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나는 괜찮다. 그냥 조금 욱신거릴 뿐이지. 사제는 괜찮은가?”
운산의 말에 우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아마 대사형이 있었으면 엄살 부리지 말라고 뒤통수를 때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운산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운이라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그렇지. 사형이 있었으면 냅다 대갈통을 후려갈겼겠지. 이렇게 말이야.”
뻐억?
장난스럽게 운산이 우천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우천의 머리가 앞으로 뻑 하고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맞은 자리가 지끈거리는지 우천이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으악! 때리는 힘을 보니 앞으로 한 사흘은 더 싸워도 되겠습니다.”
운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당장에라도 그들의 대사형이라 할 수 있는 자운이 ‘무슨 지랄을 하고 있는 거야!’ 라고 호통을 치며 허공답보로 날아올 듯하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전서구가 아무리 빨리 날아간다 하더라도 지금쯤 도착했을 것이다.
그의 사형이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친다 하더라도 섬서에서 천산까지는 사흘 정도 거리. 앞으로 사흘은 더 버텨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우천이 한 말도 전혀 틀린 것은 없었다.
운산이 우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 사흘은 더 죽어라 싸워야겠구나.”
아직 전장은 끝나지 않았다.
운산과 우천이 예상한 대로 그들이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을 무렵 천산설곡에 전서구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단번에 자운에게로 전달되었다. 본래 전서구라 하면 몇 단계의 절차를 걸쳐 곡의 간부, 혹은 곡주에게 전해지는 것이 절차였으나 자운은 설곡의 사람도 아닐뿐더러 사안이 사안인만큼 대부분의 과정이 생략되거나 간소화되어 빠르게 자운의 손에 전해졌다.
쾅!
자운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그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고 순수한 주먹으로 내려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탁자가 부서졌다.
하나 자운은 그런 탁자 따위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니, 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손으로 전해진 서신 한 장에 모조리 집중되어 있었다.
그답지 않게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그가 서신을 가지고 온 설곡의 인물을 향해 단번에 내달렸다.
그의 손이 내뻗어진다.
쾅?
벽이 한차례 흔들리며 자운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쥔 채로 벽을 들이박았다. 물론 지금 황룡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이 사람이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순간적인 분노가 그의 몸속을 헤집었다.
“지금 이 안에 있는 말이 모두 진실인가?”
“캐, 캐액! 이, 이걸 놓아주셔야…….”
하나 자운의 손은 놓아주기는커녕 더욱 강하게 힘을 줬다.
“말해!”
눈에서는 타는 듯한 안광이 뿜어지고, 그 안광에 질식할 듯 꿈틀거리던 사내는 곧 캑캑거리면서도 자신이 아는 바를 꺼냈다.
“캐액! 저는 단지 서신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쿨럭쿨럭! 천산에서 섬서까지의 거리가 워낙 먼 터라 지금 당장 진실을…쿨럭!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캐액!”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목을 움켜쥐고 있던 자운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사내를 놓아준 자운이 벌컥 방문을 열었다. 단번에 천산설곡 밖으로 뛰어나간다.
‘지금 당장 황룡문으로 돌아가야겠다.’
자운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진 듯 사라졌다.
* * *
어둠이 내렸다.
진하게 깔린 어둠이 사방에 내렸으나 황룡문 밖에서 타오르는 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상당히 많은 수의 사도인들이 황룡문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사황성의 깃발이 휘날리고, 삼적과 육적도 모습을 드러내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은 바로 황룡문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황룡문은 지금 삼적과 육적이 조금만 힘을 쓴다면 대번에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왜 저들을 단번에 죽이지 않는 거지?”
삼적이 불편한 기세를 숨기지 못하고 육적을 향해 물었다. 그의 등에는 거대한 구구도가 메어져 있었는데 구구도의 톱날이 붉은색으로 번득이는 것이 요사스럽게 보인다.
삼적의 말에 육적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아닐세. 만에 하나 우리가 황룡문을 밀어버린 후에 놈이 화가 나서 달려오면 다행이지만, 놈이 오지 않는다면 어쩔 텐가?”
“도망을 간다는 말인가?”
삼적의 말에 육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지. 놈이 정면에서 나오지 않고 도망을 가서 암암리에 우리의 대계를 방해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니 놈이 올 때까지 저놈들은 인질처럼 이곳에 핍박받으며 있어야 하네.”
그 말에 삼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육적이 사람을 불러 물었다.
“내부의 상황은 어떻다고 하는가?”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다고 합니다. 낮에 이어진 전투로 인해 그들은 지금 기력을 회복하고 있는 듯합니다.”
육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내일 동이 트는 대로 백 명의 무사를 황룡문으로 투입한다.”
“존명!!”
어둠이 깊게 깔린 것은 황룡문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수백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외부와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소리가 거의 없이 조용하다.
우천이 운산을 향해 다가갔다.
“언제까지 버티고 있어야만 하는 겁니까, 사형?”
그 말에 운산이 고개를 들어 우천을 바라보았다.
“그럼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우산의 눈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은 우천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황룡문의 문도 모두의 눈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벌써 사흘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싸워왔다. 그러니 지치지 않을 리가 없다.
놈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수백의 병력을 두고서도 딱 죽지 않을 정도의 인원만 투입해서 그들을 괴롭힌다.
이유가 무엇일까?
피를 말려 죽이려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저들의 우두머리가 아닌 이상, 그들의 생각을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운산의 물음에 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는다 해도 별반 변하는 것은 없다.
“저들은 당장에 우리들을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는 우천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놈들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데, 지금 당장 운산과 우천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저들이 당장에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어. 싸우다 죽으나 지쳐서 죽으나 별 차이는 없을 거야. 저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니까.”
운산의 말에 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는 겁니다.”
“역으로?”
“앞으로 이틀 정도 후면, 아니, 조금 있으면 동이 틀 테니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만 더 버티면 대사형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개방과 화산에 요청한 지원군 역시 그때쯤이면 올 것입니다.”
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우리가 이곳을 뚫고 나가는 겁니다.”
운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제, 사제는 지금 문을 버리자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적은 수로 어떻게 저 많은 이들을 뚫고 나간다는 말이지?”
운산의 목소리가 커졌으나 우천의 눈은 침착하기 그지없다.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아니던가.
“그 생각을 역으로 이용하자는 겁니다.”
침착한 우천의 눈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생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운산이 우천의 눈을 바로 마주 보며 물었다.
“말해봐.”
말을 하며 운산이 다시 자리에 걸터앉는다. 온몸 어느 곳 하나 쑤시지 않는 곳이 없다. 자잘하게 입은 상처가 적지 않았다.
확실히 이대로 버티는 것도 무리에 가까운 일이다.
“황룡문의 건물은 포기합니다. 건물은 새로 지으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죽으면 어찌합니까. 저들은 우리 황룡문의 문도들입니다.”
우천의 말이 끝나고 운산이 천천히 문도들을 돌아보았다.
그렇다.
본래는 낭인에 가까운 이들이었으나, 지금은 황룡문의 문도이다.
황룡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가족과 같은 이들이라는 말이다.
황룡문의 문파 건물과 문도의 목숨을 놓고 저울질하라고 한다면 살려야 할 것은 문도의 목숨이 분명했다.
운산이 납득하는 듯하자 우천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저들은 방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수가 월등히 많으니 불리한 우리가 기습을 해올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확실히 그랬다. 수가 족히 열 배는 차이가 나는데 기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저들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역으로 기습을 하자?”
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위망이 약한 쪽으로 기습을 하는 겁니다.”
운산이 눈을 감았다. 중대한 결정이다. 그는 이제 황룡문의 문주. 이 상황에서 자칫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가는 황룡문문도 전체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수가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다경 정도를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운산이 눈을 떴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나 혼자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큰 사안인 것 같네.”
“그럼?”
우천의 말에 운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쩌긴 뭘 어째. 문도들한테 물어보고 결정해야지.”
황룡문의 문도들은 대부분 우천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들 역시 하루하루 지쳐 가는 터였다. 언제까지 참고 있을 수도 없고,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에서 나온 도박과도 같은 타개책.
적은 확률이라고는 하나 가망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태원삼객이 우천의 말에 동의했다.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대로 있는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태상호법께서 돌아오셨을 때도 저희가 적진 한가운데 있는 것보다는 외곽으로 벗어나 있는 것이 전투에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다른 이들의 의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당할 바에는 밖으로 나가 그들과 싸우자는 의견이었다.
문도들의 의견을 모두 들은 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힘들 수도 있고 심하게 다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약속합니다.”
운산이 황룡문도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보았다.
피곤에 지친 기색이 얼굴 가득 묻어나고 있었으나, 그들의 눈에 담긴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꼭 살아서 탈출하도록 합시다.”
황룡문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옛, 문주님!”
운산이 몸을 휙 돌렸다.
“해가 트기 직전 포위망이 가장 얇은 곳을 공격해 속전속결로 빠져나갑니다. 그때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