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목욕을 한 후에는 조금 피곤하고 나른한 몸을 추슬러 무림 맹주를 만나러 가야 할 것이다.
현 무림맹의 맹주이자 검성(劍星) 남궁인이 그에게 독대를 청한 것이다.
귀찮기는 했지만 만나봐야 할 터였다.
또한 자운 역시 궁금하기는 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연합했다고는 하나 둘 사이에 어느 정도의 다툼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구파일방이 쉬이 무림맹주의 자리를 포기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오대세가의 사람이 맹주가 되었다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곧 비월이 뜨거운 물을 대나무로 만든 욕조에 잔뜩 받아 준비를 했다.
자운이 하얀 옷 하나만을 걸친 채로 그 속에 몸을 푸욱 담갔다.
“시중을 들어드릴까요?”
그녀가 자운의 의중을 물어온다. 귀빈관의 시녀답게, 목욕 시중에 관한 훈련도 충분히 되어 있는 이가 바로 비월이다.
‘전시인데 쓸데없이 그런 건 꼼꼼하네.’
자운이 혀를 끌끌 하고 찼다. 그리고는 가볍게 물을 손가락으로 튕기듯 장난을 치며 말한다.
참방-
“됐으니까 술이나 가지고 와. 여기서 한잔 마시게.”
따뜻한 곳에서 마시면 취기가 잘 오른다. 혀가 꼬일 때까지 마실 생각은 없으니 적당히 즐길 만은 할 것이다.
물의 온기가 피부로 느껴지니 기분이 좋다.
“예. 알겠습니다.”
문이 스르륵 닫히는 소리가 나며 그녀가 나갔다.
아마도 곧 술을 준비해 올 것이다.
비월이 돌아올 때까지, 자운은 나른한 기분을 즐겼다.
목욕을 하며 동시에 술 한잔 걸치는 것까지 마무리한 자운은 옷을 갈아입고 맹주의 집무실이라 할 수 있는 창천궁으로 향했다. I
맹 내부의 지리에 대해서는 자운이 아는 것이 전무했기 때문에 안내로 비월이 앞장섰다.
자운이 앞장서 가는 비월의 뒷머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맹주는 어떤 사람이지?”
그 말에 그녀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한다.
“저 같은 것이 어떻게 맹주님을 만나 뵈어 봤겠습니까. 단지 다른 분들이 좋은 분이다 하시니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주변의 소문이나 그런 거 뭐가 어떻지?”
그 말에 비월이 자운을 잠시간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은 특이했던 것이다.
자운 스스로가 정파에서 내로라 하는 위치에 올라 있는 절대의 고수이다. 그런 절대의 반열에 든 고수가 다른 고수의 이야기를 전혀 알지 못한다?
자운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비월로서는 그것이 이상하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이나마 짧게 드러났던 표정이지만 비월의 표정을 자운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 표정을 읽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자운.
“아아. 내가 사실 무림의 소문이나 그런 거 좀 관심 없는 삶을 살던 녀석이라서 말이야.”
잠만 자던 삶을 살던 사람이다.
자운의 말에 비월은 잠시간 납득이 어렵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그의 물옴에 답을 한다.
“한번 내뱉은 말에는 꼭 책임을 지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소의 성격은 점잖으시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분이라는 소문도 들었고요. 사람을 잘 대하시는 분이라 무림의 이름만 들으면 알 명사들이 그분과 친우가 되기를 거절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전형적인 호인이로군.”
소문이 그렇게까지 났다면 나쁜 양반은 아닐 것이다. 물론 뒤로 호박씨를 까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런 이들의 소문에는 좋은 이야기와 함께 미심쩍은 추문이 함께 따라붙기 마련이다.
비월이 추문을 함께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그리 나쁜 이는 아닐 것이다.
‘일단 만나봐야 알 수 있겠지.’
높게 솟은 기둥과 기둥이 떠받들고 있는 지붕, 전체적으로 푸른색으로 어우러지게끔 만들어서 창천궁이라는 이름이 꽤 잘 어울렸다.
멋들어지게 쓰여진 창천궁이라는 현판을 읽은 자운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선 비월을 눈으로 흘깃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들어설 수 없습니다. 창천궁의 제일 높은 곳에 맹주님이 계시니 올라가시면 됩니다.”
“아아. 그래. 안내해 주느라 고마웠어.”
자운이 손바닥을 가볍게 흔들며 창천궁 내부로 들어갔다.
들어서는 순간 수십 개의 눈이 자운을 주시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아마도 무림맹주를 비밀리에 호위하는 이들일 것이다.
“꽤 수준들이 높군.”
자운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운 정도 되는 고수이니 이들의 기척을 모두 잡아내었지, 어지간한 이들은 기척을 감지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운산과 우천 정도의 실력이라 해도 방 안에 누가 있다는 것 정도만 간신히 눈치챌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무공이 운산과 우천에 비해서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익힌 것은 암행(暗行)과 잠행술(潛行術), 그것에 한 하여서는 굉장히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기척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물론 무공이 모자란 것은 아니겠지만.’
자운이 왼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가장 고수다.
아마도 이들의 수장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운이 그쪽을 향해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수하들 데리고 수고가 많네. 놀지도 못하고 말이지.”
가볍게 한마디를 남기고 이 층으로 올라가는 자운. 일 층에 비해서 이 층은 사람의 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질은 훨씬 높아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운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어?”
자운이 먼저 알은체를 하고, 상대방 쪽에서도 자운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인다.
“오랜만이군요. 천 대협.”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애들이 비무한 이후로 얼마만인지. 좀 되었네요.”
신기수사(神機秀士) 제갈운.
그가 바로 창천궁의 이 층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갈 대협이 여기는 웬일입… 아, 알겠군요.”
자운은 물으려다 말고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질문을 했는지 이해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가는 대대로 머리가 좋기로 유명하다.
하여 무림맹이 창설될 경우 맹주 직은 맡지 못하더라도 군사 직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머리가 뛰어나다는 제갈세가 중에서도 신기수사라는 이름이 붙은 제갈운, 그가 무림 맹의 군사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제갈운이 손가락으로 바로 옆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여기가 군사부라서 말입니다. 천 대협은 왜 이곳에……?”
자운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맹주께서 독대를 청하시더군요.”
“그렇군요. 그럼 올라가 보셔야…….”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른 이야기 하실 것이 있으면 나중에 하지요.”
“제가 한번 청하겠습니다.”
제갈운과의 인사까지 간략하게 마친 그가 마지막 꼭대기 층, 삼 층으로 향했다.
창천궁은 삼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일 층은 창천궁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감시하기 위한 장소였기에 많은 이들이 기척을 숨긴 채로 숨어 있다.
이 충은 무림맹의 대소사에 모두 관여하는 군사부이자 동시에 문상부가 있는 곳이었다.
자운이 마지막 층에 발을 디뎠다.
이곳이 무림맹주가 있는 곳, 맹주전이다.
자운이 맹주전의 문 앞에 서자 그의 기척을 읽어낸 남궁인이 말한다.
“오셨습니까. 오셨으면 들어오시지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자운이 문을 열었고, 그 속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전형적인 호인의 상이었다.
보는 사람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도록 은은한 미소를 걸고 있는 것까지, 들은 대로 나쁜 이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그의 말에 자운이 남궁인의 맞은편에 앉는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룡문의 태상호법 천자운이라 합니다.”
자운이 인사를 하자 그 역시 자운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이며 인사를 한다.
“부족하나마 무림맹주의 자리에 있는 남궁인이라고 합니다.”
자운이 기세를 일으켜 남궁인을 살피고, 남궁인 역시 기세를 일으켜 자운을 살핀다.
자운으로서 남궁인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를 읽는 것은 어려웠지만 어느 정도를 읽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단번에 그의 실력에 대해서 판단을 내린다.
‘괴걸왕, 그놈보다 아주 조금 뛰어나기는 하군.’
반대로 자운에게서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던 남궁인은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다.
‘허허허허허.’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린다.
무림의 절대자이자 검성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강력한 무인이 바로 그다.
그런 그가 자운에게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괜히 호승심이 타올랐다.
‘아, 귀찮게.’
그 호승심을 읽어낸 자운이 손을 들었다.
휘리릭- 탁!
두 사람 사이에 맴돌던 기운이 단번에 정지한다. 자운의 기운은 그대로 단전 속으로 갈무리되었다.
모든 기운이 사라지자 남궁인의 눈가에는 자연 의문이 깃들었고 동시에 호승심이 사라졌다.
“서로 살피는 건 이제 이쯤 하도록 하지요. 먼저 이곳에 부른 용건부터 듣고 싶은데 말입니다.”
단번에 자신의 기운을 쳐내고 호승심을 꺾어버린 자운을 향해 남궁인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허허허허. 그렇군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니, 성격이 조금 급하신 모양입니다.”
말을 하며 자운의 앞에 차를 내놓는다.
향이 나쁘지 않은 것이 색 역시 곱다.
“벽라춘(碧螺春)?”
자운의 물옴에 그가 고개를 흔든다. 향이 비슷하여 벽라춘 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일단 들어보지요.”
그의 말에 자운이 후르릅 하고 차를 마셨다. 뜨거운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차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도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무슨 차인지 알 수 없다.
“모르겠군요.”
“그러실 겁니다. 제 고향에서 나는 차입니다. 태평후괴(太平?魁)라고 하지요.”
태평후괴, 녹차 잎을 이용해 만드는 차의 일종으로서 황산모붕(?山毛峰)과 함께 굉장히 유명한 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