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룡난신-78화 (78/175)

# 78

오히려 필생의 의지로 조금씩 더 빨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피로에 전 몸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이야 무지막지한 내력으로 피로를 억누르고 있지만, 언제 피로가 몸을 잠식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는 것이 먼저다.

눈사태는 계속해서 내려오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쓸어버리며 힘을 불렸다.

하여 지금은 그 크기가 처음 자운의 눈에 띄었을 때보다 족히 배는 커진 상황이었다.

“걸음아, 내 다리야, 제발 나를 좀 살려다오!”

자운이 말이 통할 리가 없는 자신의 다리를 향해 애원했다.

두 다리로 달리다 못해 한 팔을 이용해 바닥을 때리기까지 하니 그 모습은 마치 세 발 달린 짐승이 부리나케 달리는 듯 했다.

다른 한 팔은 부러진 상황이라 안타깝게도 어찌하지 못했다.

거대한 눈덩이 하나가 자운의 몸을 향해 날아왔다.

자운이 급하게 몸을 틀어 움직였다.

“크으.”

자운이 신음을 흘렸다. 눈이 차가운 것은 둘째치더라도 눈뭉치 주제에 장난이 아니게 아팠다.

자운이 두 다리와 팔을 향해 공력을 밀어 넣었다.

그의 몸이 껑충껑충 난다.

허공답보를 펼치면 잠시간은 눈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무한정으로 허공답보를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한 오랜 시간 펼치게 되면 내공의 고갈이 더욱 빨라지게 된다.

그 상황에서 추락이라도 하게 되어 눈사태에 휩쓸리면 답도 없게 되는 것이다.

자운의 몸이 한 번에 일장씩 휙휙 날았다.

하지만 눈사태가 쫓아오는 속도도 그 못지않게 빨랐다.

그의 몸 위로 계속해서 눈뭉치가 떨어져 내린다.

눈뭉치에 머리도 맞고 몸도 맞고 다리도 맞았다.

머리가 띵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머뭇거리다가는 눈 속에 파묻혀서 얼음 조각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이 자운의 머릿속에 차올랐다.

그러자 몸이 더 빨리 움직였다.

“으다다다다다!”

달리던 자운이 비명을 내질렀다. 뒤를 바라보자 거대한 얼음 절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지간한 바윗덩어리보다 거대한 얼음이 눈사태 속으로 섞여 들었다.

저런 것에 맞는 순간 뼈가 부러지는 정도로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살이 찢어지고 벗겨질 것이 분명했다.

자칫 얼음의 날카로운 부분에 찔리기라도 한다면 얼음 꼬챙이에 꿰어진 고기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자운이 죽어라 땅을 때렸다.

목숨 걸고 내공을 움직이니 수발이 더 빨라졌다.

하지만 눈사태는 그 세를 불려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중이라 속도가 더 빨랐다. 자운의 머리 위로 눈이 떨어져 내리고, 그가 휙휙 몸을 움직여 얼음을 피해내었다.

떨어지는 얼음을 도저히 피하지 못할 것 같으면 무지막지하게 내력을 끌어올려 부숴 버렸다.

쾅?

자운의 손에서 거대한 얼음이 박살이 난다.

“제기랄! 빌어먹을! 시발! 개자식!! 히익!”

자운의 입에서 온갖 욕이 다 튀어나왔다. 침을 튀며 욕을 하는 자운이 기겁을 하며 뛰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서있던 자리로 거대한 얼음이 박혀들었다. 일단 하늘로 솟구쳐 위협을 피해내었지만 그뿐이다. 안타깝게도 그 이상은 없었다.

그의 몸이 다시 추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운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허공답보를 써야하나?’

하지만 그러면 내공 소모가 너무 심하다.

일단은 경신술을 펼쳐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체공 시간이 늘어나며 떨어지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줄어들었다.

몸이 연처럼 가벼워지자 자운이 바람을 탔다.

허공답보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는 못한다.

그의 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 그 이유다.

결국 자운의 몸이 빠르게 흘러내리는 눈더미 위로 떨어져 내렸다.

몸이 흐르는 눈 위에 닿는 순간, 자운이 빠르게 발을 굴렀다. 엄청난 내력으로 인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이 튕겨져 나갔다.

튕겨져 나간 것은 비단 눈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 역시 튕겨져 나간다.

눈이 먼지구름처럼 솟아오르고, 반탄력으로 허공으로 뛰어오른 자운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 젠장! 정말 지지리도 운수가 좋구나!’

물론 현재 상황에 대한 반어법이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자운은 지금 이 상황에도 빈정거리고 있었다.

‘내가 자연경에 오르기만 했어도 이따위 눈은 전부 내가 지휘하는 건데.’

그럴 리 없는 생각을 자운이 푸념하듯 내뱉었다. 자연경이라니, 그 따위는 들어보지도 못한 우주적 경지 아닌가?

그야말로 천하제일, 우주무적의 경지.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실현이 불가능한, 소설 속에도 나오지 않는 경지가 자연경이다.

“에잇, 집어치워!”

지금은 일단 이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숱하게 위기를 넘겼다. 숨을 쉬듯 위기가 찾아오고 물러갔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아니, 자운이 아니었다면 이미 몸이 수십 번은 더 눈 속에 파묻혔을 것이고, 수백 번은 더 얼음조각에 몸이 난도질되었을 것이다.

하나 그는 자운이었다.

절대고수 자운은 이런 곳에서 죽을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쏟아지는 눈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실수로라도 휩쓸리면 끝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자운이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했다. 온몸을 타고 긴장감이 흐르는 바람에 기혈과 혈관이 모두 터져 버릴 듯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아이고, 죽겠다.’

푸념을 해도 변하지 않는 상황이 정말로 짜증나기 그지없다.

내공을 다시 왼다리에 집중시켰다.

눈은 계속해서 밀려 내려오며 미친 듯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이리저리 산의 지형에 휩쓸리며 그 모양이 괴기하게 변해간다. 종국에는 이게 눈사태인지 눈 소용돌이인지 알 수 없는 모양으로 눈이 쓸려 내려갔다.

“하아, 죽겠네.”

자운이 몸을 날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몸을 잠시나마 쉬게 할 곳이 있다면 호흡이라도 고를 텐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한참 몸을 튕기며 이리저리 살피던 그의 눈에 조금은 평평해 보여 올라탈 수 있을 것만 같은 얼음 조각이 들어왔다.

물론 얼음 조각의 특성상 매우 미끄럽기 그지없어 올라타는 것은 위험했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자운의 몸이 솟구쳤다.

훌쩍 날아오른 자운의 두 다리에 기운이 단단히 모인다.

세밀하게 조절해야 한다.

너무 과하면 발판이 되어야 할 얼음이 박살 날 것이고, 부서족하면 얼음에서 미끄러질 것이다. 두 다리가 단단히 얼음 속을 파고들 정도만 되면 충분했다.

쿵?

자운이 얼음위에 내려섰다.

“됐다!”

자운이 쾌재를 불렀다.

두 다리가 선명한 족적을 남기며 얼음을 파고든 것이다. 단단히 고정된 다를 보며 자운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자세로 자운이 쓸려 내려오는 눈사태를 탔다. 마치 거대한 파도 속을 나무판자 하나에 의지해 내려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운이 다리를 틀었다. 두 다리를 틀며 몸을 휙 하고 숙이자 얼음 역시 궤도를 바꾼다.

그리고 얼음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음을 타고 얼음을 움직여 흘러내리는 눈 위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 시발!”

숨을 고르던 자운이 다시 욕을 내뱉었다.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눈의 파도가 자운을 당장에라도 집어삼킬 듯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운이 욕설과 함께 얼음에서 두 다리를 뺏다.

쾅?

자운의 발이 빠져나오자 얼음은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거기에는 미련도 없다는 듯 자운이 몸을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얼음 조각에 부러진 왼팔이 긁히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아아아, 젠장! 이 박복한 놈아!”

자운은 현재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푸념했다.

이백 년 만에 죽지도 않고 살아났다 싶었는데 이 자리에서 죽는 건 아닌지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자운이 단전을 자극했다.

내공을 끌어올리려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내공의 호수, 기의 바다 속에 사는 용을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자운의 부름을 받은 두 마리의 황룡이 울었다.

우우우우우?

불쑥 치솟는 황룡, 두 마리의 황룡이 자운의 몸을 휘감는다.

호룡과 패룡이 각기 울음을 터뜨렸다.

자운이 패룡을 움직였다.

콰우우우?

이름처럼 호전적인 울음을 터뜨린 패룡이 긴 몸뚱어리를 꿈틀거리며 눈의 파도를 향해 질주했다.

단번에 눈의 파도를 씹어 먹을 듯 아가리를 벌리는 패룡. 자운이 패룡을 향해 보내는 기운을 더욱 높인 후에 단단하게 호룡으로 몸을 감쌌다.

“자연이라고 해도 넘어주마!!”

호기로운 자운의 외침과 함께 패룡과 눈사태가 충돌했다.

눈의 파도가 한순간 출렁하고 움직이며 자운의 몸이 호룡과 함께 움직였다.

출렁한 틈을 타 단단한 호룡으로 몸을 휘감은 자운이 육탄으로 눈사태에 부딪쳐 나갔다.

쾅?

눈사태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 속으로 자운이 빠져나왔다. 이제 하나 빠져나왔다. 아직도 눈의 파도는 셀 수 없이 많이 남아 있다.

“계속 끝까지 한번 가보자!”

마음을 급하게 먹어서 될 것은 없다. 계속해서 눈을 피해서 도망치기만 한다면 천산의 가장 아래쪽까지 내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는 온 힘을 다해 눈사태를 견뎌내겠다.

자운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밀려 내려오는 눈 사이로 다리를 박아 넣었다.

눈의 압력이 강해 천근추의 수법을 펼쳐 휩쓸려 내려가지 않게 단단히 곶ㅇ했다.

그의 두 눈에 또 다른 눈의 파도가 비추어졌다.

호룡과 패룡이 주인의 신호라도 받은 듯 자세를 잡았다.

호룡은 마치 갑옷처럼 자운의 몸을 줄줄이 휘감았고, 패룡이 울음을 터뜨리며 눈의 파도와 부딪쳤다.

쾅?

한 번.

이번의 파도는 이전보다 더욱 거대한 듯 한번으로는 뚫리지 않는다.

“한 번으로 안 된다면!!”

계속해서 후려치면 그만이다! 한번으로 안 되면 열 번, 열 번으로 안 되면 백 번이고 후려친다!

패룡이 계속해서 몸을 들이박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이 들썩이고, 세 번째의 충돌에서 눈 벽에 구멍이 났다. 자운이 경신술과 보법을 동시에 뿌려대며 그 사이를 넘었다.

얼음 조각들이 자운을 때렸으나 금강불괴에 비견된다는 호룡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젠장! 하니까 되네!”

문제가 있다면 내공 소모가 기하급수적이라는 사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이 잡혔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대사형이 남긴 무공과 스승의 무덤 앞에서 약속하지 않았던가, 황룡문을 최고로 만들겠다고.

아직 최고가 되지 못했으니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여기서 죽으면 저승에서 영감탱이가 대사형과 함께 비웃을 것이 분명했다.

자운의 입 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뒈질 일도 없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그 꼴은 못 보지.”

어디서 솟구친 것인지 알 수 없는 힘이 자운의 몸속에서 솟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