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허억! 허억! 사제, 허억! 괜찮나?”
운산의 말에 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후욱! 후욱! 괜찮습니다.”
피가 많이 나기는 했으나 뼈가 상한 것은 아니었다. 운이 좋게도 적발라의 공격은 정확하게 뼈 아래를 관통한 것이다.
근육이 끊어지기는 했지만, 영영 팔을 쓰지 못하게 될 정도는 아니었다.
운산이 안도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파인들이 적발라의 죽음에 당황한 표정으로 운산과 우천을 바라고보 있었다.
지금에야 그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지만, 곧 운산과 우천이 지쳤음을 알고 공격을 계속 할 것이다.
그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허장성세.’
운산이 단내가 날 정도로 지친 입안을 간신히 침을 모아 축였다. 그리고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려 들이쉰 숨과 함께 폐부 깊은 곳까지 보냈다.
동시에 우천을 부축한다.
그가 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검강이 타오르며 바닥을 갈랐다.
쩌저적?
더 이상 검강을 피우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의 내공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산이 폐부 깊숙이 들어간 내력을 숨과 함께 끌어내었다.
“비켜라! 다 베어버리겠다!”
땅이 갈라질 정도의 검강을 떨쳐 보이며 소리치자, 놈들이 허세인 것을 느끼면서도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저 정도의 강기를 한 번만 더 날린다고 하면, 딱 한 번만 더 날릴 수 있다고 해도 죽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먼저 뛰어나가 주기를 원하면서도 그 누군가가 자신이 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운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져나갈 틈은 지금뿐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운산이 막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짝?
허공중에 박수 소리가 울린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적지 않은 내력을 운산은 느낄 수 있었다.
비단 운산만이 느낀 것이 아니다. 우천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 속에 있는 내력을 느꼈다.
운산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이는 붉은 경장 차림의 노인이었다. 길게 길어 내린 수염이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노인, 노인이 손바닥을 치며 운산과 우천을 향해 걸어왔다.
짝짝짝?
“허허허, 적발라가 왜 죽었나 했더니 자네들의 무위가 생각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로군. 대단한 실력일세.”
노인은 운산과 우천을 추켜세우는 것이 분명했으나, 그들은 칭찬을 칭찬으로 받지 못했다.
노인의 몸에서 풍겨지는 기세가 피부 위로 따끔거리게 내려앉은 것이다.
노인의 존재감은 따로 겨뤄보지 않아도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운산이 긴장을 유지한 채로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말에 노인이 빙긋 웃는다. 자애로운 이웃의 노인 같은 인상이나, 왠지 모르게 그 속에 조소가 담겨져 있다고 느껴진다.
“글쎄…누구였으면 하는가. 달리 원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인가?”
“우문현답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달리 선문답을 할 생각도 없습니다. 질문을 바꿔 하겠습니다. 당신은 적성의 사람입니까?”
운산의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적이라고 한다네.”
육적!
일성을 제외하고서 적성에서 가장 강한 이들을 뽑아보라면 칠적이다. 그중 서열 여섯째에 위치하고 있는 이가 육적인 것이다. 운산이 육적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달리 궁금한 것이 있는가?”
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자신과 육적을 포위하고 있는 사파인들에게로 향한다.
“이들은 적서의 사람입니까?”
육적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하수들은 적성에 필요없네. 하여 우리 식구라고 할 수는 없겠군.”
그렇다면 이 많은 사파인들을 도대체 어떻게 동원했다는 말인가?
운산이 묻기도 전에 육적이 먼저 답했다.
“다만 삼적의 장기말인 것은 분명하네.”
삼적, 칠적 중 서열 세 번째에 위치한 사람. 그 사람의 장기 말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선문답을 하려는 것은 아니라 했으니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삼적은 사파의 지존이라네.”
“갈무혁!!”
듣고만 있던 우천이 그의 이름을 크게 소리쳤다. 우천의 외침에 육적은 정말로 잘 맞히었다는 듯 기분 좋게 껄껄거리며 웃었다.
물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잘 알고 있구만. 바로 그일세. 이들은 그의 장기말이지.”
“갈무혁이 적성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오?”
운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사파의 지존이라 하면 상당히 자존심이 강할 것인데, 그런 사람이 왜 하필이면 적성으로 들어갔다는 말인가?
운산의 말에 육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인다.
“아닐세. 그는 태어날 때부터 적성의 사람이었네. 그저 장기말이 필요했기에 사파의 지존이 되었을 뿐. 그보다 지금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것 같군.”
앞에는 육적이요, 사방에는 그들의 목에 걸린 돈을 탐내는 사파인들이다. 일촉즉발의 상황. 운산과 우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육적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것이 누구인데 태연자약하게 그런 말을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내 자네들이 살 수 있는 길을 하나 제시하고자 하나.”
“그것이 무엇이오?”
운산의 물음에 육적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꾹꾹 눌렀다.
“간단한 일일세. 나의 제자가 되게. 본래는 자네들을 난신을 유인하는 인질로만 쓰려고 했는데, 자네들의 성장 속도를 보니 생각이 바뀌더군. 허허허. 아니, 탐이 났다고 해야겠군.”
적성의 일곱 절대자, 그들 중 여섯 번째라고 할 수 있는 육적의 제안이다. 누군들 한 번쯤 마음이 기울어질 법한 제안. 하나 운산과 우천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어 거부했다.
“거부하겠소.”
그 말에 육적이 매우 안타깝다는 듯 혀끝을 차더니 운산과 우천을 노려보며 말한다.
“결국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선택하겠다는 것인가?”
“황룡문을 배신하는 것이든 대사형을 유인할 미끼가 되는 것이든 무엇 하나 권주인 것은 없소. 어차피 모두 벌주이니 부러 벌주를 마실 것이라면 배신자라는 낙오를 쓰는 벌주를 마시고 싶지 않았을 뿐이오.”
“배신자라는 낙오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군.”
육적의 시선이 사파인들의 뒤쪽, 저 먼 곳을 향했다. 우천이 황룡문도들을 이끌고 탈출했던 방향이다. 아마 그쪽으로 시선을 계속해서 뻗으면 괘나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황룡문도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문제라면 내 저들을 죽여주지. 증인이 없으니 자네들을 배신자라 부를 이는 없을 걸세.”
“그래도 거부하오.”
“난신이 문제라면 걱정하지 말게. 그는 우리의 손에 죽을 것이 분명하니.”
그 말에 운산과 우천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사형은 절대로 죽지 않소!!”
모든 제안을 거절당한 육적이 운산과 우천을 향해 다가왔다.
“자네들은 결국 인질 이상의 가치는 없었던 것이군. 안타까운 일이네만, 자네들의 결정을 존중하겠네.”
그가 운산과 우천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단순한 움직임이 분명한데, 그들의 몸은 무언가에 묶이기라도 한 듯 움직일 수가 없다.
“이, 이게 대체!!”
그들의 놀람에 육적이 손을 천천히 ㅃ?ㄷ느 ㄴ와중에도 친절하게 답을 해주었다.
“그저 별것 아닌 잔기술에 불과하다네.”
그의 손에서 기류가 화악 일어나더니 운산과 우천의 몸을 끌어당겼다. 흡자결을 이용한 허공섭물의 극의는 사람을 잡아당길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운산과 우천은 딸려가지 않기 위해 갖은 수를 쓰며 버텨보려 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르륵?
그들의 몸이 딸려가기 시작한다.
육적이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내 자네들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주지. 혈을 짚겠네. 자고 일어나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걸세. 허허허.”
운산과 우천이 이를 악물었다.
버티려고 해보아도 도무지 절대의 거력은 버틸 수가 없다.
‘대사형!’
속으로 자운을 울부짖었다.
대사형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조금만 더 버티면 끝나는데!
절망이 치솟았다.
육적의 손가락이 운산의 몸에 닿았다. 단번에 운산의 몸은 추욱 늘어질 것이다.
한순간,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찰나의 정적이 흐르며 그 어떤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고, 그 와중에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분명 육적의 손가락은 운산에게 닿아 있었다. 하지만 단지 닿아 있을 뿐, 그 이후의 행동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손가락은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었다.
육적이 옆을 돌아보자, 용모파기에서 보았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철혈난신 천자운, 그가 육적의 손가락을 움켜쥔 채로 서 있었다.
“개새끼야, 지금까지 즐거웠냐?”
자운이 육적을 집어 던졌다.
제6장 요거나 먹어라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육적은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손가락 마디가 자운에게 잡힌 채로 허공을 향해 휘둘러졌기 때문에, 그에게 잡힌 중지는 보기 흉측할 정도로 뼈가 어긋나 있었다.
“허허허.”
허공중에서 허허로운 웃음이 들렸다 육적이 실 끊어진 추 마냥 힘없이 날아가다가 허공에서 몸을 회전했다. 몇 번 회전 하던 그이 몸이 가볍게 바닥 위로 내려선다.
흡사 무당의 제운종(梯雲縱)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모두의 눈에 육적이 자운에게 내팽개쳐진 모습이 각인되었다. 수군거림이 흘러나왔다.
“철혈난신…….”
육적이 이전과 같이 허허로운 웃음소리는 집어치웠다는 듯 자운을 향해 낮게 으르렁 거렸다.
쐐애액!
자운이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팔로 운산과 우천의 머리를 눌러 자세를 낮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 위로 검이 지나갔다.
강기가 넘실거리는 검, 이기어검이 분명했다.
자운의 머리카락 몇 개가 잘려 허공에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자운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노렸던 어검을 흘깃 보더니 다시 몸을 돌려 운산과 우천을 바라보았다.
“이그, 이 손이 많이 가는 꼬맹이들아,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라.”
말을 하며 자운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퍼엉?
다번에 공기가 터져 나가며 힘이 질주했다. 엄청난 장력이 사파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지금까지 황룡문도들을 괴롭혔던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자운의 손속에는 거침이 없었다.
사파인들의 육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피가 튀었다. 일장에 사파인 사이로 강제로 길이 벌어졌다.
자운이 그 길을 향해 턱짓을 했다.
“최대한 멀리 가라. 나머지 이야기는 그 후에 듣도록 하자.”
운산과 우천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들의 대사형이 절대의 고수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적지 한복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