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당시 무림에 의해서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했는데 고작 이백 년 만에 과거와 비견될 정도로 성세를 다시 키운 것이다. 그러니 그 저력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 말해봐. 태헌가 뭔가 하는 영감이 쓰러진 거랑 저 양반들이 여기로 찾아온 거랑 무슨 상관인데?]
자운의 말에 걸왕이 침음을 흘리면서도 계속해서 전음을 보내었다.
[하여 놈들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면 놈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철저하게 준비를 하자는 말이 구파의 장문인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흘흘흘.]
자운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연합이라도 하려고?]
자운의 말에 걸왕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치켜뜬다. 자운이 그의 말에 친절하게 답해줬다.
[이백 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그럼 취임식으로 눈을 가린건가?]
걸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백 년을 산 노피물. 머리 회전이 빨랐다.
구파의 장문인들이 모두 한 자리에 이유 없이 모인다면 바로가 아닌 이상 적성의 귀에도 그 사실이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렵지 않게 연합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해서 눈가림용으로 사용된 것이 황룡문이었다. 황룡문에는 절대의 경지에 오른 정파의 고수가 버티고 있다. 그의 위신을 세워준다는 명목으로 구파의 장문인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다.
[흘흘. 아마도 곧 소림 방장이 선배한테 말을 걸 겁니다.]
자운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좀 굴렸군.’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자운과 걸왕의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취임식은 끝물로 치달았다. 취임식 후에 벌이는 것은 연희에 가까운 잔치. 황룡문에서는 그간 준비한 음식을 아낌없이 풀었고, 황룡문에 찾아온 많은 이들이 음식과 반주를 들며 시끌벅적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던 중 아래쪽에 앉은 무림인 하나가 상석에 앉은 설혜를 향해 의문을 표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운산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포권을 취한다.
“산동 제검문(制劍門)의 장로 고덕기라고 합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권을 취해 보이자 운산도 포권을 취하려 했다.
그 순간, 자운의 전음이 운산에게로 향한다.
[넌 문주다. 가볍게 고개만 숙여 보여.]
포권을 취하려던 운산은 자신의 행동을 중간에 뚝 멈추고는 자운의 말대로 고개만을 가볍게 까닥해 보였다. 다소 무례해 보일지도 모르나 문주와 장로의 격차를 생각한다면, 또한 현 황룡문의 위신을 생각한다면 하등 문제가 될 정도를 아니었다.
“황룡문의 문주 검운산입니다. 무슨 연유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운산의 말에 고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이 자운의 옆에 자리하고 있는 설혜를 향한다.
자운과 운산이 앉아 있는 자리는 상석이다. 그와 비슷한 배분에 있는 이라고는 같은 황룡문 소속인 우천과 그 외에 걸왕과 독성 등 무림의 절대자들을 비롯하여 구파의 장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데 그 사이에 얼굴을 알 수 없는 여인이 끼어 있으니 궁금증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상석에 앉아 계신 분들이 무림의 명숙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한데 제 안목이 부족하여 한 분을 잘 알지 못하겠는데 누구신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자신을 지목한 것이 분명한 말에 설혜의 감정 없는 시선이 고덕기를 향했다. 고덕기가 순간 움찔했고, 운산이 설혜에 대해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대신 답한 것은 자운이었다.
“내 친구야.”
고덕기가 그 말에 반문한다.
“철혈난신 천 대협이 무림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절대의 고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한 불철주야 정파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금칠도 정도껏 해. 그렇게 띄어주고 나서 뭘 물어보려고? 이제 그만 물어보려는 거나 직설적으로 꺼내지 그래.”
자운의 직설적인 화법에 고덕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천 대협이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단순히 천 대협의 친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파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구파의 장문인들과 같은 상석에 앉는다는 것은 조금은 과한 처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운이 피식 웃으며 눈앞에 놓인 오리 다리를 찢었다. 그리고는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술잔을 비워낸다.
탁―
주변이 고덕기와 자운의대화로 조용해지는 바람에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커다랗게 들린다.
자운이 입안에 들어간 오리를 우적우적 씹어 삼키는 혼잣말을 꺼내놓듯 입을 열었다.
“물론 내 친우라는 거 하나만으로 상석에 자리하는 것은 과한 처사지. 물론 과한 처사고 말고.”
자운이 자신의 말에 동조하자 고덕기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그런 표정은 곧 자운의 다음 말에 형편없이 뭉개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냥 단순한 친우와 아니라면?”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 여인이 단순한 친우가 아니라 또 뭔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흥미를 유발하는 자운의 말에 많은 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함께 상석에 자리하고 있는 구파의 장문인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젊어 보이는 여성이 자신들과 같은 자리에 있어 신경이 쓰이는 차였는데, 자운이 그녀에 대해서 말하려 하자 집중하는 것이다.
자운이 설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얘, 단순히 내 친우 수준이 아니야.”
황룡문에 모인 모든 무림인들의 시선이 자운을 향해 집중되고, 자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백 년 전 적성과의 싸움에서 사라진 북해빙궁의 마지막 후인이다.”
제4장
자운의 말은 파란을 불러오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북해빙궁이 어떠한 곳인가. 이백 년 전, 정체와 연원을 알 수 없는 단체인 적성에 맞서던 무림 문파가 아닌가. 물론 세외에 있어 정파라 하기는 힘들지만 정도를 지지하는 문파였다.
또한 황룡문과 함께 적성에 맞서던 문파다.
그런 북해빙궁의 후인이 저 여인이라고?
많은 이들의 시선이 설혜를 향했으나 설혜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다. 감정이 거의 없는 듯한 모습. 빙공을 익힌 이들이 대부분 가지는 특성이기도 했다.
독성이 소리쳤다.
“천 호법, 그게 사실인가?”
자운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사실이지.”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혜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자운의 시선을 받은 설혜가 단전을 자극했다. 서늘한 기운이 풍기는가 싶더니 가미 경시하기 힘들 정도의 냉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단번에 술병 속의 속이 얼어버린다. 술잔의 술 역시 얼어버린다.
구파의 장문인들은 내공을 세워 막아내었으나, 그렇지 못한 다른 이들의 수염에는 서리가 내린 것처럼 얼음 알갱이가 쌓여갔다.
단번에 주위를 얼려 버리는 빙공의 위력. 이러한 빙공은 북해의 무공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보일 수 없는 위력이다. 또한 내공을 개방하면 주변의 얼음 알갱이가 눈보라와 같이 휘날리는 것 역시 북해빙궁의 내공심법인 천설적공법(天雪積工法)의 특징 중 하나다.
세상의 그 어떠한 빙공도 기운을 내뿜는 것만으로 주변에 얼음 알갱이가 휘날리게 할 수는 없다.
있다면 단 하나. 천설직공법의 화후가 육성 이상에 이르게 되면 기세를 개방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자연스럽게 얼음 알갱이가 휘날리게 할 수 있다.
구파의 장문인들이 저마다 헛바람을 들이쉬었다.
정말로 그녀가 북해빙궁의 마지막 후인이었던 것. 적성이 태동하고 있는 이때, 북해빙궁의 마지막 후인이 등장한 것은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아미타불, 북해빙궁이 다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림의 흉복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자운이 정확하게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글쎄, 설혜가 북해빙궁의 전인인 건 맞지만 북해빙궁이 이 땅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야.”
매우 아쉽다고 말하는 듯한 말투다. 자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운의 말에 홍우 대사가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천 대협?”
자운이 설혜를 바라보자 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 민감할 수도 있는 문제이고, 설혜는 자운이 그 민감할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설혜의 동의를 구한 자운이 입을 열었다.
“설혜가 북해빙궁의 유일한 전승자라는 말이지.”
자운이 내공을 이용해서 단번에 얼어붙은 술을 녹이며 말했다. 강력한 내공에 의해 술이 녹아내리고, 자운이 그 술을 그대로 들이켰다.
화끈한 감각이 그대로 목을 타고 내려간다.
“크으, 좋다. 너도 한잔할래?”
자운이 다른 한 잔을 녹여 설혜에게 건네었다. 설혜는 자운이 건네는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잔을 받아 들었다.
그녀 역시 한잔을 그대로 넘긴다.
술잔을 그대로 넘긴 설혜는 무뚝뚝하니 빈 잔을 다시 자운에게 건네었다. 자운이 피식 웃으며 잔을 다시 받아 들었다.
자운과 설혜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홍우가 나지막이 불호를 외우며 설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소림의 방장이 그렇게까지 사죄를 한다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줄만도 한데 설혜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설혜가 응수하지 않자 홍우가 자운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운을 향해 나지막이 전음을 보낸다.
[시주, 내 시주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홍우의 말에 자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의 상황은 걸왕에게 들어 알고 있었으나, 그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전혀 모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취임식이 끝난 후에 내 시주를 찾아가겠습니다.]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의 의사를 표했다.
[그래, 그러든가.]
취임식이 끝난 늦은 오후 무렵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문파로 돌아갔다. 하나 그중 일부 몇몇이 황룡문에 남아 하루 더 머물었고, 그들 중에는 구파의 장문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운이 자리에 앉은 채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퉁 하는 소리가 울리고, 자운이 손을 뻗는다.
“들어올 거면 발리 들어오든가. 문 앞에서 뭐하는 거야?”
문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자운이 손을 뻗었고, 허공섭물을 이용해 문이 벌컥 열렸다. 문 너머로는 구파의 장문인들과 개방의 방주가 서 있었고, 손도 대지 않고 문을 여는 허공섭물에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나, 자운만큼 소리도 나지 않게 매끄럽게 문을 여는 것은 무리다. 과연 절대의 경지에 오른 고수. 홍우가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