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물론 취록이 그를 남자로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도 여자인지라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고자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곧 취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부리는 여섯 번째 황룡을 보지 않았던가.
염봉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양기의 집합세, 고자라면 절대로 그 정도의 양기를 쌓을 수 없다.
오히려 음기에 가까운 무공을 쌓았을 것이다.
염룡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가 고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 괜히 무시당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똑똑-
그녀가 동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자운이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뭐해. 대충 씻었으면 밥 먹으러 내려가지?”
취록이 황급하게 동경을 자신의 품속으로 숨겼다. 손바닥 보다 작게 만들어진 동경인지라 그녀의 가슴팍 속으로 쏙 하고 들어간다.
“나가요!”
객잔의 일층으로 내려가자 식사 중이던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 아직 죽지 않았어.’
스스로의 매력이 살아 있다는 것에 위안을 느낀 것인지 취록의 콧대가 한껏 올라갔다.
자운이 가볍게 손끝으로 그녀의 코를 퉁 하고 때렸다.
“아얏!”
그녀가 뾰족한 비명을 지르고, 자운이 씨익 하고 웃었다.
사람을 때려놓고 저렇게 기분 좋게 웃다니…….
‘변태가 분명해.’
그녀의 속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자운이 죽엽청을 들이키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콧대가 한껏 올라갔을까?”
자운이 고개를 빙글 하고 한 번 들렸다.
“아뇨. 아직 제가 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자운이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나이에 벌써 매력이 죽으면 안 되지. 물론 아직 꼬맹이지만.”
자운이 입맛을 다셨다. 세간에 알려진 자운의 나이는 사십 줄이다. 몰론 실제 나이와는 백오십 년이 넘게 차이가 나지만, 일단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졌다.
사십 줄의 나이이지만, 고강한 무공으로 인해 이십대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취록은 타고난 동안으로 스물 중후반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른 초반이다.
세간에 알려진 자운의 나이와 고작해야 열 살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 것이다.
취록이 그 말을 그대로 뱉었다.
“왜 계속 꼬맹이 꼬맹이 하는 거예요? 열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자운이 픽하고 웃으며 손을 들어 점소이를 불렀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 어이, 점소이. 여기 소면 두 개 하고 오리구이 한 마리. 죽엽청은 한 병 더 주고!”
취록의 눈이 반짝하고 빛이 났다.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나이가 훨씬 많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반로환동?
온갖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운이 손가락으로 또 그녀의 코끝을 튕겼다.
“아얏!”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인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어떻게 내 귀에까지 들리냐.”
“그럼 머리 안 굴리게 속 시원하게 말을 해봐요. 나이라든가 그런 거요.”
자운이 죽엽청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나이에 비해서 말도 안 될 정도로 젊어 보이는 외모.
“내가 지금 몇 살 정도로 보여? 순수하게 얼굴만 놓고 봤을 때.”
그의 말에 취록이 자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물여덟, 스물아홉 정도요?”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 두 개를 더했다.
“이십 년을 더하라고요?”
자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십이 년을 더하라고요?”
자운이 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펼쳤던 손가락을 거두어들이며 농을 던지듯 말을 툭하고 터놓았다.
“거기다 이백이 년만 더해라.”
그렇게 되면 이백서른한 살이 된다. 취록이 경악할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가, 이내 곧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발끈해서 말했다.
“놀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줘요.”
“글쎄. 비밀이 많은 남자는 매력적인 법이지.”
“당신은 아니거든요?”
“어? 오리구이 나왔다. 밥이나 먹자.”
자운은 끝까지 자신의 나이를 말해주지 않았다.
물론, 말해주었지만 그것이 진짜라는 생각은 취록으로서 감히 할 수 없었다.
자운이 걸신들린 것처럼 오리구이를 뜯다가 움직임을 뚝 하고 멈췄다.
그가 뼈째로 씹고 있던 오리다리를 입에서 때낸 채로 취록을 바라보았다.
자운이 갑작스럽게 취록을 바라보자 조신하게 소면을 먹던 그녀가 무슨 일이냐는 듯 자운을 바라본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너 시집갈 일이 생길 거 같아서.”
자운의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갑자기 밥 먹다가 시집은 무슨 시집이라는 말인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마저 먹어요.”
그녀의 말에 자운이 객잔의 문 쪽으로 눈짓을 했다.
한 무리의 사내가 모습을 보이고, 그 중간에 꽤나 준수하게 생긴, 하지만 어딘가가 야비해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의 시선은 취록을 향하고 있었는데 간간히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자운을 노려보기도 했다.
“왜 저런 시선을 보내는 거래요?”
그녀가 고개를 숙여 낮게 속삭였다.
자운이 오리다리를 마저 씹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날 질투해서?”
“무슨 이유로요?”
자운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날카로운 턱 선을 매만졌다. 무공을 익힌 덕분에 지방이라곤 전혀 없고, 근육만 말끔하게 남은 그의 몸과 얼굴의 선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내가 좀 잘생겼냐. 남자라면 누군들 질투할 만한 외모지.”
확실히 자운의 외모는 여성스러워 보이는 면 속에 남자다운 굵음이 있는지라 상당히 잘생긴 외모라 할 수 있었다.
이야기 속의 반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서 비교할 만한 얼굴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취록이 피식하고 웃었다.
“퍽이나요.”
자운의 태도가 재미있었던 탓이다. 그녀가 웃자 자운이 고개를 으쓱했다.
“아니면 말고. 밥이나 먹지.”
씹던 오리다리를 모두 해치우고, 오리 날개를 향해 손 을 뻗을 때, 입구에서 취록과 자운을 바라보던 청년이 걸어왔다.
자운이 있는 식탁의 앞에 멈춰 선 그가 취록과 자운을 내려다보았다.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아니, 빈자리도 많은데 딴 데로 가.”
자운의 말에 그의 미간이 꿈틀했다. 하지만 정작 나선 것은 그의 옆에 서 있던, 그의 호위무사로 보이는 이였다.
묵직하게 생긴 몸과 얼굴에, 칼밥 꽤나 먹은 듯 눈에는 길게 상처자국이 있었다.
“너 이놈.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자운이 먹던 오리 날개 뼈다귀를 던져 그의 앞에 놓았다.
툭-
“아니, 몰라. 객지에서 왔거든. 그럼 이 오리 뼈다귀 같은 자식아. 넌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취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목숨이 아깝다면, 지금 눈앞에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에게 스스로 나서서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놈이!”
호위무사가 검을 뽑으려 했으나 그것을 말린 것은 청년이었다.
“어허. 숙녀 분 보는 앞에서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자운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하지만 입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었다.
“킥킥킥!”
자운이 비웃음을 흘리지만, 그는 애써 찌푸려지는 미간을 숨기며 취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취록 역시, 자운과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연극하는 것이 뻔히 보였던 것이다.
하오문의 지부장에 올라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보를 다루는 능력만이 아니다. 눈치를 비롯해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 역시 필요했다.
그것을 모두 일반인들보다 월등히 해낼 수 있었기에 지부장의 자리에 오른 그녀가 지금 이 눈앞의 사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흠홈.”
취록이 웃자 그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공손하게 취록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다.
“저는 환신방의 조천룡이라고 합니다. 미흡하나마 소방주의 위치를 맡고 있지요. 그런데, 아름다운 소저의 이름을 저에게 알려 주실 수 있는지요?”
자운이 킥하고 웃으며 취록을 향해 물었다.
“푸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아, 배 아파 죽겠다. 아는 문파야?”
그의 물음에 취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서는 따라올 곳이 없는 문파예요. 환신방주 조일융은 환검으로 절정에 이른 실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리고?”
자운의 물옴에 그녀가 마지못해 머뭇거리며 답했다
“적성의 중요거점 중에 한 곳이에요. 환신방은 섬서와 감숙을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거든요. 적성의 가호 때문인지, 본래 중소 규모의 문과였던 환신방은 섬서에서 알아주는 대문파로 성장했지요.”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결론부터 말하면 적성의 위세를 입어 호가호위하는 호랑이인 척했지만 결국은 여우 정도밖에 안 되는 문파라는 거잖아.”
취록의 입에서 환신방의 위세를 설명하는 말이 나오자 어깨가 한껏 펴졌던 그가 매서운 눈으로 자운을 노려보았다.
“소저. 내 소저의 방명을 알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충고를 해야겠소. 이 무례한 놈과 소저는 어울리지 않으니 같이 다니지 않는 게 어떻소?”
자운이 젓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그래? 안 그래도 얘가 혼기가 꽉 찼는데 날 따라다녀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거든. 네가 데려갈래?”
취록이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그러기에요?!”
자운이 능글맞게 웃으며 탁자를 두드리던 젓가락으로 머리를 긁었다.
“뭐 어때서 그래. 적성의 가호를 받는 문파라면 신혼집으로 나쁘지 않지 않아?”
자운이 씨익 하고 웃으며 일어났다. 그 미소는 분명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가 그대로 손을 뻗었다.
“물론 내 손에 풍비박산이 나겠지만.”
우득-
자운의 양손이 호위무사와 조천룡의 목을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