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맞상대 할 수 있는 이는 아마도 삼봉공 혹은 일성이 전부일 것이다.
“자자. 이제 그만 끝을 내야지.”
자운이 염룡을 움직였다.
염룡의 움직임에 따라 화끈한 바람이 와 닿는다.
과연 열양지력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염룡!
“이대로 죽지는 않는다. 흐흐흐흐.”
일적이 입가로 피를 흘리면서도 야망갑을 더욱 두텁게 둘렀다. 공격을 도외시하고 방어만을 위하여 야망갑의 두께를 늘린다.
이번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낸 후에 그다음 이어지는 짧은 틈을 노려 자운에게 한 방 먹일 생각이었다.
치명상은 되지 않더라도, 후에 일성이나 삼봉공이 싸울 때 조금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와라!”
일적의 말에 자운이 소리쳤다.
“오냐!”
염룡이 불을 내뿜는다.
화아아아아-
폭발하는 화산보다 뜨거운 불길이 그대로 일적을 향해 쏟아졌다.
아무리 야망갑을 두텁게 입었다고는 해도 놈의 불길은 너무도 강했다.
살이 짓뭉개지고 진물이 흘렀다. 화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야망갑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으으으으으윽!”
눈알이 뒤집어질 정도의 고통이 느껴지지만 일적은 감내했다.
참아내었다.
그가 그렇게 고통을 견디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염룡이 뿜어내는 불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기한 점은 그렇게 강력한 불꽃을 다루는데도 주변의 초목은 하나도 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였다.
본래 황통무상십이강이 발휘되는 것은, 무로 이룰 수 있는 그 분야에서 정점에 달했을 때다.
패룡 역시 그랬고 호룡이나 환룡이라고 해도 다를 것은 없었다.
말 그대로, 염룡은 불을 다루는 열양지공에 있어 정점에 올랐을 때 발휘되는 것이었다.
정점에 오른 자운은 자신이 태우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자연스럽게 조절할 수 있었다.
화마가 바닥을 휩쓸고는 있지만 풀 하나 타지 않는다.
오로지 뜨거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일적이 전부였다.
“크으으으윽!”
일적이 신음을 흘렸다.
이제야 끝나간다.
끝이 나면, 한순간의 틈을 노려 공격을 할 생각이었다.
이미 야망갑은 거의 모두 녹아내려 너덜너덜한 상황이었고, 살점 역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내렸다.
진물이 온몸에서 흘러내려 고약한 냄새도 났다.
자운이 불 속에서 견디고 있는 일적을 흘깃 하고 바라보았다.
“이제 죽었나?”
사실 지금 일적의 상태는 살아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야망갑은 완전히 녹아 버렸고 살점은 불에 타서 사라지고 있다.
뼈가 보일 정도로 몸이 타고 있는데도 버티고 있는 것은 일적의 거대한 내력 때문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운이 뿌려대는 염룡의 불이 끝나는 순간 일적의 몸이 움직였다.
죽음을 참아내고 거부하며 견뎌온 틈이다.
단번에 일적의 주먹이 자운의 가슴에 닿았다.
“어라?”
하지만 그뿐이었다.
스스로는 공격에 성공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일적의 내력은 이미 다한 상태였다. 근육조차 모두 녹아내려 충분한 근력이 바탕이 되지 못했다.
그런 공격이 자운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가슴에 닿았을 뿐, 낙엽이라도 내려앉은 느낌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자운이 검결지를 이용해 일적의 목을 쳤다.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좀 한 방에 죽어버 리지.”
불길에 모두 말라 버린 것인지 피도 흐르지 않는 그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자운이 손을 털었다.
“청소 끝.”
자운의 압도적인 힘을 바라본 운산과 우천이 한마디씩 했다.
“그야말로 난신이군요.”
“사제는 그렇게 생각해?”
“사형은 아닌가요?”
우천의 말에 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신이라고 보기에는 그렇다.
여섯 마리의 황룡을 부리다니, 이 모습은 난신이 아니라 그야말로 용제(龍帝)이지 않던가!
표현을 하려면 그쯤은 되어야 할 것이다.
“용제? 용왕? 용황? 무어라 표현을 해야 하지?”
그들의 대화에 괴걸왕이 끼어들었다.
“뭘 그리 고민하나. 자네들의 사형은 틀림없는 난신이야.”
그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염룡이 태워 버린 초목은 없으나 다른 다섯 마리의 용이 뭉개 버린 초목들은 널려 있었다.
주변이 그야말로 난장판, 어지럽기 그지없다.
한 번의 전투로 이런 모습을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난신이라는 이름 말고 또 뭐가 어울린다는 말인가!
운산과 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부정할 수 없을 듯했다.
“그렇군요.”
"홀홀홀. 그렇지. 황룡(黃龍)의 난신(亂神)이라니, 뭔가 좀 어울리지 않는 듯하군.”
황룡은 사방신을 통솔하는, 중앙에 위치한 가장 고귀한 신수이다.
반대로 난신(亂神)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주변을 어지럽게 하는 귀신을 이른다.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두 개의 단어가 하나가 되었다.
황룡(黃龍)의 난신(亂神).
조금 이상한 이름이기는 했으나, 자운을 표현하기에 그보다 더 알맞은 무림명은 없을 듯했다.
취록까지 괴걸왕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황룡난신(黃龍亂神)이군요.”
괴걸왕과 운산 그리고 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자운이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난신은 빼!”
제6장 역시 정산인은 아니야.
자운과 합류한 이들이 대놓고 적성의 구역을 활보했다.
조합이 워낙 특이한 일행이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기는 했으나 무서울 것은 없었다.
그들의 바로 옆에는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까운 존재인 자운이 있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절대의 경지에 오른 고수인 괴걸왕까지 있었으니 거칠 것이 없을 만도 했다.
무림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자운이 괴걸왕을 향해 물었다.
“그럼 무림맹주는 누가 된 거지?”
자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자운은 아직도 이 시대의 절대고수들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니 막연히 추측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해 보았다.
“독왕인가? 아, 그리고 검도자는 좀 괜찮으시려나?”
괴걸왕이 독왕이라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검도자라는 부분에서는 한숨을 푸욱 하고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는 겁니까?”
자운의 물옴에 답을 한 것은 취록이었다.
“무림맹주에 오른 것은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 검성 남궁인 대협이세요.”
자운이 볼을 긁적거렸다,
이번에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 검성이라는 이름을 보니 칼질 좀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칼질 좀 하나 보군.”
자운의 말에 운산과 우천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가 매화검선의 죽음을 처음 들었을 때 한 말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분명 자운은 칼질 좀 하는 늙은이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때 들어서 기겁할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지금 자운의 성격을 생각하자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자운의 성격을 아는 취록과 괴걸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경악한 쪽은 다른 구조대원들이었다. 자운의 성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니 경악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그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자운과 취록이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럼 검도자 부분에서 한숨을 쉰 이유는?”
역시 취록이 설명해 준다.
“검도자께서는 적성과의 대결 후에 얻은 병을 아직 다 치료하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무공에 비해 정신은…….”
자운이 한마디 던졌다.
“결국 아직 벽에 똥칠 하는 병은 고쳐지지 않은 것이군.”
주변 사람들이 경악을 하든 말든 자운은 하고 싶은 말은 하자는 주의였다.
* * *
본래 무림맹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무림맹이라는 것이 정파의 주요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조직일 뿐만이 아니라 지금 상황이 흉흉하기 그지없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운 일행이 누구던가.
함께 있는 이는 바로 정파무림을 대표한다는 고수 중 한 사람인 괴걸왕이었다.
별다른 절차도 없이 무림맹의 정문을 통과한 자운은 귀빈실로 배정을 받았다.
명색이 절대의 고수, 평범한 방을 배정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전속 시녀 역시 따라 붙었다.
비월이라는 이름의, 이제 갓 스물이 된 여인이었다.
자운이 방에 설치된 종을 이용해 가볍게 비월을 불렀다.
침상의 위에는 끈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끈을 잡아당기면 다른 곳에 있는 종이 울리며 시녀에게로 연락이 가게 되는 간단한 장치였다.
그가 줄을 잡아당겼다.
딸랑딸랑 하는 소리가 울리고 곧 비월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비월은 지금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긴장한 상황이었다.
얼마 전, 무림맹에 난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연히 귀빈들이 머무는 곳에 숙소가 배정될 것이었고 귀빈관의 시녀 중 한 사람이 그를 담당하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영광은 비월에게 찾아왔다.
눈앞에 있는 이는 무림의 젊은 신성이자 동시에 구성인 것이다.
물론 전혀 젊지 않았지만 소문은 그렇게 났다.
“부르셨습니까. 대, 대협.”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그녀를 보고 자운이 피식 웃었다.
“떨지 말고, 오랫동안 목욕을 못해서 그런데 물 좀 받아줘.”
사실 몸에 묻은 먼지나 노폐물 따위는 내기를 세밀하게 조절해서 모두 날려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과 목욕을 해서 땀을 씻어내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이백 년간 목욕을 한 번도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자운 개인적으로도 목욕을 굉장히 좋아하기도 했다.
경지에 올라 뜨거움과 차가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하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다.
감각을 더욱 세밀하게 하고 몸을 보호하는 기운을 일정량 갈무리해 버리면 따뜻한 물의 온도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교육이 잘 된 시녀 비월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곧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