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그리고는 먼 곳에서 여인과 백정명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것보다 사파 여인과 정파 사내의 사랑이라니. 이것 참 비극적이네.’
자운이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으쓱한 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렸다.
‘호혈방에 얽힌 사정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봐야겠군.’
돌아서는 자운의 뒤로 백정명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가려. 그대는 왜 사파인 것이오.”
자운이 욕지기를 뱉었다.
‘젠장. 독거노인한테 염장을 지르는구나.’
제5장 아, 몰라. 그냥 몇 대만 좀 맞아라.
반성련으로 돌아온 자운이 아무도 모르게 운산과 우천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서 호혈방에 대해서 좀 알아보도록 해.”
지금은 달빛이 내리쬐는 밤이다. 이 밤에 어딜 나가서 정보를 구해오라는 말인가.
더군다나 정보를 구해오라는 곳이 내일 공격하기로 되어있었던 호혈방이 아닌가.
내일이면 사라지게 될 문파에 대해서 정보를 조사해 오라니, 그들은 자운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호혈방은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자운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 호혈방에서도 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호혈방주와 그녀의 딸, 그리고 황검이라는 작자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조사를 해오면 되겠어.”
자운의 말에 우천이 밖을 내다보며 불평했다.
“지금 이 밤에 나가서 조사를 해오라는 말씀이십니까?”
자운이 우천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럼 이 나이 먹은 내가 나가서 조사하리? 후딱 안 나가?”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지금 도대체 어딜 가서 정보를 구합니까. 이 시간이면 문을 연 곳도 몇 곳 없을 텐데.”
자운이 손바닥으로 우천의 뒤통수를 때렸다.
빠악-
“케엑!”
“지금 그러는 시간에 정보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 당장 나가서 정보를 구해오도록 해.”
뒤통수를 매만지는 우천을 뒤로하고 자운이 운산을 노려보았다.
“왜? 너도 한 대 때려줘? 찰지게?”
운산이 손을 흔들어 자운의 말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좋은 결정이야. 빨리나갔다 오도록 해.”
두 시진이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이 지나자 밖에 나갔던 운산과 우천이 돌아왔다.
“그래. 알아보라고 한 건 뭐가 어때? 뭐 특별한 게 있어?”
자운의 말에 운산과 우천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둘의 표정이 밖으로 나가기 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이 무언가 확실하게 건져 온 정보가 있는 모양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운산 쪽이었다.
“호혈방은 원래 사파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자운의 미간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원래 사파가 아니었다니 그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자세하게 말해봐. 원래 사파가 아니었다니 명백하게 적성에 협력하고 있는 사파가 아니었어?”
“지금은 그렇지만 찾아보니 호혈방은 원래 사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이번에 자운의 물옴에 답한 것은 우천 쪽이었다.
“사파가 아니라 정사지간에 있던 문파였습니다. 대사형.”
원래 정사지간이었던 문파가 지금은 적성에 협력하는 악질 사파가 되었다?
무언가 있었다.
자운이 말을 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해보라는 듯 운산과 우천에게 눈짓을 주었다.
“원래 정사지간에 있는 문파이기는 하였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정파 쪽에 더 가까운 문파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호혈방이 이렇게 악독한 사파로 변하게 된 것은 황검 때문이었습니다.”
황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황검?”
“예. 호혈방주가 그의 무공실력을 보고 문파의 부방주로 삼았다고는 하는데, 그가 들어오면서 데리고 온 무사들이 사파의 무사들이었다고 합니다.”
“황검도 원래는 사파 놈이었겠군.”
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사파 놈들이 정사지간의 문파에 자리를 얻었으니 문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근묵자흑이라고 했다.
하얀 것이라고 하더라도 검은 것과 같이 놀다가는 검게 물들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점이 있었다.
호혈방주 역시 한 문파의 수장이다.
그런 문파의 수장이 문파가 변질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을까?
“황검이라고 하더라도 호혈방주를 쉽게 꺾을 수는 없었을 텐데?”
그 말에 우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호혈방주라고 해도 세월의 힘은 쉽게 이길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그가 패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호혈방주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늙은이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늙으면 아무래도 힘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호혈방주의 무공이 제법이기는 했으나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정도는 아니었으니 젊은 황검에게 밀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황검은 지금 호혈방주의 외동딸과의 혼인을 준비 중이라고 하더군요.”
자운이 되물었다.
“혼인? 혹시 호혈방주의 딸 이름이 가려는 아닌가?”
자운이 조사도 나가지 않았으면서 그 사실을 알고 있자 운산과 우천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보는 사람이지. 척하면 척이야.”
말을 하면서도 자운이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조금 전 밖에서 보고 온 일대로라면 호혈방주의 딸인 가려의 연인은 반성련의 수장이자 정검문의 문주인 백정명이어야 했다.
그런데 황검과의 혼인이 진행되고 있다니, 오래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쉽게 결론이 났다.
‘황검이라는 녀석이 정통성을 가지고 호혈방의 방주가 되기 위해 일을 꾸미고 있는 거였군.’
자운이 입맛을 다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해 보니 그리 처리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내일 호혈방으로 들어가서 황검이라는 녀석과 놈들의 수하를 최우선으로 처리한다.
그 후에 호혈방을 다시 정파에 가까운 정사지간의 문파로 돌려 버리면 될 일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괜히 머리 굴렸네. 경사겸사해서 기특한 정검문주 사랑도 좀 이루어주고 말이지.”
자운이 말을 마치며 속을 주물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이 쓰리지?”
자운의 말에 운산이 반문한다.
“예?”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제갈세가의 여식이랑 잘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
무림맹에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소문이었다. 괜히 심통이 났다.
“넌 몰라도 돼, 인마.”
빠악-
“케엑! 대사형, 갑자기 왜…….”
빠악-
“아, 몰라. 그냥 몇 대만 좀 맞아라.”
운산은 그날 뒤통수를 열 대쯤 맞았다.
* * *
아침이 밝자 자운이 호혈방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사실 준비라고 해봐야 별것 없었다.
황룡문도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허리춤에 검을 차는 것, 그것이 모든 준비의 끝이었다.
준비를 모두 마친 자운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백정명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제 한번 가볼까? 호혈방을 무너뜨리러?”
자운의 말에 백정명의 표정이 잠시 딱딱하게 굳었지만,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도록 하지요.”
반성련의 위장용 장원이 있는 곳이 반지화의 북쪽 관도 변이었다면 호혈방의 정문이 있는 곳은 남쪽의 관도 변이었다.
정확하게 반대되는 곳에 위치한 호혈방과 반성련, 어찌 보면 그 구도는 지금의 대립구도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위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갑작스럽게 한 무리의 무사가 정면으로 다가오자 호혈방 내부의 움직임이 부산스럽게 변했다.
보고를 받은 황검이 쾅 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뭐야? 반성련 놈들이 당당하게 정문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급하게 보고를 하러 온 수하가 숨을 헐떡이며 황검을 향해 보고를 마저 마쳤다.
“그, 그렇습니다. 헉헉. 비상사태를 발동하기는 했는데, 반성련 녀석들 말고 다른 놈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 말에 황검의 눈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다른 놈들이라니?”
수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워낙 급하게 파악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정보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후웁. 후웁.”
수하의 말에 황검이 무능하다는 눈으로 자신의 수하를 내려다본다.
“쯧. 반성련 놈들. 대세를 따르지 못하고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해대더니 어디서 낭인이라도 고용을 한 모양이군.”
녀석들이 고용한 것이 낭인이라면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낭인은 기본적으로 약하다. 절정 이상의 실력을 가진 낭인은 매우 드물며 고용하기도 쉽지 않다.
지금 반성련의 상황으로는 그 정도 되는 실력을 갖춘 낭인을 몇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적성이 득세한 곳에서 놈들을 도와주려는 낭인이 많을 리가 없었다. I
대부분 어중이떠중이, 그렇기에 황검은 자신이 있었다.
“으흐흐흐흐. 놈을 처리하고 내가 이 반지화의 주인이 되는 거야.”
그가 스산하게 웃으며 애검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반성련의 옆에 있는 이들을 고작 낭인이라고 무시한 것이 얼마나 큰 실책이었는지를 말이다.
운산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단번에 호혈방의 정문이 두 쪽으로 잘려 나간다.
그 문을 발끝으로 차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날아갔다.
“으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