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무림에서는 철혈난신 천 대협이 반로환동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어요. 그럼 정말로 반로환동을 한 건가요?”
자운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이 질문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 반로환동이 아니라 애초에 늙지를 않은 거야.”
“설마 시류의 흐름에 간섭을 받지 않는 경지?”
그건 반로환동보다도 훨씬 높은 경지로서 불노불사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경지가 아닌가?
자운이 피식 웃었다.
“거기까지는 아니고, 나도 더 이상은 말해줄 수 없어.”
그렇게 되면 자신이 이백 년 전 사람이라는 것을 들킬 테니 말이다.
자운이 더 이상 말을 해주지 않겠다는데 그녀로서도 억지로 캐물을 생각이 없었다.
생각이 없을뿐더러 그럴 자신도 없었다.
그저 의뭉스러운 눈치로 자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자운이 취록과 함께 산을 타고 넘었다. 그들이 넘고 있는 산은 여산(驪山)으로서 회창산이라고도 하며 예로부터 온천으로 유명했다.
자운과 취록의 옆으로 온천수가 솟아났다. 그 온천수 속에 녹아 있는 유황 냄새가 위로 올라온다.
메케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취록이 그 냄새가 싫은지 코끝을 잡았다.
자운이 솟구치고 있는 뜨거운 온천물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아, 저 안에 들어가서 좀 푹 쉬었으면 좋겠다.”
뜨거운 물을 보니 피로가 쌓인 몸을 녹이고 싶었던 것이다.
옆에서 자운을 쫓아가던 취록이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 답했다.
물론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금쯤 적성의 손에 우리의 정체가 들어갔을 거예요. 어쩌면 놈들은 벌써 추격조를 이용해 우리를 쫓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가하게 온천욕을 할 시간은 없어요.”
자운이 잘 알고 있다는 듯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여자 참 걱정도 많다. 나도 그냥 해본 말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랑은 같이 목욕을 하라고 해도 안 해. 어디 볼 게 있어야 하지.”
그 말에 취록이 발끈했다.
“제가 왜 볼 게 없다는 말인가요? 이렇게 몸매 좋은 여자 또 만난 적 있어요?”
그녀는 무림인 중에서도 아래쪽이라 할 수 있는 하오문의 사람답게 매우 개방적이었다. 어지간한 무림세가의 여인들도 이런 말은 입에 쉽게 담지 못하는데 당당하게 입에 담은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더욱 뻔뻔스러운 것은 바로 자운의 태도였다.
자운이 피식 웃었다.
“가슴에 넣은 그 솜이나 좀 빼고 말하는게 어때?”
그녀가 손을 확 들어 가슴을 가렸다.
“어머, 제가 언제 가슴에 솜을 넣었다는 말이에요?”
자운이 과장스럽게 그녀의 행동을 흉내 내었다.
“어머, 언제 넣기는 매일 저녁마다 잘 빨아서 말리고 아침에 새로 집어넣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가슴이 족히 두 배는 커지더구만.”
자운의 말에 그녀가 성난 고양이처럼 하악 뛰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변태!”
자운이 받아쳤다.
“네가 보여줘 놓고는 뭘 새삼스럽게 그래? 가슴에 들어 있는 그거 좀 뽑아줘?
자운의 신형이 휘익 사라졌다.
그가 나타난 곳은 그녀의 바로 앞이었다. 자운이 손을 ㅃ?ㄷ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취록이 비명을 질렀다.
“어머! 이러시면 안 돼요!”
그녀의 귀로 자운의 전음이 날아든다.
[조용히 해. 그것보다 우리, 추격자 붙었어.]
자운의 전음에 그녀가 깜짝 놀랐다.
[티 내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내 손바닥에 적어라.]
입으로는 능청스럽게 음담패설을 중얼거렸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좋으면서 괜히 빼기는.”
취록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여자는 분위기를 타는 존재인데, 이런 곳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구요.”
자운이 피식 웃었다.
그 사이 취록이 손바닥에 적는 글자를 알아들었다.
?우리 뭔가 실수한 거 있어요?
[아니, 그런 적 없는데.]
“웃기고 있네. 여기 얼마나 좋아. 옆에는 온천이 있고, 앞에는 이렇게 절세 미남이 있고.”
?그럼 왜 미행이 붙은 건데요?
[글쎄, 미행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갈 만한 모든 길에 매복을 펴놨다고 봐야겠는데?]
자운이 손가락 끝으로 자신을 지목했다.
“됐네요.”
말을 하며 자운이 기감을 넓혔다. 단번에 그의 기감이 여산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커졌고, 곧 자운의 미간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요?
좋지 않은 자운의 표정을 알아본 그녀가 자운의 손바닥에 글을 적었다. 자운이 전음을 통해서 중얼거렸다.
[아, 젠장. 우리 엿 됐다.]
?왜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손바닥에 글을 적어 나가는 취록에게 자운이 전음 대신 입으로 중얼거렸다.
“시발. 천라지망이 펼쳐졌어. 그것도 여산 전체를 덮고도 남을 천라지망이.”
제12장 아딕도 네가 웃을 수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
“놈이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부하의 말에 이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느끼고 있었다. 여산에서 피어오르는 존재감을, 절대의 경지에 이른 존재감을. 자신의 주변으로 천라지망이 펼쳐졌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봐줄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래, 그 정도는 해줘야지.”
이적이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철혈난신이 모습을 감춘 지 삼 년째. 그가 가장 처음 모습을 드러내었던 곳이 섬서라 해서 섬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기를 잘했다.
이적의 생가개로 놈은 다시 섬서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자운의 위치를 확인한 이적은 단번에 섬서의 적성 모든 지부에 연락을 해 병력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이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무사 일천을 끌어 모으든 이천을 끌어 모으든 자운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적 역시 그 병력을 이용해 자운을 잡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에서 청해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틀어막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여산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적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여산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이 한층 진해졌다.
황금빛 물결이 여산의 정상에서 치솟는다. 그 물결의 빛이 이적의 동공 가득히 들어왔다.
그가 걸음을 움직였다.
향하는 곳은 여산, 노리는 것은 철혈난신 천자운!
“네놈이 아무리 강한다 한들 천하에서 가장 강한 기운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발이 닿은 자리, 그 자리에서 푸른 뇌전이 번득였다 사라졌다.
* * *
“크아아악!”
“흐아아악!”
“으아아아악!”
유황 냄새가 피어오르는 사이로 자운의 몸이 날았다.
사방에서 비명이 우후죽순처럼 터져 나왔다.
일격일살을 이미 넘어선 경지. 단 한 번에 여러 명이 죽어 나간다. 실력 차이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절대의 경지에 오른 자의 실력. 자운의 앞에서 천라지망이란 그야말로 가지고 놀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먹잇감은 난신이라는 귀신에게 철저하게 농락되고 있었다.
파바밧?
자운의 손에서 한 줄기 경기가 뿜어졌다. 경기는 바람을 타고 날카롭게 날아갔다.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예기가 일었다.
검을 꺼내 들지도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먼지를 털어내듯 슬쩍 움직이면 정확하게 그 방향의 땅거죽이 뒤집어진다.
쾅쾅쾅?
삼여 장의 땅거죽이 뒤집히고, 깊이 들어 있던 황토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운의 족적이 황토 위에 새겨지고 다시 뛰어 올랐다.
종횡무진.
그것이 지금의 자운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인 듯했다.
번쩍 빛이 발하고, 적이 날아갔다.
방금 날아간 이는 적성에서도 백흥에 속하는 실력자라고 할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꼽아보자면, 적성에서 칠적은 제외한 서열 백 삼십 위 안에 속해야지만이 홍(紅)의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실력자가 자운의 손짓을 이겨내지 못하고 날아간 것이다.
땅바닥을 뒹구는 백홍의 입에서 한 사발이 넘는 피가 토해졌다.
“우웨엑!”
과연 이것이 사람일까 싶은 정도의 일격. 먼지를 털어내는 손짓에 내장이 진탕되고 단전이 흔들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기운을 끌어올린다면 아마도 다시는 재기 불가능할 정도의 내상을 입게 될 것이다.
“괴, 괴물 같은 놈.”
자운이 피식 웃었다.
“너희들에게라면 나는 언제든지 괴물이 되어주지.”
자운의 말에 상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온몸이 끊어지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절대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는 고수 못지않았다.
어느 지방을 가든 엄청난 고수로 이름을 날릴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감히!”
그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자운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그것은 마치 양 떼 사이를 농락하는 용과 같았다.
양 떼는 아무리 많아도 용을 이길 수 없다.
검강이 날아왔다.
자운이 의지를 이끌었다. 손끝에서 수강이 솟구치고, 그것은 이내 손 전체를 휘감았다.
터엉?
자운이 포물선을 그리며 검강을 쳐 내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슥슥 만졌다.
“간지럽지도 않군.”
자운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앞으로 다섯 명의 사내가 내려앉았다.
대부분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까지 나왔던 이들과는 수준이 달리하는 고수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자운의 눈앞에 내려선 이들은 백홍보다 한 단계 위의 삼십단에 속하는 고수들이었다.
칠적을 제외하고 적성 내부에서 서열 삼십 위안에 드는 이들만이 단(丹)의 이름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삽십단 중 하나인 포영매가 자운을 노려봤다.
“당신이 철혈난신이요?”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하나라면 모를까, 삼십단 중 다섯을 맨손으로 상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니, 힘들다기 보다는 시간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맨손으로 하더라도 모두를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검을 쥐는 것이 더 빨랐기에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을 잡고 매달려 있는 취록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꽉 잡아야 할 거다.]
취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운의 목을 감싸 매는 취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바로 난신이다.”
자운이 허리를 쭈욱 펴며 말했다.
그의 몸에서 오연한 기세가 피어오른다.
자운이 스스로 난신임을 인정하자, 다섯 사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나는 포영매라 하오.”
“나는 독고청이오.”
“무외강이오.”
“우선적이요.”
“나는 제목충이라오.”
그들이 모두 스스로의 이름을 말하고 나자, 가장 서열이 높은 포영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난신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오.”
자운이 피식 웃었다.
“그럼 죽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