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호룡과 패룡이 그 힘을 받고 연달아 울음을 길게 터뜨린다.
우우우우우?
그 두 마리 용을 바라보며 자운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끝까지 가보자!!”
그의 앞에는 아직도 눈의 파도가 십여 개도 넘게 남아 있었다.
거친 눈 속을 헤치고 나온 자운이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뒤로는 눈에 쓸려 내려가 버린 천산의 어느 봉우리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정상인 것이 없다. 바위는 눈에 휩쓸려 뿌리째로 뽑혀 나온 것도 있었고, 나무는 뒤집어져 뿌리가 하늘로 향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길게 피가 이어져 있었다.
자운의 왼팔에서 뿜어진 피였다.
아무리 자운이라고 할지라도 자연재해라 할 수 있는 눈사태 속에서 온전한 것은 무리였다.
부러진 왼팔이 길게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다.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 자운이 이를 으득 악물었다.
그는 입고 있는 옷을 찢어 지혈과 동시에 붕대처럼 칭칭 감았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방법이 최선이다.
자운이 헉헉거리는 숨을 조금이나마 고른 후에 방향을 잡았다.
그가 향하는 곳, 천산설곡이 있는 방향이었다.
* * *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자운을 보고 설혜와 설곡의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자운 정도 되는 고수가 온몸이 넝마가 된 채로 돌아오자 적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던 것이다.
현재 무림에는 적성이라는 단체가 흉명을 떨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자운을 저리 만들 수 있는 이들이 적성에는 아직 무려 여섯이나 남아 있었다.
둘이 자운의 손에 생을 마감하기는 하였으나, 철적이 아직 다섯이나 남았다.
또한 적성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일성이라면 자운과 능히 만여 합을 겨룰 만한 이다.
그런 적성이 찬산설곡의 근처까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곡의 사람들이 긴장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자운이 어색하게 웃으며 뱉어 놓은 말 때문이었다.
“눈사태에 휩쓸려 죽을 뻔했네. 혹시 몸에 좋은 약 있어? 있으면 좀 가지고 와.”
긴장을 여지없이 탁 풀어버리는 자운의 말에 설곡 사람들이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설혜만은 예외였다.
설혜는 적성이 쳐들어오든 말든 상관이 없다. 칠적 정도라면 그녀 혼자서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그녀 역시 절대의 반열에 오른 고수가 아니던가?
지금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길게 찢어져 피로 축축하게 적셔져 있는 자운의 왼팔이었다.
그녀는 일전에 자운의 왼팔이 부러졌던 사실을 알고 있다. 근데 그 팔의 뼈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녀가 자운의 왼팔을 잡으며 말했다.
“피. 나.”
한 글자씩 뚝뚝 끊는 설혜의 말. 얼핏 들으면 무감각해 보일 수 있는 말이었으나, 오랜 시간 설혜를 알아온 자운은 그 속에 담긴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운이 온전한 손으로 설혜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죽을 정도로 아픈 거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설혜가 자운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자운이 죽어라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그렇게 꽉 쥐니까 죽을 만큼 아파! 아프니까 좀 약이라도 가져와 봐. 좋은 거, 좋은 약? 비싼 약으로 가져와 봐!”
자운이 비명을 내지르며 소리친다. 설혜가 당장에 뒤를 돌아보았다.
천산설곡의 부곡주인 유월이 설혜의 눈빛을 받고는 사람을 불렀다.
의원이든 약이든 무언가를 불러오거나 데려오라고 한 것은 분명했다.
유월의 명을 받은 사람이 움직이자 자운이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하늘과 가까운 천산의 대지가 느껴진다.
차갑기 그지없는 눈의 대지, 자운이 큰 대(大) 자로 뻗으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죽겠다.”
정말로 ㄴ온 삭신이 쑤시는 게 죽을 만큼 아팠다.
“나도 늙었는가 보다.”
옆에서 지켜보던 설혜가 다른 이에게는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이백스물아홉 살.”
자운이 맞받아쳤다.
“시끄러, 할망구야!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설혜가 발끝으로 자운의 왼팔을 꾸욱 눌렀다.
“으아아악! 피, 피 난다! 그러지 마라!!”
먼저 뼈가 보일 정도로 파인 상처를 지혈하고 약을 발랐다. 그리고는 상처가 어긋나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고, 부러진 뼈가 채 아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고정하기 위한 부목을 댔다.
그리고 깨끗한 천으로 둘둘 감자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물론 시큰거리는 고통만은 가신 것이 아니라서 무리하게 움직이면 욱신거리기는 했다. 하지만 치료를 하지 않은 것에 비해서는 훨씬 편했다.
자운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살겠다.”
자운의 맞은편에는 설혜가 자운의 왼팔을 계속해서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다행히 기관을 통과하고 나와 천산설곡의 곡주로 인정을 받은 모양이다. 자운이 피식 웃었다.
“누구는 문파 부흥시킨다고 죽어라 뛰어다녔는데, 누구는 한 방에 성공하네. 아이고, 서러워라.”
그 말에 설혜가 답했다.
“평소. 말 곱게 써. 하늘. 벌주는 거야.”
“생각보다 그렇게 지은 죄 많이 없거든. 입이 걸걸하긴 하지만 그건 내 종 특성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해 달라고.”
살 만한지 자운의 농을 던졌다. 그러며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을 자신의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가슴팍으로 쑤욱 손을 밀어 넣은 자운이 품속에서 털 뭉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털 뭉치가 아니다.
털가죽으로 싸여 있는 빙정이었다.
자운이 천천히 털가죽을 풀었다. 빙정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주변에 차가운 기운이 퍼졌다.
자운이 툭 빙정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쩌저적?
가볍게 살얼음이 내려앉는 탁자 위. 꺼내놓은 것만으로도 주변의 온도가 내려갈 정도로 차가운 빙정을 설혜가 바라보았다.
“빙정?”
자운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천 년 자연산 알짜배기 빙정이다.”
“주는 거야?”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있어봐야 필요도 없거든. 먹지도 못하는 거, 팔아서 땡처리 할 수도 있지만, 빙정을 사가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빙공을 익힌 곳밖에 더 있겠냐. 지금 빙공 익힌 곳 중에서 이 정도 크기의 빙정을 사갈 재력이 있는 문파는 없지. 천산설곡은 내가 재력을 잘 모르니 뭐라 말 못하겠다만.”
설혜가 그것을 넙죽 받아 챙겼다.
“받을게. 어떻게?”
“어떻게 구했냐고?”
자운이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어떻게 구했냐고 물어보면 이것 말고는 해줄 이야기가 없다.
“얼떨결에 주웠어.”
“……?”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신이 빙정을 찾기 위해 온 천산을 쏘다닌 것도 아닐뿐더러, 영물과 함께 발견한 것인데 영물을 죽인 후에 함께 가지고 온 것뿐이었다.
말을 하자면, 꿩을 잡아 배를 갈랐더니 그 안에 알이 들어있는 것과 별 차이 없는 일인 것이다.
자운이 거기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거 줍고 나서 대전연과 혈투를 벌였지.”
더 이상 오가는 말은 없었다.
제3장 아니, 내가 이겨
“후욱! 후욱!”
우천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오주야 째 이어지는 격전은 그야말로 온몸에 힘이 빠지게 만들었다.
육 일이라는 시간 동안 재대로 잠들었던 적도 없다. 그의 옆에서는 황룡문의 문주라고 할 수 있는 운산이 서 있었고, 그 뒤로는 적습을 막아내느라 지친 황룡문의 문도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육 일 전이었다.
주변의 흑도 문파가 황룡문에 검을 들이민 것이다.
사실 규모가 이전에 비해서 상당히 거대해진 황룡문에서 흑도 문파 하나둘 막아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이전에 비해서 사람 수도 늘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고수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가릴 수는 없다고 하던가?
황룡문에 검을 들이민 흑도 문파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흑도 문파가 규합하여 황룡문을 향해 검을 뽑아 든 것이다. 개중에는 검기를 구사할 정도의 고수도 있었다.
그 이상의 고수들은 없는 것인지 나서지 않는 것인지 모습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 정도만 된다 하더라도 자운이 없는 황룡문에는 충분히 위협적인 실력이었다.
운산이 살아남은 제자들을 향해 외쳤다.
“천산설곡에 전서구를 보냈습니다! 아마 조만간 대사형께서 돌아오실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도록 합시다!”
그렇게 외치기는 했는데, 당장에 또 몰려오는 적들이 문제다.
이번에 몰려오는 이들의 숫자는 약 쉰 정도. 운산이 제자들의 숫자를 확인했다.
아직 여든 명 정도가 살아남아 있기는 하지만, 저들과 충돌한 후에는 또 몇 명이나 남아 있을지 알 수 없다.
누군가가 황룡문의 담을 넘었다.
경신술로 담벽을 박차고 날아오른 것이다. 운산이 놈을 향해 튀어나갔다.
자룡천보행이 펼쳐졌다.
사방의 기운이 운산의 아래에 모여든다. 그가 온몸의 내공을 폭발시켰다.
그의 눈으로 강력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검이 연달아 허공을 갈랐다.
파바밧?
허공 갈라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며 검격이 뿌려진다.
슈우우?
날아든 검풍이 단번에 담벼락을 타고 넘은 이를 향했다.
푸확?
피가 사방으로 뿌려지고, 놈이 세 조각으로 썰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육 일에 달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싸움을 거치면서 운산의 검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것은 운산만이 아니었다.
우천의 검 역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매서운 검기가 검 위에서 꿈틀거렸다.
황룡검탄을 날리려는 것인데, 실력이 모자라 강기를 구현할 수 없으니 검기로 대체했다.
꿈틀거리는 검기가 우천의 검에서 쏘아진다.
쐐애액?
단번에 날아든 검기는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적의 심장을 꿰뚫었다.
적이 죽은 것은 확인도 하지 않고 우천과 운산이 내달렸다.
“우아아아아악!”
황룡문의 문도들이 악을 쓰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어떻게 되든 자운이 돌아올 때까지는 버텨야 하는 것이다.
운산이 적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종횡무진 베고 때론 피하기도 하며 적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파앙?
운산의 검이 튕겨져 나왔다.
검이 회전을 거듭하며 다시 운산의 앞으로 돌아왔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운산은 자신의 검을 막아낸 이를 확인했다.
기다란 창을 사용하는 인물이었는데, 입가에는 세로로 쭈욱 찢어진 흉측한 상처가 난 이다.
그가 가래가 끓어오르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으흐흐, 황금 다섯 냥짜리 목이군.”
운산이 흠칫한다. 흑도 문파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목에 상금까지 걸면서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운산이 이를 으득 악물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자운이 떠올랐다. 자운이라면 어떻게 할까?
‘대사형이라면…….’
아마도 이죽거릴 것이다.
“내 목에 고작 황금 다섯 냥이라니, 너무 싼 거 아냐?”
괜히 없는 여유도 있는 척 과대 포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