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공격이 되돌아오는 틈을 타 설혜가 발을 놀렸다. 한 걸음을 움직이고, 두 걸음째 움직이려 할 때 모든 병장기들이 돌아왔다. 설혜가 다시 검영을 일으키며 눈앞에 막을 세워 올렸다.
검막이다.
강기로 펼치는 검막과 병장기들이 연달아 충돌하고, 쇳덩어리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병장기들이 다시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을 움직이려는 순간, 또 다른 기관이 움직였다.
병장기에 이어서 이번에 터져 나온 것은 몸을 에어버릴 듯한 차가운 한기였다.
한기를 실은 바람이 예리한 칼처럼 그녀의 옷을 베고 지나간다.
부우욱―
허벅지 부분의 옷이 찢어지고, 설혜가 온몸으로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그녀의 몸이 얼음에 휩싸인 것처럼 푸른 강기에 휩싸인다.
북해의 호신강기는 강력하다. 대성하면 그 강도는 얼마 전 자운과 싸웠던 칠적의 금강불괴에 필적한 정도였다.
하지만 일장일단이라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몸을 운신하는 속도가 극도로 느려진다는 점이다.
바람이 호신강기를 두드리고, 설혜가 매우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아직 내력의 양은 충분하다.
버티려고 한다면 충분히 더 버틸 수 있었다.
설혜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단단히 지탱했다.
하단에서 끌어올린 힘이 허리를 통해 그녀의 몸 위로 뿜어진다. 바람 속에서 병장기들이 되돌아오고, 호신강기를 단단히 한 설혜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뒤를 스치고 지나가는 병기, 저것은 위험했다.
내력을 많이 사용하면 많이 사용할수록 같은 반탄력이 돌아온다.
그것은 비단 검에 국한된 것만이 아닐 것이다.
어떠한 구조로 움직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호신강기와 같은 반탄력이 돌아온다면 그것은 강기를 하나마나 똑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경공을 밟았다.
호신강기를 이루고 있어서인지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걷는 것보다는 빨랐다.
그녀의 검에 연신 충격이 가해지고, 그녀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를 악물고 나아가는 설혜.
설혜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버텨내야겠어.’
* * *
설혜를 기관 안으로 들여보낸 후 자운은 천산을 이 잡듯 뒤지고 있었다. 본래 천산이라고 하면 이야기 속 영물이 꼭 한 마리는 살고 있는 곳이다.
자운이 찾는 것은 그것이다.
‘사람이 이백 년을 살았는데, 동물이라고 이백 년을 못 살겠어.’
사실 자운이라고 큰 기대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자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영물이 쉬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본래 영물은 거대한 굴 같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다.
‘영물이 안 된다면 영초라도 상관없는데…….’
자운이 입맛을 다셨다. 사실 자운이 영물과 영초를 찾는 이유는 자신이 먹기 위함이 아니다.
이미 자운의 내공은 솟아나는 샘물과 같아 절대고수들과 드잡이라도 하지 않는 한은 바닥날 일이 없다.
자운은 운산과 우천에게 먹이기 위해 영물의 내단이나 영초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본래 이렇게 차가운 지대에 사는 영물 혹은 영초는 딱 두 가지다. 그 주변의 지기를 흡수하여 같은 냉기를 띠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화기를 띄든지.
자운이 찾고 있는 것은 화기를 띄는 영물 혹은 영초였다.
황룡문의 무공은 기본적으로 열양지기를 근간으로 한다.
그렇기에 화기를 포함한 영물의 내단 혹은 영초는 내공 증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자운의 고개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눈에 내공을 집중하여 멀리까지 내다본다.
하나 보이는 것은 새하얀 눈이 뒤덮인 대지뿐, 자운이 혀를 찼다.
“안 보이네.”
허공을 나는 이름 모를 새 몇 마리가 자운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먹을 것이 적은 천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은 동물을 먹어야 한다.
놈들은 자운이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천산의 기운을 견디지 못해 동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자운이 놈들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고 휘둘렀다.
“안 죽어, 이 새대가리들아. 그러니까 꺼져!”
영물, 영초도 안 보이는데 괜히 이상한 놈들이 따라 붙으니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자운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역시 영물과 영초라는 것은 운이 하늘에 닿은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자운이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설혜가 기관 속으로 등러간 지 어언 한 시진이 넘게 흘렀다. 자운이 영물과 영초를 찾아서 천산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한 시진 정도 되었다는 이야기다.
‘잘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애초에 한 시진 뒤져서 영물과 영초를 찾는 것이 조금 웃긴 생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찾아도 안 보인다고 정리를 한 자운이 근처의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다 보니 설곡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오고 말았다. 눈에 반사된 햇살이 자운의 얼굴을 때리고, 그 눈부심에 자운이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이런 곳에 사니까 얼굴이 타는 거지.”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동굴 속에만 있었던 자운의 얼굴은 탈색이라도 된 듯 매우 희다. 이제 조금 혈기가 돌고는 있지만, 아직 살색보다는 흰색에 가까운 편이다.
그런 자운이 자신의 얼굴색과 천산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색을 대조해 보고는 뒤에 있는 이름 모를 침엽수에 몸을 기대었다.
이곳은 천산에 있는 봉우리 중 하나. 무공을 익힌 사람도 오르기가 힘들 정도이니 일반인들이 절대로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자운이 몸을 기대고, 그 순간 침엽수가 흔들린다.
“뭐야?”
자운이 기대었던 허리를 떼고는 침엽수를 천천히 살폈다.
딱히 무언가가 있지는 않은데, 침엽수가 한순간 흔들렸다.
자운이 침엽수를 슬쩍 눌렀다.
“어라?”
침엽수가 밀려난다. 자운의 눈이 반짝하고 뜨였다.
“이거 혹시 말로만 듣던 전대 기인이 만들어둔 장치?”
거기까지 상상하자 기분이 괜히 좋아진 자운이 희희낙락하며 침엽수를 밀었다.
힘을 줘서 밀자 침엽수가 쑤욱 밀리고, 곧 기관이 작동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자운의 귀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그그그긍―
“그럼 그렇지. 이렇게 되어야 똑바로 된 전개지. 역시 옛말에 틀린 이야기 하나 없다더니, 고수가 되려면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천산에서 구르는 수밖에 없다니까.”
언젠가 읽었던 이야기책을 떠올리며 자운이 웃었다.
그 순간, 자운이 앉아 있던 바위가 아래로 쑤욱 꺼진다.
“뭐야, 시발?”
자운의 몸 역시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깊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래. 기관이 이렇게 발동되는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니다.
자운이 두 발에 힘을 주고는 떨어지는 충격에 단단히 대비했다.
‘빌어먹을 바위가, 아래로 꺼질 꺼면 좀 그럴 거라고 알려나 주든가.’
자운이 괜히 이 기관을 만든 사람을 욕했다.
점차 바닥이 보인다.
새하얀 털이라도 깔아둔 듯한 바닥. 자운이 바닥인 것을 대비하고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런데 바닥이 좀 이상하다.
“새하얀 털?”
생각하는 순간, 자운의 발이 그곳에 떨어져 내렸다.
쾅―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출렁하며 자운이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는 그 바닥의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바닥이 아니었어?”
자운이 당황한 얼굴로 전면을 살폈다. 무언가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시발?”
고개를 들어 확인하자 곰도 아니고 뱀도 아닌 요상한 생물이 자운을 노려보고 있다. 자운이 놈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
그런 영물의 뒤로 무언가 새하얀 것이 세차게 회전하고 있었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지 ㅇ낳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예측하건대 이렇게 차가운 지대에서만 생긴 다는 영약의 일종이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눈앞에 있는 이 거대한 곰이었다.
으르렁거리는 곰을 한 번 바라본 자운은 부러진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칠적과의 싸움에서 부러진 팔, 아마도 쓸 수 없을 것이다.
자운이 작게 욕했다.
“빌어먹을 안녕 같은 지랄이라니.”
* * *
“이제 반년도 안 남았지?”
적성의 주인인 일성이 키득키득 웃으며 아래에 부복하고 있는 일적에게 말했다.
일성은 웃고 있으나, 감히 일적으로서는 웃을 수 없다. 방금 전 칠적이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진 탓이다.
일성은 계속해서 키득거리며 웃는다. 아마도 일적에게 답을 요구하는 모양. 일적이 고개를 숙인 채로 씁쓸하게 웃었다.
“예. 이제 그 정도 남았습니다.”
“그렇지. 내가 완전해지기까지 반년도 안 남았다는 말이지.”
일성이 익히고 있는 무공, 그것은 감히 사람의 힘만으로 대성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하늘의 흉성이라는 붉은 별의 도움을 받아야만 이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일성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었다.
지금 일성의 경지는 십일성. 이제 붉은 별이 환하게 빛나는 날, 그 힘을 받는다면 십이성으로 대성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완전무결해진 힘을 얻게 되는 것이 기뻤는지 일성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한 순간, 그의 웃음이 뚝 멈춘다.
동시에 주변으로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물에 푸욱 적셔진 솜마냥 공기가 무겁게 내려서고, 적성이 숙인 고개를 더욱 아래로 숙였다.
“일적, 고개를 들어봐.”
일성의 말에 일적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 표정. 그 표정을 보고 일성이 말했다.
“나는 지금 일적이 웃고 있는지 인상을 쓰고 있는 건지 구별이 안 돼.”
사람의 표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의 목숨을 개미 목숨처럼 안다.
달리 말하기는 일종의 정신병이라고도 하며, 내두불감(內頭不感, 精神病患者:정신병, 사이코패스)이라고도 한다.
적성의 무공은 본래 평범한 이들로서는 절대로 이루지 못할 무공이었다. 내두불감, 그중에서도 가장 천살(天殺)에 가까운 이만이 이룰 수 있는 경지였다.
그리고 일성은 이루어내었다.
“칠적이 죽었다 들었어.”
일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놈의 손에 벌써 둘이나 죽은 거야. 그쪽은 오적의 구역으로 알고 있는데, 오적은 뭘 하고 있는 거지?”
“매화검선과의 전투 이후 내상을 치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일성이 웃었다.
“그래? 그럼 오적이 완치하는 대로 삼적을 움직여.”
그 말에 일적이 놀라 눈을 치켜떴다.
“사황성을 말입니까?”
일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응. 황룡문, 거슬려.”
일성이 계속해서 키득거렸다.
“그러니까 지워 버려.”
사황성주 갈무혁, 그는 칠적의 세 번째 좌(座)인 삼적이었다. 그리고 곧 일성의 명에 따라 사황성의 모든 전력과 두 명의 적(赤)이 황룡문을 향해 움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