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룡난신-94화 (94/175)

# 94

피가 빨리 목내이처럼 변한 사내의 시체가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처음에는 달콤했는데 이제는 비리네.”

일성이 히죽하고 웃었다. 피 맛이 비리게 변했다는 것은 더 이상 피를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일성의 무공이 완벽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하드립니다.”

일적이 머리를 쾅 하고 바닥에 박았다. 그릴 시작으로 모든 적성의 이들이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쾅?

쾅쾅?

여기저기서 머리 찍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적성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제10장 즉결 처분이다. 개똥같은 자식아

자운은 무념무상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황룡무상십이강은 무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집약해 놓은 무공이다.

패, 호, 쾌, 환 등등 수도 없이 많았다.

자운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내 그것들은 자운이라는 물속에 녹아들었다.

어느 것이 딱히 무리라고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자운이라는 물은 그 모든 것을 품고 잔잔하게 흘렀다.

바야흐로 무공에서 말하는 유수(流水)의 경지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작은 시냇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거대한 폭포수로 변했고, 흐르고 흘러 강이 되어 하류로 들렀다.

그리고 종착한 것은 무의 바다, 무해(武海)였다.

무해 속에서도 자운은 그 흐름을 잊지 않고 흘렀다. 누구도 대항하지 못할 거센 해류가 되어 흐른다.

자운의 몸속에서 황룡이 이내 한 마리씩 꿈틀거리며 늘어갔다.

패룡, 호룡, 비룡이 순서대로 머리를 들었고, 나머지 녀석들도 때가 됨에 따라 하나씩 머리를 들었다.

그렇게 유수(流水)와 무아(無我)의 경계 속에서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쩌억?

거대한 바위가 정확하게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 속에서 머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걸어나온 사내가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한 듯 탈색된 피부, 어깨에는 껄렁하게 검을 걸치고 있었다.

“아아,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햇빛인지.”

그가 눈이 부신 듯 하늘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수와 무아의 경계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매우 적은 시간이 지났을 수도 있고, 매우 많은 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가 동굴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사내는 삼 년 전 폐관에 든 자운이었다. 그가 바닥까지 흘러내리는 머리를 황룡신검을 이용해 싹둑 잘라내었다.

기다란 흑발이 옥수수 떨어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어깨 위로 내려오는 머리는 남자치고는 제법 길었다. 자운이 자신의 옷소매를 부욱 찢었다.

그것으로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어버린다.

“그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자운이 고개를 흔들며 주변을 살폈다. 얼마나 흐른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주변은 처음 폐관에 들어설 때와는 달리 조금 변했다.

뚜둑뚜둑?

목을 꺾자 여기저기서 뼈 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몸을 푼 자운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농을 던졌다.

“하하하! 설마 또 이백 년이 지난 것은 아니겠지?”

자운의 걸음이 향하는 곳, 그쪽에는 황룡문이 있었다.

자운이 난감한 표정으로 황룡문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분명 황룡문이 있었던 자리가 맞는데 지금은 황룡문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설마 또 이백 년이 지난 건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지만, 가설적으로는 맞지 않았다.

그가 이백년 이라는 시간을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가사 상태에 들어서서 최소한의 활동만이 일어나던 몸뚱이 때문이었다.

이번 폐관 수련에서는 가사 상태에 들어서지 않았으니 이백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자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난 건가?”

아무래도 황룡문에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운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럼 알아보러 가야겠네. 그리고 만약 황룡문이 해를 입은 것이라면…….”

뿌드득?

자운이 이를 갈았다.

그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황룡신검을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는 소식을 듣기 위해 저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떤 놈이든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자운이 찾아간 곳은 기루였다. 평범한 기루가 아니라 일전에 정보를 얻고 황룡문과 거래를 하던 기루다.

다행히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하오문의 표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운이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자신을 맞으러 나온 점소이에게 금원보 하나를 보여주었다.

이전에 폐관에 들어서기 전에 혹시 몰라 챙겨두었던 금원보다. 그것을 이렇게 쓸 줄을 자운으로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금원보를 바라본 점소이의 표정이 경직되고, 그는 곧 자신보다 높은 이에게 알리러 가려는 듯 자운에게 양해를 구했다.

“대인이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총관 나리를 불러오겠습니다.”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그래. 얼마든지 기다려 줄 테니까 좀 불러와라.”

점소이가 떠나가고 잠시 기다리자 기루의 총관이 나왔다.

이전과는 다른 총관. 이전에는 여자 총관이었는데 이번에는 남자 총관이었다.

‘그사이에 사람이 바뀌었나 보군. 그럼 루주도 바뀌었으려나?’

그러면 생각보다 골치 아파지는데, 일단은 한번 부딪쳐 보기로 했다.

“본 루의 총관 만일입니다. 대인을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자운이 일전에 말했던 암어를 그대로 다시 말했다.

“사층으로 가고 싶은데?”

말을 하며 자운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운의 말에 총관의 눈에 예리하게 반짝인다. 암어를 알아들은 것이다.

“손님, 저희 루에는 사층은 없고 삼층까지밖에 없습니다.”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암어의 예정된 어순이었다.

자운이 다음 암어를 말했다.

“그럼 삼층의 제일 구석진 방으로 보내줬으면 하는데?”

“그럼 원하시는 대로 삼층에서 가장 풍경이 좋은 방으로…….”

자운이 친절하게 그의 말을 수정해 주었다.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삼층에서 제일 구석진 방으로 데려다 달라고.”

이전과 같이 자운은 삼층에서 가장 구석진 방으로 안내되었다.

자운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총관 만일의 눈이 반짝 빛났다.

가장 구석진 방으로 안내된 자운이 쳐져 있는 발 너머를 들여다본다. 원래는 절차가 하나 더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절차는 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자운이 발 너머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쩝쩝. 젊은것들 속곳을 좀 보고 싶었는데, 용케도 알고 미리 대기하고 있었네?”

자운의 말에 취록이 웃었다.

“이전과 같은 암어를 쓰신 분이 있다길래 단번에 알아들었지요.”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눈치 하나는 빨라서 좋군.”

제 집 안방이라도 된 것처럼 자리에 편하게 앉는 자운. 자운이 손을 휙 움직였다.

단번에 취록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발이 위로 올라간다.

촤르르륵?

취록의 얼굴이 드러났다.

“역시 넌 바뀌지 않았네. 총관이 바뀌었길래 너도 바뀌었으면어쩌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자운의 말에 그녀가 웃었다.

“호호호! 천하의 난신께서 저를 기억하고 있으시다니 기쁘기 그지없네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조금 몸값이 비싼데 말입니다.”

그녀의 말에 자운이 피식 웃으며 품속에 하나 남은 금원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미안한데, 지금은 가진 게 이거 하나밖에 없어. 정확하게 말하면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거든. 개방 들어가도 될 팔자야.”

“음, 그건 조금 곤란한데요? 저희는 정보상인. 돈이 들어오지 않는데 정보를 넘겨줄 수는 없어요.”

그리고는 그녀의 목을 겨눈다. 검결지를 타고 강기가 흘렀다.

“죽어도?”

하지만 취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예. 죽어도요.

자운이 피식을 웃으며 검결지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는 취록의 눈을 마주 봤다.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 정보상인 해먹지. 그럼 이건 어때? 나한테 하오문이 빚을 하나 지워두는 거다.”

“빚 말인가요?”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림의 절대자 중 한 명이다. 무려 난신. 그에게 빚을 지워두면 후에 꽤 중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밑지지는 않는 거래.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물러서 줄 수는 없다.

“그럼 일단 원하는 정보나 들어보지요.”

그녀가 태연하게 말을 하자 자운이 피식 웃고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지금 궁한 것은 자운이지 그녀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정보는 황룡문에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내가 무림에서 모습을 감춘 지 얼마나 되었고, 그사이에 일어난 일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군.”

사실 그리 값이 나가는 정보는 아니다. 대부분 밖에 나가 선술집에서 발품을 조금만 팔면 얻을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정보였다.

취록이 그것을 그대로 말했다.

“조금만 발품을 팔면 술 한 잔에도 이야기를 파는 이들이 많을 법한 정보로군요.”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정도는 자운 역시 알고 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시중에서 들려오는, 누가 어찌 어찌 했다더라 하는 정보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정보는 비교적 자세한 정도다. 최대한 상세하게 말이지.”

그렇다곤 해도 그리 비싼 정보는 아니었다. 그거 하나에 난신이라는 절대고수에게 빚을 지워둘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대박 나는 장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정보를 드리지요.”

자운은 경청하여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운이 폐관 수련에 들어선 지는 벌써 삼 년이 흘렀다고 한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라 안도했다. 하지만 자운이 폐관에 들어설 무렵처럼 어지러운 시대에서는 절대로 삼 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자운이 폐관에 들어서고 반년 정도가 더 흘렀을 무렵, 일성이 발호했다고 한다.

그들이 발호를 시작한 곳은 대륙의 남쪽 남해도. 남해도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그들은 무서운 신위로 무림을 차차 정복해 나갔다고 한다.

그 선두에 선 이는 일성으로서, 괴걸왕과 독성이 동시에 덤볐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독성은 한쪽 팔을 잃었다고 한다.

자운이 혀끝을 찼다.

“일성이라는 놈이 생각보다 강했던 모양이군.”

자운의 말에 취록은 일성이라는 자가 절대고수 둘을 상대하면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했지만, 자운은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래, 알았으니 다음 이야기나 계속해 봐’ 라고 말했을 뿐이다.

마치 자신 역시 그 정도는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취록은 곧 자운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일성이 선두에 선 적성의 무림 정복, 그 손은 마침내 섬서에까지 닿았다. 섬서의 황룡문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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