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의문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은 곳에서 거하게 사지. 그리고 취록.”
자운이 설해와의 대화를 마친 후에 취록을 바라보았다.
“사실 너도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부른 거야.”
“해줬으면 하는 일이요?”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그 비선망, 아직 운용이 되지?”
취록이 고개를 끄덕인다. 비록 하오문의 루주 자리에서는 내려왔지만 충분히 독자적인 비선망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운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 너 그걸로 무상부의 정보를 관리해 줬으면 하는데?”
“무상부의 정보 말인가요?”
자운이 빙긋하고 웃었다.
“어, 왜? 설마 너도 뭐 원하는 거 있어? 너도 얘처럼 술 한 잔 사주면 되는 거야?”
취록이 눈 가득 열기를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주세요. 저도 술 사주세요!”
두 여인의 기이한 열망이 가득 담긴 눈길이 자운을 향해 쏟아지고, 그 때문인지 방 전체가 괴상한 열기로 가득 차올랐다.
‘얘도 농담을 기밀문서로 받아먹네?’
자운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이번에도 역시 승낙을 했다.
“좋아. 사줄…….”
그 순간!
문이 벌컥 하고 열리며 우천과 제갈수가 들어왔다.
기이한 열기로 가득 차오른 방, 한껏 꾸미고 있는 취록, 그에 만만치 않게 꾸미고 있는 설혜.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우천과 제갈수가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서로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어, 하던 일 계속하세요. 죄송합니다. 대사형.”
제갈수 역시 한 마디를 남기고 문을 닫았다.
“절륜하시네요.”
자운이 재들이 왜 저러냐 하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다가 취록과 설혜의 눈에 담긴 기이한 열기를 읽어내었다.
그리고는 그들이 하고 나간 말을 다시 생각했다.
“아니야! 이 미친놈들아!”
자운의 목소리가 귀빈각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제9장 주안술 덕분이… 케엑!!
무상부가 만들어지는 것은 황룡문의 제자들이 모두 무림맹으로 모이면 하기로 했다.
그들을 이용해 무상부를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운은 그때까지 무직, 일 없이 놀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하루종일 귀빈각에만 들어 있는 것이 답답했던 자운이 귀빈각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가 무림맹을 한 차례씩 돌아보기 시작한다.
자운의 신분으로 무림맹에서 가지 못할 곳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아직 정식으로 무상부가 개설된 것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는 이미 무림맹의 무상으로 내정된 존재다.
발걸음 닿는 곳은 모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구경할 수 있었다.
“거참 건물 한번 크게 지었네.”
자운이 구석에 있는 건물을 보며 감탄했다.
경공을 이용한다면 한 번에 무림맹 전체를 돌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운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천천히 시간 죽이는 데 무림맹을 산보하는 것만 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산보를 반복하던 자운의 코에 짜릿한 감각이 잡혔다.
“킁킁.”
자운이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시큰하면서도 알딸딸한 것이 술 냄새가 분명하다.
“어디서 술 냄새가 나는 거지?”
자운이 입맛을 다시며 씨익 하고 웃었다.
지금 자운이 산보하고 있는 곳은 무림맹 내부에서도 굉장히 외진 곳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는데 누군가가 술판이라도 벌리는 모양이었다.
자운이 코를 킁킁거리며 술 냄새를 찾았다.
곧 자운이 눈을 크게 치켜뜨며 소리를 질었다.
“심봤다!”
누군가가 술판을 벌이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술을 몇 단지 꺼내놓은 것이다.
자운이 입맛을 다셨다.
“어디 맛 좀 볼까?”
꽤나 고급스러운 술이 분명했다. 향부터 범상치 않은데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매끄럽기 그지없다.
뜨거운 느낌이 화끈하게 올라오고, 술기운이 단번에 머리로 솟구쳤다.
싸구려 술은 이런 감각을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
자운이 내력을 이용해 머리로 솟구치는 술기운을 밀어내고는 다시 술독을 바라보았다.
“많으니까 한 잔만 더 해도 되겠지?”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었다.
그리고 세잔은 결국 한 독이 되고 말았다.
자운의 옆으로 비어버린 술독이 굴렀다.
자운이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렸다. 맛만 본다는 것이 술맛이 너무 좋아서 한 독을 다 마셔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일을 벌였으니 당연히 걱정이 되었다.
“너무 많이 마셨나?”
술독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술독이 많기는 했지만, 자운이 마신 것이 무려 한 독이었으니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자운이 걱정 담긴 푸념을 뱉었다.
“너무 배가 물러서 저녁을 못 먹겠네.”
운산과 우천이 들었으면 당장에 머리를 짚었을 것이다.
걱정해야 하는 주제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확실히 자운의 머리는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머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미쳐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자운이 배틀 두드리는 동안, 강력한 주전(酒箭)이 자운을 향해 쏘아졌다.
“이 술 도둑놈아!!”
“응?”
자운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주전에 담긴 힘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자운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곧 이어 자운이 서 있던 자리에 떨어져 내린 것은 큰 소 한 마리였다.
새하얗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털을 가지고 있는 소, 그 위에는 곰방대를 물고 한 손으로는 거대한 술독을 들고 있는 여인이 타고 있었다.
나이는 사십대 정도, 주전은 그녀의 입에서 뿜어진 것이 분명했다.
여인은 자운처럼 술에 적당히 취한 듯 얼굴이 붉게 변해 있었다.
“이놈이 감히 내 술을 훔쳐 먹다니!”
자운이 소리쳤다.
“물론 내가 술을 훔쳐 먹기는 했다만, 술을 훔쳐 먹은 게 그렇게 죄냐!”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당당하기 그지없다.
그 당당함에 죄를 치도곤 하던 여인이 말을 멈추었을 정도다.
하지만 곧 여인이 화를 내며 곰방대를 휘둘렀다,
“이거 미친놈이구나!”
곰방대에서 연초향이 화악 하고 밀려온다. 자운이 곰방대의 일격을 훌쩍 뛰어 피했다.
“젊어 보이는 녀석이 한 수 재간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가자, 누렁아!”
음머-
자운이 소리쳤다.
“그거 흰 소야!”
“닥쳐! 가자, 누렁아!”
흰 소, 누렁이가 발을 움직였다. 단번에 자운을 향해서 쏘아진다.
“헐!”
자운이 연달아 퇴법을 밟았다.
누렁이라 불리는 소의 속도가 어지간한 고수들 못지않았던 탓이다.
아무래도 영물쯤 되는 모양이었다.
“이놈 어딜 도망가는 거냐!”
여인이 소리쳤다.
사실 여인은 주선이었다. 당금 무림을 대표하는 절대고수 중의 한 명으로서 술을 마시는 것을 낙으로 알고 술을 이용해 무공을 펼치는 기괴한 절대고수.
거기다 충격적인 것은 주선이 여인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주선(酒仙)이라고 한다면 남자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술을 좋아하고 평소에도 물 대신 술을 마신 그녀가 결국 주선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갔다.
전국의 많은 술꾼들이 그녀가 주선의 별호를 가져간 것에 대해서 한탄하고 불만을 토했고, 주선은 친히 그들을 모조리 찾아가 술로서 꺾었다고 한다.
그 일화만 놓고 보아도 주선의 주량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량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바로 무공이다.
술을 이용해 펼지는 기괴한 무공은 여타의 고수들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았고 그녀를 절대고수의 반열에까지 올린 것이다.
“도망가지 말고 거기 서라!”
소가 허공답보까지 썼다. 자운으로서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저런 거 하나 잡아서 타고 다닐까? 뺐을까?’
그런 욕심까지 생겼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저 소보다 그 위에서 주전을 날리는 여인이었다.
‘제압부터 해야겠지.’
스르릉-
자운의 허리춤에서 황룡신검이 뽑혀 나왔다.
“내가 바로 네 술독 한 항아리를 훔쳐 먹었다아!”
당당하게 소리치는 자운의 신형이 단번에 주선을 향해서 튀어나간다.
퍼버버벙-
발에 닿는 공기가 족족 터져나갔다.
“이놈! 자랑이냐!!”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휘둘렀다.
“내 배에 술이 한 독이나 들어가는데 그게 자랑이지 아니겠냐?”
쾅-
주전과자운의 검이 폭발했다.
허공중에 날아든 주전이 연달아 자운의 검으로 딸려 들어간다.
회오리 같은 검기가 자운의 검에서 뿜어졌다.
파바바바바밧-
주전이 모조리 허공중에서 싹둑 하고 잘려 나갔다.
“이놈이, 술을 마셨으면 잘 마셨다고 해야 할 거 아니냐!”
주선이 이번에는 바가지 통째로 술을 날렸다.
주전이라기보다는 술로써 펼쳐 내는 검기에 가까웠다.
반달 형태의 날카로운 술이 그대로 자운을 향해서 날아들었다.
이런 무공은 들온 적도 본 적도 없었던 자운이 감탄을 토했다.
“신기하구나! 근데 잘 먹었다고 하면 용서해 줄 거냐!”
자운의 검에서도 반달형의 검기가 마주 솟구쳤다.
쾅쾅-
술과 검기가 충돌했다면 백에 구십구는 검기의 승리를 예상할 것이 분명했다.
나머지 하나는 미쳤거나 주선이 싸우는 것을 봤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놀랍게도 검기와 술이 허공에서 동시에 사라졌다.
주선의 내력이 담겨 있는 술이었던 만큼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자운의 말에 주선이 즉각 대답했다.
“미쳤냐, 용서해 주게! 이리 와! 좀 맞으면 용서해 주마!”
자운의 나이 올해로 이백서른이 넘었다. 그런데 누가 누굴 때린다고?
나이로 놓고 보자면 자운이 절대로 그녀에게 혼날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
자운이 버럭 하고 소리쳤다.
“미쳤냐! 내가 그리로 가게!”
자운이 검을 움직인다.
쏘아내는 것은 황통검탄!
우우우-
콰우우우-
두 마리에 이르는 황룡이 동시에 주선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