 채로 그녀를 향해 일갈했다.

“사파의 딸 주제에 감히 내 검을 막아? 건방지게! 너 역시 곧 처단해 주겠다. 기다려라.”

자운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자운의 앞으로 무릎을 질질 끌고 다가왔다.

“제발, 저는 죽여도 좋으니 제발 저희 아버지만은 살려주세요. 저희 아버지는 황검에게 속아서 저렇게 된 것이에요. 사실 사파 같은 행동은 황검과 그의 수하들이 다 한 거지, 저희 아버지가 한 행동이 아닙니다. 흑흑.”

그녀가 눈물을 떨어뜨린다. 볼을 타고 진주알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I

‘자, 이쯤 되면 나서는 게 어때?’

자운이 백정명을 바라보았지만, 백정명은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나갈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

‘아직도 부족한 거냐.’

자운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좀 더 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어휴. 좀 빨리 튀어나오면 안 귀찮고 좋은데 말이지.’

자운이 검을 치켜들었다.

“사파 따위가 애걸복걸해 봐야 사파지. 네 아비가 먼저 죽는 게 마음에 둘지 않는다면 너부터 죽여주도록 하지.”

자운의 몸에서 강력한 살의가 일어났다.

파아아앗-

주변으로 살기가 퍼져나간다.

절대의 경지마저 아득히 초월한 고수가 뿜어내는 살기 다. 밀도 높은 살기에 공기가 물먹은 솜처럼 추욱 하고 늘어졌다.

그 살기에 몇몇 이들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자운의 살기가 검끝으로 집중된다.

그의 검이 단번에 가려의 몸을 두 쪽으로 잘라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기세를 휘감았다.

그리고 자운의 검이 움직였다.

단번에 베어버린다.

‘아. 죽는구나.’

가려의 눈이 백정명을 향했다. 그 순간, 백정명의 몸이 움직였다.

푸확-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자운이 백정명의 왼쪽 어깨에 살짝 파고든 검을 보며 눈을 떨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사실 자운도 백정명이 뛰어들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적당히 조절하여 칼을 휘둘렀다.

그 덕분에 백정명의 어깨에서 피가 많이 흐르기는 하였으나, 뼈나 근육에는 거의 무리가 가지 않는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가려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백정명이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가려의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녀는 본래 사파의 사람도 아니었고 호혈방주님 역시 사파의 문주가 아니었습니다.”

자운이 화가 난 척을 하며 기세를 풀었다.

묵직한 기세가 그의 몸을 압박한다.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자 어깨의 상처가 터지며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으옥.”

그가 신음을 흘린다.

“이들은 사파였다. 그것은 저기 있는 황검이라는 녀석이 증명해 주지. 그런데도 너는 이들이 사파가 아니라고 할 참 인가가?”

자운의 몸에서 황룡들이 풀어져 나왔다.

황룡무상십이강, 열한 마리의 황룡이 고고하게 머리를 치켜든다.

우우우우-

황룡의 울음소리가 높이 울려 퍼지고, 여기저기서 헛바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업! 난신!”

그들 역시 난신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다. 황룡문이 낳은 희대의 천재이자 괴물, 또한 현재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까운 존재.

황룡문이 사천 땅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는 하였으나 난신에 대한 소문은 삼봉공과의 전투 이후로 종적이 묘연한 상황이었다.

그 난신이 지금 호혈방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지금 자운이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백정명이었다.

열한 마리의 황룡이 주는 압박감을 결코 적지 않다. 백정명 정도의 실력으로 쉬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정명은 버터내었다.

“크윽.”

입가로 핏물이 줄줄줄 흘러나온다. 하지만 버터내어야 한다. 버터내지 못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인 가려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운은 버텨내는 백정명을 바라보며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고수일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설마 난신이셨을 줄이야. 하지만 나는 비킬 수 없소. 이들이 비록 황검에게 속아 악행을 방조했다고는 하나 그것 외에는 이들에게 죄는 없소.”

자운이 한참을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 말, 중명할 수 있겠지?”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내 단전을 걸고 맹세합니다. 또한, 내 목숨을 걸고 맹세 하건대 이들은 사파의 주구가 아닙니다. 또한, 적성의 주구 역시 아닙니다.”

무인에게 있어 목숨을 건다는 것도 작은 일이 아니었지만 단전을 거는 일 역시 작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심이 진짜라는 듯 검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를 향하게 하고 있었다.

지금 저 자세에서 찌른다면 단전이 산산이 부서지며 지금까지 모아두었던 내기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백정명은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간다.

아니, 어쩌면 진원진기가 손상되어 평범한 사람보다 못 한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에는 한 점 망설임이 없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와줬으면 일도 일찍 끝났을 것을.’

자운이 속으로 혀를 한차례 쯧 하고 찬 후에 주변을 배회하던 열한 마리의 황룡을 자신의 단전 속으로 불러들였다.

우우우-

열한 마리의 황룡이 용음과 함께 사라지고, 자운이 백정명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보고서나 그런 걸로 정리해서 가져와 확인해 보고 판단을 하도록 하겠어.”

자운의 말에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난신의 배려에 감사하오.”

* * *

일의 정리가 모두 끝나고 돌아서는 자운의 뒤로 운산과 우천이 따라붙었다.

“대사형, 일을 왜 그렇게 하신 겁니까?”

운산의 말에 자운이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

“너네 아직 눈치 못 챈 거냐?”

“뭘 말입니까?”

그의 말에 자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둔한 놈. 이래 가지고 제갈세가의 금지옥엽이랑은 어떻게 잘되고 있는 건지. 그 여자가 참 특이하다, 특이해.”

운산이 눈을 찡그리면서도 자운의 말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확실히 제갈 소저가 특이하기는 합니다. 그것보다 대사형이 나에게 둔하다고 하다니…….’

어쩐지 인정하기 싫은 말이었다. 그래서 자운이 설혜의 마음을 그렇게 모른다는 말인가.

주변 사람들 다 아는데 설혜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자운뿐이지 않던가.

‘취록 소저 역시 마찬가지지.’

생각해 보니 그 둘이 불쌍해졌다. 운산이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자운은 손을 뻗어 백정명과 자신의 치맛자락을 찢어 그의 어깨를 동여매고 있는 진가려를 손끝으로 지목했다.

“저 두 사람. 서로 좋아하는 사이야.”

그 말에 운산과 우천이 크게 소리친다.

“예?!”

“사실 나도 우연히 알게 된 건데 말이야, 저 두 사람 좋아하던 사이더라고. 처음에는 정파와 사파의 비극적인 사랑,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너네 시켜서 알아보니까 그런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자운의 말에 운산과 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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