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거암도가 무식하게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운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공세를 이어나간다.
밀릴 생각은 없다.
승기는 보였다 싶을 때 한 번에 잡아채야 한다. 오랜 전장의 경험이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거암도의 신형이 조금씩 밀리고, 운산이 놈의 사이에서 빈틈을 찾았다.
푸욱?
단번에 두터운 뱃가죽이 잘려 나간다. 그리고 거암도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런 운산을 공격한 것은 창을 이용한 세 명의 무인이었다.
능수능란한 협공. 그들의 실력은 강기지경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감히 운산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경시할 수는 없었다.
운산이 차분하게 눈을 내리깔고 그들이 움직임을 살폈다.
셋은 운산을 진 속에 가둬놓기라도 한 듯 주변에서 빙글빙글 돌며 운산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러다 운산이 빈틈을 보였다 싶을 때 놈들 중 하나가 튀어나왔다.
피슈웅?
창이 단번에 대기를 가르고 운산의 허리를 향해 질주한다.
운산의 보법이 일변했다. 가볍고 빠르게 전장을 누비던 보법에서 무겁고 태산과 같은 보법으로 변했다.
광룡폭로.
이전에는 내공이 부족하여 감히 펼치지 못했던 보법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광룡폭로를 이용하자 바닥이 터져 나가고, 바위와 돌조각이 치솟았다.
퍼버버벙?
알에서 화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운산의 발아래가 터져 나갔다.
쾅쾅쾅?
바람 소리가 나며 돌에 가로막힌 적의 창이 운산을 빗나갔다.
운산이 놓치지 않고 놈들의 품속을 그대로 파고들었다.
공수탈백의 수법,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의 품속을 파고들어 검을 휘두른다.
당황한 놈은 창대를 이용하여 운산의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강기가 솟구치는 검을 평범한 창대로 막아내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쾅?
운산의 발이 묵직하게 진각을 밟고, 그 무게가 그대로 검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는 창대와 함께 그의 몸을 통째로 반으로 갈라간다.
질퍽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내장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운산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는 운산의 허리를 노리는 창 두 개가 찔러들어 오고 있었다.
그가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는 바닥에 눕는 형상으로 몸을 띄웠다.
등이 일순간 화끈해지더니 창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철판교의 수법을 이용해 다리를 굽힌 후 발끝으로 등 아래를 지나간 창대를 때렸다.
터엉?
묵직한 무게에 적의 창대가 흔들리고, 그 반발력을 이용해 운산의 몸이 날았다.
휘이이익?
운산이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그 모습이 마치 무당의 제운종과 같았다.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다시 운산의 보법이 일변한다.
무거운 보법에서 빠르고 가벼운 보법으로.
운산이 단박에 흔들리는 창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어엇!”
운산이 파고들자 놈이 놀란 듯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운산의 검이 더 빨랐다.
쉬익?
단번에 놈의 어깨를 잘라내고, 몸을 뒤로 돌려 한쪽 다리마저 잘라내었다. 이제 이자는 전장에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허리 언저리가 화끈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크윽!”
운산이 불에 덴 듯한 뜨거운 감각에 신음을 흘렸다.
‘한 놈이 더 남아 있었지.’
운산이 호홉을 들이쉬고 적을 확인했다. 둘을 쓰러뜨렸는데 하나가 남아서 운산을 공격한 것이다. 허리를 확인하자 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어 가고 있다.
상처가 넓지는 않으나 깊었다. 빨리 지혈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을 앞에 두고 지혈을 할 수는 없었다.
운산이 한 손으로 허리를 꾹 눌렀다. 본격적인 지혈 대신 당장에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손바닥으로 막은 것이다.
“흐흐흐, 허리를 다쳤으니 움직임이 둔해지겠군.”
놈이 운산을 향해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놈의 창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강기를 창에 덧입힌 창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운산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창강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말을 씹어 뱉었다.
“너 하나가 죽이기에는 충분하지.”
그의 검에서 역시 황금빛 강기가 타오른다. 먼저 선공을 취한 것은 놈이었다.
상처 입은 운산이 먹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쐐애애액?
창이 허공을 찢었다. 붉은 궤적이 그려지고, 그 위로 강기가 휘날리는 것이 마치 혈번(血磻)을 연상시켰다.
피의 깃발은 순식간에 운산의 지척에 다다랐다.
철판교!
운산이 허리를 꺾었다. 등이 바닥에 닿을 듯 내려갔다가 벼락처럼 튀어 올랐다. 그 반동을 이용한 사선 베기. 황금빛 물결이 허공에 그려지고, 그 공격이 붉은 혈번과 같은 창대와 충돌했다.
카앙?
강기와 충돌하고, 한 손으로 허리를 누르고 있던 운산이 조금 밀렸다. 두 손이 모두 자유로우면 모를까, 한 손으로 지혈도 되지 않은 상처를 누르고서는 도무지 동수를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렇다고 힘이 모든 것은 아니지.’
그는 전장에서 부족한 기교를 채워 넣었다. 그의 몸은 고정된 채로 발이 교룡번신의 수법을 따라 움직였다.
교룡번신의 수법이 발에서 시작되어 척추를 타고 두 손의 신경으로 전해졌다. 단번에 검의 궤적이 일변하며 놈의 힘을 그대로 흘려버린다.
그와 동시에 자운이 창을 향해 검끝으로 흡자결을 펼쳤다.
일전에 자운이 펼친, 사람 하나를 끌어들이는 정도로 강력한 흡자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창대를 쑤욱 잡아당기기에는 차고 넘쳤다.
흡자결의 힘이 단번에 창대를 끌어들인다.
창이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애먼 곳으로 가려 하자 놈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어어?”
다급하게 흡자결인 것을 느끼고 역으로 방자결을 펼쳐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흡자결의 중심부로 향하고 있는 창대를 통제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의 몸이 창대와 함께 달려 들어왔다.
운산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카앙?
강기가 묻어나는 검과 창이 충돌하고 불똥이 튀었다. 튕겨나온 운산의 검이 다시 회전해서 돌아갔다.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연격. 이격이 그대로 펼쳐졌다. 일전의 충격이 남은 창은 부르르 떨고 있었고, 흡자결까지 창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어 운산의 공격을 막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운산의 공격이 단번에 놈의 허벅지를 베었다.
피슈욱?
허벅지 위로 피가 솟구친다. 뼈가 잘리지는 않았지만 근육을 단번에 잘라 버렸으니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으아아아악!”
허벅지가 잘린 놈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운산의 미간이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쳐 낸다.
푸욱?
놈의 머리가 비명을 지르던 모양 그대로 돌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털썩?
운산이 놈의 머리에 시선을 두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허리를 지혈했다. 혈을 누르고 품속의 붕대를 꺼내 들고 단단하게 묶었다.
“후우! 정말 끝도 없구나.”
삼숙으로 대표되는 동쪽의 전장과 청해로 대표되는 남방의 전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렇게 아비규환이 펼쳐진다.
적성의 무인들, 그리고 적성에 가담하여 떨어지는 꿀떡이라도 받아먹어 보려고 하는 무림문파들이 청해와 감숙을 넘기 위해 매일 공격해 왔고, 무림의 안정을 가져오고자 하는 무림맹이 최후의 방어선이라고 할 수 있는 청해와 감숙을 막았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전장의 반복이었고, 그 속에서 황룡문이라는 수가 적은 문파의 문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다만 소식을 알 수 있는 이들이라고 한다면 태원삼객과 우천에 관한 이야기 정도였다.
태원삼객은 운산과 같은 동쪽의 전장에 있다고 한다.
무도와 탐창의 중간에서 적들을 막고 있다는 소식도 들은 것 같다. 다행인 점은 그들 중 누구 하나가 죽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우천이 있는 곳은 청해 쪽의 남쪽 전장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쪽은 감숙에 비해서 더욱 치열한 전장이 펼쳐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역시 천운이 따른 것인지 우천의 사망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고, 보름에 한 번 꼴이나마 연락을 주고받고 있기도 했다.
‘이럴 때에 대사형이 있어준다면…….’
운산이 다시 전장 속에서 몸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상처 입은 무사는 전장에서 가장 요리하기 쉬운 것 중 하나다. 단번에 죽이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는 예외인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고수다.
운산 역시 예외라 할 수 있는 고수에 속했다.
많은 이들이 피에 젖어 있는 운산의 허리를 보고 상처 입은 자라 생각하여 달려들었지만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명을 달리했다.
푸확?
적에게서 튄 피가 앞섶을 축축하게 적셨다.
막 적을 베어 넘긴 운산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대사형, 언제쯤 돌아오시는 겁니까?”
자운에 관한 소식은 의외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본대로 복귀했을 때, 무림맹에서 나온 사람이 운산을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황룡문의 문주 황룡대협 검운산 대협이 맞으십니까?”
무림맹의 사자 구일청의 말에 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검운산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무림맹에서…….”
분명 운산이 무림맹 소속이기는 맞지만, 지금 당장 무림맹에서 따로 연락이 올 일은 없었다. 의문스러워하는 운산을 향해 구일청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현재 황룡문에서 황룡문의 무공으로 삼층 누각을 임검에 무너뜨릴 정도의 고수가 있습니까?”
물론 구일청 역시 그런 고수를 한 명 알고 있었다. 삼 년 전 적성들과의 싸움 후 폐관에 들어 모습을 감춘 사내, 철혈난신이라면 충분히 그 정도의 무위를 펼칠 수 있었다.
운산 역시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자운이었다.
“한 명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구일청의 물음에 운산이 고개를 흔들었다. 삼 년 전 그가 폐관에 들어서고 나서 이제는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아직도 폐관에 들어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무림에 다시 나왔는지는 운산으로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운산이 고개를 흔들자 구일청이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었다.
“섬서에서 황룡문의 무공으로 삼층의 누각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비록 천하의 절반 이상이 적성의 손에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세작을 침투시키고 정보를 얻어올 수는 있었다.
이번에 전해진 정보는 바로 섬서성에 침투해 있는 세작으로부터 전해진 정보였다.
그 말에 운산이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어났다.
“대사형에 관한 소식이란 말입니까?”
그 말에 구일청이 고개를 조용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