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검 위로 화르륵 금빛 강기가 타오르는 순간, 황금빛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푸욱―
이질적인 소리가 들리며 황룡신검이 삼적의 가슴을 관통했다.
자운이 단번에 창백해지는 놈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그냥 죽어.”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귀찮게 하지 말고.”
풀썩!
삼적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자운이 놈의 심장에 박힌 황룡신검을 뽑았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 자운의 앞섶이 삼적의 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시선을 조금 돌려 바라보자, 괴걸왕이 육적을 제압하고 있었다. 따로 도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자운이 검을 뽑아 들고 개방도들과 싸우고 있는 사파인을 향해서 소리쳤다.
“다 죽여주마!”
사실 내공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 죽이려 한다면 내공이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허장성세를 부렸다.
여기서 밀리는 행동을 해서는 큰일 난다.
“으아아악!”
자운의 내공이 담긴 외침에 사파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수많은 개방도에게 밀리고 있는 차에 자운이라는 괴물까지 합세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일부 사파인들은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고, 다른 사파인들은 개방도의 손에 제압되었다.
모두가 제압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자운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다음에 또 칠적 두 명이 덤빈다면 그때도 살아난다는 장담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빌어먹을, 이백 년을 폐관을 했는데도 부족하네.’
자운이 입맛을 다셨다. 저 먼 곳에서 운산과 우천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황룡문도들의 얼굴이 보였다.
운산과 우천의 뒤로 태원삼객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이 손을 흔들며 자운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아, 이거 참 미안하게. 난 뛰어갈 힘도 없는데.’
왠지 온몸이 힘이 쫘악 빠지는 기분. 몸이 나른해졌다.
자운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조금만 자야겠다.’
천산에서 이곳까지 쉬지 않고 뛰어와서 칠적 중 무려 둘과 생사투를 벌였다. 자운이 아무리 초인이라 한들 지치지 않을 리가 없다.
눈앞이 몽롱해졌다.
제9장 선배를 선배라 부르지 못하고
황룡문의 상당히 많은 곳이 부서졌다.
몇 날 밤을 전투를 벌이며 황룡문도를 지켜준 황룡문 이었다. 멀쩡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산한 일일 것이다.
그 무너진 벽을 복원한 것은 황룡문도들과 개방 사람들이었다.
운산이 걸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걸왕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같은 정파인들끼리 어려운 시기에 돕고 살아야지. 험험험.”
걸왕의 말에 운산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황룡문도들 역시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필요한 재료를 구해왔고, 작업장을 회복했다.
사황성주였던 삼적이 자운의 손에 목숨을 잃었으니, 그 아래에 있던 작업장들 역시 그들의 구역으로 가져올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그전에 자운이 깨어나는 것이 먼저였다
걸왕이 자운의 안위를 물었다.
“그것보다 자네의 사조… 흠흠, 자네들의 대사형은 깨어났나?”
그 말에 자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많이 피로하셨던 모양입니다.”
외상을 제외한 특별한 내상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자운이 깨어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잠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흠흠. 그렇군. 벌써 보름째지?”
자운이 걸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보름째 자운은 잠에 들어 있는 것이다. 앞으로 깨어나려면 얼마나 더 걸릴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걸왕이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칠적 중 벌써 넷. 대단하군.”
넷.
자운이 쓰러뜨린 칠적의 수다. 무림의 절대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칠적, 그중 절반이 넘는 수가 자운의 검에 명을 달리한 것이다.
걸왕이 속으로 괴물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정말, 정말 괴물이야, 괴물!!’
거기다 저 노괴물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자운이 사파가 아닌 정파라는 점이었다.
“우후, 그렇군. 그보다 황룡문의 복구가 다 되어가는 것 같구만.”
“개방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아닐세. 아까도 말했지만 어려울 때 다 같이 돕고 살아야지.”
걸왕이 입맛을 쩝 다셨다.
“물론 우리는 거지인지라 돈은 없어 몸으로 때우고 있지만 말일세.”
그 말에 운산이 피식 웃었다.
“뭐, 이제 복원도 끝난 듯 하니 조만간 우리는 돌아갈 걸세. 워낙 거지라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것도 있고, 난신이 깨어나면 얼굴이나 좀 보고 가려고 했는데 안타깝구만.”
그 순간, 저 멀리서 그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우천이 뛰어왔다.
그리고는 운산과 걸왕을 향해 소리쳤다.
“사형, 대사형이 깨어났습니다!”
걸왕이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시발.’
“아, 물 좀 줘.”
자운이 깨어나자마자 찾은 것은 물이었다. 운산이 물 잔에 물을 담아 자운에게로 넘겨주었다.
걸왕은 물을 시원하게 쭈욱 들이켜는 자운을 매우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걸왕에게로 자운의 전음이 날아든다.
[뭐, 꼽냐?]
걸왕이 바로 답했다.
[아, 아닙니다, 선배님.]
자운은 걸왕에게 있어서는 까마득한 선배였다. 물론 티를 내지는 못했다.
‘선배를 선배라 부르지 못하고, 아, 지미.’
걸왕으로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는 고작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이가 자신의 무림 대선배라니, 인정하기 싫은 일이지만 현실이었다.
자운이 걸왕을 바라보았다.
“황룡문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포권까지 취해 보이지만, 전음으로는 전혀 다른 내용이 날아갔다.
[도와줘서 고맙다. 쉰밥 한 그릇 줄까?]
“아닐세. 무름 동도끼리 돕고 살아야지. 황룡문이 어디 남인가? 같은 정파의 한 가족이 아닌가. 허허허.”
걸왕이 앞에 붙은 괴 자에 어울리지 않게 제대로 된 말을 했다. 그만큼 눈앞에 있는 자운이 무서웠던 까닭이다.
하지만 전음으로는 전혀 다른 말이 오갔다.
[먹고 탈 날 일 있습니까? 그건 줘도 안 먹습니다. 허허허.]
[내가 먹이겠다면?]
[소금 뿌려주시면 아랫것들도 먹이겠습니다. 두 번 먹이겠습니다.]
“자네의 손에 벌써 칠적 중 넷이 명을 달리했네. 참으로 무림의 흥복이 아니라 할 수 없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가 그 넷 죽인다고 얼마나 골골거린 줄 아냐? 알면 네가 하나라도 좀 죽여.]
[말이 넷이지 하나는 내가 죽였습니다.]
육적을 말하는 것이었다. 분명 육적의 명을 끊은 것은 걸왕이었다.
괴걸왕이 거기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독성이 죽였습니다.]
자운의 미간이 좁혀지고 혈관이 튀어나왔다.
[이걸 둘 다 죽여 버릴까 보다. 야, 니네들, 내 공 뺏어 먹으니 좋냐? 좋아?]
[흠흠. 아니, 뭐, 확실하게 하자는 거지요.]
[확실하게 니 명을 따버릴까 보다.]
걸왕이 빠르게 발을 뺏다.
“흠흠. 그럼 사형제 사이에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으니 나는 나가보겠네.”
자운이 고개를 숙였다.
“예.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야, 가긴 어딜 가냐? 죽을래? 안 돌아와?]
걸왕이 자운의 말을 무시했다. 운산과 우천 역시 포권을 취해 보이며 방에서 나가는 걸왕을 배웅했다.
자운이 나가는 걸왕의 뒷머리에다 대고 끝까지 소리쳤다.
[야, 너, 돌아와! 좀 맞자! 오늘 한번 무림의 위계질서를 다시 세워주마!]
하지만 나간 걸왕이 돌아올 일은 없었다.
걸왕이 나가자 자운이 운산과 우천을 바라보았다.
“많이 힘들었냐?”
자운이 툭 던져 놓은 말. 가벼운 어조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심금을 울리는 말이 없다.
많이 힘들었냐고 물어보면 정말로 많이 힘들었다.
운산과 우천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예.”
“예!”
우천의 목소리가 더 컸다.
“정말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자운이 손바닥으로 우천의 머리를 툭 때렸다.
“짜식이, 뭐가 그리 힘들었다고 크게 소리를 치냐. 고생한건 너나 네 사형이나 똑같은데 말이지.”
자운의 말에 우천이 운산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사형은 강기지경에도 들어서고 건진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는 운산의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사실 무인으로서 부럽지 않을 리가 없다.
자운이 운산과 우천을 쓰윽 살폈다.
“글쎄, 강기지경에 들었다고 모두 고수는 아니지. 물론 운산이 강기지경에 들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칭찬을 해줘야겠지만, 내가 볼 때는 둘 다 어린애라는 거지.”
자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천 너는 정말 이번에 얻은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냐?”
자운의 말에 우천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분명 우천역시 얻은 것이 있었다.
그 사실은 우천도 잘 느끼고 있었다.
자운의 손등으로 우천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 얻은 것 하나하나 쌓아 나가다 보면 순서를 밟아 고수가 되는 거다. 사실 단번에 고수가 되는 사람은 몇 없어.”
그리고는 그가 자신의 품속으로 손을 쑤욱 집어넣었다. 꺼내 든 것은 하얀 털 뭉치에 싸여 있는 무언가였다. 자운이 무언가를 꺼내 들자 운산과 우천이 무엇인기 하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너네한테 줄 게 있지.”
그가 털 뭉치를 풀었다.
순식간에 방의 온도가 올라간다. 그 속에 담긴, 양기를 가득 품은 영약이 기운을 마구 흘려대었기 때문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건 내단이 아닙니까?”
당연히 눈치를 챈 운산이 말했다. 우천이 운산 옆에서 침을 꾹꺽 삼켰다.
“어. 운이 좋아서 한 마리 썰었더니 나오더라.”
물론 너무 운이 좋아서 문제였다.
자운이 아직도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쩐지 운수가 너무 좋더라니, 왜 내단을 얻어도 편히 돌아가질 못하니.’
눈사태가 자신을 덮쳤던 일이 생각난 것인지 자운이 입맛을 다셨다.
자운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 손 끝에 얇은 막이 생기더니 이내 날카로운 검결지가 흐른다.
중지에 검결지를 형성한 자운이 내단을 반으로 잘랐다.
주황색 구슬과 같은 내단이 자운의 검결지에 천천히 잘려나간다. 제아무리 양기의 집합체인 내단이라고는 하지만, 자운의 검결지를 버텨내지는 못했다.
치이이익?
잘려 나가는 중에 연기가 뿜어졌다. 두 개의 극양의 기운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현상. 마침내 내단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지자 자운이 그중 절반을 운산에게로, 절반은 우천에게로 내밀었다.
“지금 특별한 일이 없으면 먹어버렸으면 하는데?”
“이 내단을 말인가요?”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너네가 먹어야지, 그럼 내가 먹을까?”
“대사형께서 드시는 게 몸을 회복하는 데 더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