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우천이 강기지경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운산에게 부족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실망스럽구만. 그래, 바쁘신 일적이 이곳에는 웬일이지?”
괴걸왕의 말은 말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는 듯했으나 목소리와 말투에는 날이 단단히 서 있었다.
자세 또한 좌수를 앞으로 비스듬하게 살짝 뻗어놓고 있는 것이 단번에 회선장법(廻旋掌法)을 발출한 것처럼 보였다.
또한 그의 신물이라 할 수 있는 용두괴장은 둥에 비스듬하게 기대져 있었는데 그 자세가 창수의 자세와 같아 순식간에 괴장을 뻗어낼 수 있었다.
그 역시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일적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둠이 스멀스멀 그의 몸을 휘감는다.
그것은 마치 갑옷과 같았다.
마기라는 어둠을 갑옷처럼 휘감는 일적의 독문무공, 밤마저 잊혀 버릴 정도의 어둠을 다스리는 야망갑(夜望甲)이 모습 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야망갑은 달리 병왕(兵王)이라고도 불리는데 어둠을 이용해 모든 무기를 형상화하고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괴걸왕 역시 과거 적성의 정보에서 야망갑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적이 있었다.
그가 침을 꿀꺽하고 삼킨다.
“내가 이곳에는 왜 왔겠는가. 나의 주인 되시는 분께서 자네들의 목을 원하니 그렇지.”
그가 괴걸왕의 뒤에 있는 운산과 우천을 슬쩍하고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인심을 쓴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네. 그들을 넘기게. 그럼 자네들은 자비를 베풀어 살려주도록 하지.”
딴에는 자비였으나 괴걸왕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개소리. 홀홀홀.”
그의 몸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무릎을 굽힌 것이다.
굽힌 무릎이 펴지는 순간, 괴걸왕의 몸이 앞으로 쭈욱 하고 튀어나갔다.
콰앙-
공간을 짓이겨 버릴 정도로 빠른 돌진, 어떠한 보법도 신법도 사용되지 않은 순수한 육탄돌진이었다.
“이런이런. 어쩔 수 없구만. 결국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선택하는 것인가.”
일적의 몸이 흔들리나 싶더니 단번에 검은 갑옷이 걸쳐진다.
콰앙!
그가 뻗어낸 손과 괴걸왕의 손이 충돌했다.
회선장법의 선풍팔수!
부드러운 바람이 여덟 갈래로 갈라져 손처럼 일적을 움켜쥐려 했다.
일적이 피식하고 웃으며 몸에 휘감고 있는 마기를 겉으로 폭발시켰다.
“어딜 감히!”
콰앙- 퍼어어엉-
마기와 선풍팔수의 기운이 충돌하며 두 개의 기운이 모두 너덜너덜해져 허공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둘은 이미 다음 격돌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한 번의 공격과 방어로는 상대방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둘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공격이 끊어지지 않는다.
야망갑의 구천마군이 펼쳐졌다.
하늘을 아홉 방위로 나누어 이르기를 구천(九天), 달리 구중천이라 한다.
그 구중천을 모두 부숴버릴 마의 군단이 바로 구천마군!
구천마군의 수법이 펼쳐지자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야망갑이 수천 조각으로 나누어 졌다.
수천 조각의 마기가 군세라도 된 것처럼 충실하게 지휘관의 명을 따라 괴걸왕을 공격한다.
파라라라락-
일 수에 수천 번 이상의 공격을 가하는 수법, 그 공격에 휘말린 괴걸왕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은 당연했다.
운산이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르신!”
“홀홀홀. 재미있는 수법이로고.”
그런 그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괴걸왕이 그 속에서 멀쩡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구천마군이라 할지라도 그의 몸을 쉬이 상하게는 할 수 없다.
취팔선보(醉八仙步)와 연쌍비(燕雙飛)의 조합은 그 모든 공격을 피해내게 만들었고 옥현쇄심장(玉現心掌)과 연화지(蓮花指)는 구천마군을 모두 때려 떨어뜨렸다.
힘을 잃은 구천마군이 모조리 주인에게로 돌아가 원래의 모습을 이룬다.
조각났던 야망갑이 다시 모습을 찾았다.
“과연. 이 정도로는 안 되는군.”
멀쩡한 괴걸왕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괴걸왕은 정파에 속해 있는 절대고수 중에서도 수위에 속 하는 자다.
그와는 능히 일천 초 이상을 겨를 것이라 생각했다.
선풍신법(旋風身法)의 기운이 일적을 휘감았다.
괴걸왕의 발끝에서 만들어진 바람이 일적의 기운을 단단히 옭아맨다.
이어지는 것은 용두괴장을 이용한 타구봉법!
개를 잡는 데는 그만한 봉법이 없다!
“나를 개 취급 할 생각인가?”
“홀홀홀. 개새끼 취급을 할 생각이네.”
촤라라락-
야망갑의 기운이 단번에 풀어지며 타구봉올 막아내었다.
또한 선풍신법의 바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그 폭풍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파아아아-
괴걸왕의 손이 갈고리처럼 변했다.
용음십이수(龍吟十二手).
황룡문의 조법과 같이 용자가 들어가는 조법이었다.
바람 뚫어지는 파공음이 울렸다.
동시에 손가락이 날카롭게 날을 세웠고 일적의 허리를 노렸다.
일적이 팔을 움직였다.
야망갑이 둘러져 있는 팔이다.
그대로 팔꿈치를 이용해 괴걸왕의 팔을 꺾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괴걸왕이 손을 회수해 버린 것이다.
“이크크. 큰일 날 뻔했구만.”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다.
괴걸왕의 행동에 그가 씨익 하고 웃었다.
재미있다. 아주 재미있다.
절대의 경지에 오른 이후로 그와 맞수가 될 만한 이는 몇 없었다.
삼봉공은 너무도 높아 감히 다가가지 못했고, 적성 내부에서의 싸움은 규율로 엄격하게 금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의 한계까지 몸을 움직이는 경우가 적었다.
그가 웃었다.
“한번 제대로 해보지.”
휘리릭-
야망갑이 분열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야망갑의 두께가 단번에 절반 이하로 낮아진다.
방어력을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일장일단이라.
방어력을 버리며 얻은 것은 무수히 많은 병기들이었다.
야망갑과 같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병기들은 강기라 할 라도 막을 수 있으며 대항할 수 있다.
휘리릭-
그가 손을 뻗어 그중 방천극과 대검을 잡았다.
대검과 방천극이 연달아 허공을 가른다.
공간을 빼곡하게 잠식하며 들어오는 무공에 괴걸왕은 뒤로 물러나기 급급하다.
“왜 그런가? 조금 더 해보지?”
“안 그래도 이렇게 틈을 노리고 있었지!”
괴걸왕의 용두괴장에서 기운이 넘실거렸다. 방천극이 대검을 휘두를 때 생기는 속도의 차이, 그 틈을 괴걸왕이 정확하게 파고든다.
따악-
용두괴장이 일적의 손목을 때렸다. 그러자 손에 들려 있던 대검의 기운이 사라진다.
“과연!”
그가 다른 한 손에 돌려 있던 방천극을 내려놓으며 이번에는 하나의 륜(輪)과 금강저(金剛杵)를 집어 들었다.
금강저는 그 특징상 공격 가능한 거리가 짧다.
그리 넓지 않은 제공권올 보완하기 위해 장거리가 가능한 륜을 집어 든 것이다.
금강권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치 아수라가 된 듯, 야망갑이 분열을 일으키고 아홉 개로 보인다.
“크옥!”
금강저의 끝이 괴걸왕의 손바닥을 베고 지나갔다.
강룡십팔장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는데 금강저가 조금 더 빨랐던 것이다.
손에서 아릿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괴걸왕이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그가 한 걸음 더 빨리 다가와 륜을 던진다.
“어딜 감히!”
휘류류류류류-
뒤로 물러서는 괴걸왕의 속도를 웃도는 륜.
륜이 단번에 괴걸왕의 목을 잘라 버릴 것처럼 날아들었다!
그 빠르기뿐만이 아니라 담겨 있는 기운 역시 적지 않았기 때문에 피하기란 쉽지 않아 보이는 순간!
그 누구도 괴걸왕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괴걸왕이 손을 뻗었다.
콰앙-!!
제5장 코털은 뽑으면 아프다.
자욱하게 먼지가 일었다. 일적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는 괴걸왕이 륜에 적중당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어느새 일적의 팔로 돌아온 륜은 윙윙거리며 회전했다.
먹이를 놓친 것에 대한 분노를 토하는 듯하다.
‘어디, 어디 있는 거지?’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괴걸왕의 위치를 찾는다.
그는 보았다. 륜이 적중되기 직전, 괴걸왕이 강룡십팔장을 아래로 뿌려 허공으로 몸을 날린 것을 말이다.
‘약삭빠르군.’
앞, 뒤, 좌, 우, 아래 모두 없다.
그렇다면 하나 뿐이다.
괴걸왕이 있는 곳은 몸을 날린 허공, 그 자리에 이동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마침 바람이 불어와 자욱하던 모래먼지를 날려 버렸다.
달빛 아래 괴걸왕의 몸이 드러난다.’
“약삭빠르군.”
“날쌔다고 해주면 좋겠네. 홀홀홀.”
어느새 손바닥에 난 상처는 모두 지혈을 한 후였다.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고는 있지만, 좌수를 이용해 장력을 뿌리지는 못할 것이다.
과도한 내기가 집중되면 언제 다시 상처가 터지고 더한 상처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적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은 유리하게 되었군.”
“그래도 내가 이길 테니. 그런 걱정은 말게. 홀홀홀ㅡ.”
휘릭-
둘의 신형이 사라졌다.
콱콱쾅!
허공중에서는 폭발음만이 연달아 울린다. 마치 하늘이 터져 나가는 것 같고, 허공에서 떨어진 유성이 충돌하는 것 같았다.
쾅쾅쾅-
나무가 무너지고 땅이 부서지는 것은 다분한 일이었다.
“으윽!”
견디다 못한 운산과 우천이 조금 더 물러났다.
조금은 절대의 경지에 가까워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 정도나 되는 격차가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나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경지, 둘이 침을 꿀꺽하고 삼킨다.
눈을 부릅뜨고 괴걸왕과 일적의 움직임을 쫓았다.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괴걸왕과 일적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죽겠구만…….’
사실 아무 말도 안 하고 견디고는 있었으나 일적에 비해서 괴걸왕이 조금 모자랐다.
반 수도 되지 않는 작은 차이였으나 그 차이가 충돌을 할 때마다 모여서 이제는 밀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더군다나 손까지 다쳤으니 그 밀리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은 당연했다.
“크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